Sequence of Love

2019. 11. 30. 23:30

 

 

 

 

 

누구에게나 신입생의 봄은 설렘과 기대에 부풀어있다.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딱히 가고 싶은 과와 대학이 있던 건 아니지만 매일같이 귀에 딱지가 얹도록 엄마는 말해댔다. 사람은 상경해야 한다, 서울에 있는 대핵교 그 세 손가락에 드는 곳에 내 자슥이 들가면 을매나 좋겠나? 그래서 정인은 나름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다.

 

세 형제 중 중간에 있는 둘째는 큰 관심을 못 받기 마련이다. 첫째는 장남이다, 셋째는 막내다, 명분이라는 게 있지만 어중간한 둘째는 없었다. 정인은 항상 모호한 위치였다. 그래서 공부라도 열심히 하고자 했다. 대학 발표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고 마우스 클릭을 헛손질했는지 모른다. 옆에 있던 형은 그런 정인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뭐, 조회 버튼이라도 대신 눌러주까? 선심 쓰듯 묻기에 마 됐다고 마우스를 빼려 했는데 실수로 확인 버튼을 눌러버렸었다. 그 날은 다시 생각해도 코미디였다. 곧 화면에는 합격을 축하한다는 파란 글자가 떴고, 합격 창을 보고 넋이 나간 정인 대신 형인 정원이 호들갑을 떨며 방을 나가 소리쳤다. 엄마!! 인이 합격해따!!!! 합격!! 머라꼬?! 합격?! 그게 참말이고?! 하이고, 우리 인이!!!! 그라믄 서울 올라가는기가?! 주방에서 방까지 달려온 엄마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정인을 껴안았다. 인아, 욕봤데이. 이제 열심히 대학만 다니면 된다이가. 신이 난 나머지 떡이라도 돌려야겠다며 엄마는 바로 핸드폰을 들어 떡집에 전화를 걸었다. 성아 엄마? 나 원이 엄마. 우리 시루떡 두 박스만 만들어도. 와긴! 우리 인이 대학 합격했다! 그것도 서울에 있는 대학이라 안카나! 시끄럽게 핸드폰을 들고 호들갑을 떠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인은 다시 화면에 시선을 뒀다. 합격을 축하한다는 문구 위로는 저의 이름 생년월일, 수험번호, 지원과가 다 적혀있었다. 몰려있던 긴장이 단번에 풀려버렸다. 거짓말 조금 보태 위경련처럼 심장이 떨렸다. 거의 쓰러지다시피 침대 위로 쓰러진 정인이 방 천장을 의미 없이 올려다보며 두 눈을 끔벅였다.

 

12년간 열심히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던 노고의 결실이었다. 코피까지 흘리며 공부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근데 그게 이상하게 기쁘기는커녕 공허했다. 열아홉까지가 인생 1회차였다면 스물부터는 다시 인생 2회차 시작 같았다.

 

고작 수능 한 번으로 새 인생의 지표를 찍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기분에 입안이 씁쓸했다. 난생처음 홀로 겪어야 하는 타지생활에 걱정 반 설렘 반이었다. 정자세로 누워있던 몸을 옆으로 굴려 핸드폰을 만지작댔다. 기왕이면 기숙사보단 자취하고 싶은데. 엄마가 쉬이 허락할지 모르겠다. 그 보다 우선 서울살이에 적응을 잘 할 수 있을지도 고민이 됐다. 나고 자란 곳이 부산이다 보니 정인은 서울에 대해 무지했다.

 

언젠가 엄마가 말했다. 사람은 어디에 놓여있어도 어떻게든 적응해 살게 된다고. 설사 그게 무인도라 한들 차츰 익숙해질 거라고. 느이 형도 군대 갈 때만 해도 질질 짜더니 봐라. 짐 말뚝 박고 일하지 안나. 그러고 보니 입대 전 가고 싶지 않다고 형은 궁상맞게 울어댔었다. 지금은 군부대 소위로 말뚝을 박는 중이었고 이제 FM 생활의 군인이 되었다. 그래 그렇게 헬이라는 군대도 적응하는데 서울살이라고 못할까. 조용히 생각을 곱씹던 정인은 마음을 다잡았다. 기왕 새로운 곳에서 새로 시작하는 대학 생활 저도 새 마음가짐으로 다녀보겠노라고. 번잡스러운 만남의 지속도 청산하고 이번엔 기필코. 기필코 제대로 된 남자친구 하나 만들어 남 부러운 연애 한번 해보고 마리라.

 

그렇게 부푼 다짐을 안고 이민 가방 버금가는 캐리어를 끌고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를 타고 올라와 입학했는데. 새로이 수년간 함께할 동기들과 선배들 얼굴도 좀 익힐 겸 OT에 참여했는데.

 

 

“...정인이?”

 

 

그러니까 형이 왜 거기서 나와?

 

 

 

 

Sequence of Love

 

 

 

 

정인은 게이였다. 클로짓은 아니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이상 게이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교복 아니면 생활복만 줄곧 입고 다니는 허여멀건 한 고등학생이 여타 남학생들과 똑같으니 못 알아볼 만도 했다. 판도 좁은 데다 어리다 보니 어디 쉽게 누군가를 만날 짬밥도 되질 못 했다. 연애하고 싶었지만, 상대를 찾기도 어려웠다. 종종 들어가는 게이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연애 글들만을 대리 위안 삼으며 부러워할 뿐이었다. 종종 어플로 만났다는 글을 볼 때면 어플을 다운 받아볼까 싶다가도 어플로 호되게 당한 사람들의 후기도 만만치 않게 올라와 또 그 맘이 쏙 들어가 버리는 거다. 어플은 원나잇 하려고 등록하는 놈들도 개 많아요. 가능하면 거르세요. 먹튀나 어장관리, 똥차 경험 썰들을 보면 전부 다 어플 만남이었다. 원체 모든 것들을 조심스레 생각하는 정인으로서는 그런 글을 접할 때마다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연애란 것이 해보고 싶었다. 머리털 나고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니까. 어떻게 보면 로망이었다. ‘연애’를 글이나 말, 영상으로만 보고 배우기만 했으니 실전을 접하고 싶었다. 이따금 속에 있던 연애 세포들이 줏대 없이 날뛰어 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연애가 고팠다. 남들 보면 여느 커플처럼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손도 잡고 공원도 거니는 그런 연애 말이다. 그게 가을이면 유난히 심해졌는데 가을 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정인은 생각했다.

 

그날도 하필 딱 가을인 추석이었다. 외로운 정도가 배는 심했던 때다. 언제까지고 혼자서 궁상맞게 방안에 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늘어지게 누워있던 몸을 일으킨 정인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때의 저는 다시 생각해봐도 미쳤던 게 분명하다. 무슨 배짱인지 홧김에 어플을 깔고, 제일 잘 나온 사진으로 프사를 등록하고. 듣기만 해봤지 직접 써보는 건 처음인 앱의 UI를 살펴보다 차례로 나열된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식과 노식을 먹이기 바쁘던 그때, 메시지가 날라왔다.

 

 

-안녕. 학생이에요?

 

 

메시지 옆에 보이는 프사가 잘 안 보여 눈을 게슴츠레 뜨고 쳐다보던 정인이 프사를 눌러 그 사람의 프로필로 들어갔다. 고화질로 본 남자의 프사는 KTX에서 타고 봐도 강아지상이었다. 눈매가 선했다. 나쁜 짓이라곤 한 번도 저질러 보지 않았을 것 같은 생김새였다. 흰 티셔츠 위에 베이지색 랄프로렌 와이셔츠를 걸쳐 입은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정인이 자기소개 란을 봤다. 177/슬림 탑/20. 어려 보이게 생겼다 싶더니 저랑 딱 한 살 차이였다. 만남이든 뭐든 같은 성향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처음이었다. 겁은 나긴 하지만 저런 인상의 형이라면 그래도 안면 정도는 터도 괜찮을 것 같아서. 다시 몸을 침대 위로 누운 정인은 본격적으로 키패드를 쳤다.

 

 

-안녕하세요ㅋㅋ 네 고등학생이에요. 열아홉.

 

 

보낸 제 메시지를 육성으로 한번 읊다가 실소를 터뜨렸다. 와 진짜. 나 개 찐따 같다. 평소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땐 맞춤법도 다 무시하고 보내고 ㅋㅎㅎ,ㅗ를 난사하던 저가 게이 친구 한번 만나보겠다고 격식을 차리고 앉아있다. 제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남자에게서는 금방 답장이 왔다.

 

 

-열아홉이면 애기네요 ㅎㅎㅎ 

 

 

애기? 애기??? 누가 누구 보고 애기래. 00년생이 01년생 보고 할 소리는 아니지 싶었다. 나도 따지고 보면 01년 2월생인데. 빠른으로 학교 들어갔으면 똑같이 대학생이었다고, 이 사람아. 그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말들을 정인은 연이어 고시랑댔다. 친형처럼 서너 살 차이면 몰라. 고작 한 살 가지고 저를 어린애 취급을 하는데 살짝 기분 나빴지만, 정인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사실 아까 대강 훑었던 사람들보다는 메시지를 주고받는 이 형의 얼굴이 제일 식이었기 때문에. 정인이 채 뭐라 답장을 하기도 전에 연이어 메시지가 날아왔다.

 

 

-부산 살죠? 무슨 동? 나도 지금 부산인데 ㅎㅎ 

 

 

그러고 보니 아까 전 프로필을 봤을 때 나와의 거리가 9km였다. 만나자고 밑밥을 까는 건가. 제법 심각해진 얼굴로 정인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수정동이요. 형은요?

-저는 광안리 쪽이요. 할 거 없으면 만날래요? 나 심심한데.

 

 

예상은 했지만, 막상 실제로 만나고 하니 겁이 좀 났다. 하지만 아까 무어라 했는가. 열아홉의 그것도 외로움에 극이 달한 청소년은 연애가 고팠다. 아직 제대로 된 앞길의 분간도 모르는 어린 양은 저 질문에 풀 뜯어 먹듯 쉬이 OK,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광안리에 있다길래 서로 걸리는 시간대가 비슷한 중간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멋 좀 낸답시고 평소엔 잘 입지도 않는 스키니 블랙진에 목폴라, 흰색 셔츠까지 꿰입은 정인은 만나기로 한 장소 앞에서 상대를 기다렸다. 메시지로 주고받는 거 귀찮으니까 그냥 카톡 교환할래요? 그 제안과 함께 남자는 쉬이 자신의 번호를 넘겼고, 그냥 받을 수만은 없어 정인도 제 번호를 알려줬다. 흘러가는 대화의 무드가 유연한 것을 보아하니 한두 번 만남 어플을 써본 솜씨가 아닌듯했다. 커뮤에서 이런 사람들은 조심하라 했어. 근데 그렇다 하기엔 사람이 너무 순하게 생겼는데. 코를 훌쩍이며 대화창을 들어갔다. 다다음 정류소면 내린다는 남자의 대화가 5분 전이었다. 카톡 프사는 또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야구 배트 하나씩 들고 돔구장 같은 곳에서 찍은듯했다. 운동하는 형인가. 운동 전혀 안 하는 것처럼 생겼는데. 의외인 면에 이전 프로필 사진들을 염탐하며 홀로 상대방에 대한 추측이 머릿속으로 난무하던 그때. 등을 두드리는 손에 소스라치게 놀란 정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팩하니 돌렸다.

 

 

"정인이?"

 

 

그때도 똑같이 제 이름만 불렀다. 적당히 찢어진 스키니 청바지에, 벙벙한 폴로셔츠를 입은 남자의 얼굴은 조금 전 자신이 몰래 구경하던 프사의 주인공이었다. 진짜 강아지처럼 생겼네. 정인이 처음 느낀 그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리고 탈선을 저질렀냐, 하면 아니오. 바로 모텔이라도 직행할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그 형은 정인의 팔을 잡고 근방에 있는 패스트푸드 점으로 들어갔다. 뭐 먹을래. 사줄게요. 존대를 할거면 존대를 하고 반말을 할 거면 반말을 하지, 어중간한 반 존대를 쓴다. 그게 제 딴에도 불편했다. 그래서 사주겠다는 말에 거절하지 않고 키오스크 앞에서 메뉴를 골라 담던 정인은 덤덤히 말했다. 형이니까 그냥 말 놓으세요. 그래도 돼? 아까만 해도 말 놓고 싶어 하는 눈치를 그렇게 봤으면서 저런 소릴 한다. 무어라 쏘아붙이려다 금세 포기하고 입맛만 다신 정인이 고갤 끄덕였다. 네. 걍 하세요. 형은 뭐 드실 거에요? 나는 빅맥 세트. 요청대로 정인은 빅맥 세트까지 담고 결제창이 뜨고 나서야 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이것도 다 한때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한 짬밥이었다. 결제가 끝나자마자 종이로 나오는 영수증과 번호표를 들고 적당한 자리에 앉고 난 뒤로는 소소한 질의응답들이 오갔다.

 

고3이면 수능 준비 중이겠네. 그쵸, 뭐. 형은 대학생이죠? 응, 근데 아직 1학년이라 모르는 게 더 많지, 뭐. 정인이는 가고 싶은 대학 있어? 붙임성이 참 좋다. 그새 저를 보고 정인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그냥 목표는 없구. 등급 보고 맞는 곳에 적당한 대학 집어넣게요. 어릴 땐 유치원 교사, 신부님 등 별 꿈들이 많았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딱히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번호가 적혀있는 영수증을 만지작거리는 정인을 쳐다보며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승민이 웃었다. 등급 맞춰서 과 안보고 대학 들어갔다가 나중에 후회한다? 헹, 그러는 형은 가고 싶은 대학 갔어요? 갔지. 무슨대 무슨과 인데요. 질문보다 전광판에 뜬 대기 번호가 한 발 더 빨랐다. 검은 화면에 깜박이는 새하얀 숫자를 쳐다보던 정인은 뱉으려던 말을 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픽업대로 갔다.

 

햄버거를 먹고,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고, 카페에 가서 빙수까지 먹으니 해가 다 져버렸다. 그야말로 건전하디 건전한 만남이었다. 여느 고딩 친구들하고도 충분히 놀 수 있는 그 루트였다. 정인은 솔직히, 조금 실망했다. 평상시와 별다를 게 없었다. 그나마 친구들과 하지 않는 짓이라면 이따금 손을 잡아 오거나, 차가 오면 어깨를 당겨오는 것뿐이었다. 승민이 손을 잡아 올 때마다 정인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긍정적인 의미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쓴 돈은 전부 승민의 지갑에서 빠져 나왔다. 한 살 위의 대학생이어도 크게 버는 돈도 없을 텐데 계속 승민이 저가 내겠다며 나선 거긴 하지만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밤 9시를 찍고 둘은 버스 정류장에서 인사를 나눴다. 그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 정인은 승민에게 헤어지기 전에 말했다. 다음번엔 제가 쏠게요. 온종일 얻어먹은 게 많으니 밥 한 끼라도 사줘야겠다 싶었다. 처진 눈을 깜박이며 그런 정인을 쳐다보던 승민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좋아. 근데 정인이 너 다음에 나 보려면 반년은 기다려야 할걸.”

 

 

순간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정인은 승민이 보는 앞에서 체면이고 뭐고 제 귀를 팔 뻔했다. 뭐요? 반년?

 

 

“사실 나 추석이라 지금은 할아버지 댁 내려온 거고. 집은 서울이거든.”

 

 

오, 마이, 갓.

 

사는 곳이 서울이라는 말에 장거리라 이 이상 만나는 건 무리다, 그만하자. 란 소리가 쉽게 나올 리 없었다. 그랬다면 지금 정인이 피 같은 용돈으로 왕복으로 끊은 KTX를 타고 올라갈 일도 없을 터였다. 그것도 이번이 서울로 올라가는 게 세 번째였다. 둘은 서로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한 달에 두 번씩은 만났다. 이번이 여섯 번째 만남이었다. 성정이 매정하질 못했다. 한번 빚을 갚으면 무조건 갚아야 직성이 풀렸고, 무엇보다 그 날 처음 만났던 승민은 사진보다 실물이 더 제 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똥차, 폐차 만나 망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보기만 해 걱정이 앞섰던 것과는 달리 처음 만난 사람이 생각보다 괜찮은 형인 것 같아서.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 높은 건물과 빌딩들을 쳐다보던 정인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창에 머리를 기댔다.

 

아직 제대로 된 관계 정립을 하지는 않았지만 세 번째 만남에 둘은 키스했다. 딱히 할 게 없어 DVD방에 가서 영화나 보자고 한 게 시발점이었다. 난생 겪어본 첫 키스는 생각보다 기분 좋았다. 초반엔 뜨겁고 말캉한 게 입안을 들어와 헤집는 게 퍽 익숙지 않아 혀가 빳빳하게 굳었지만 금방 익숙하게 뒷목을 잡고 느릿하게 주무르는 승민의 손에 힘이 풀렸고, 입안을 여기저기 헤집어대는 혀에 몽롱해졌다. 종국엔 저도 승민의 볼을 잡고 열심히 혀를 움직였으니 말 다 했다. 러닝 타임 3시간 중 한 시간 반을 날려 먹었다. 키스를 하느라.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즈음이 되어서야 둘은 아쉽게 떨어졌다. 퉁퉁 부은 입술로 DVD방에서 나오자마자 승민은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쭈쭈바 두 개를 사 들고 왔다. 웬 아이스크림인가 싶었는데 손수 봉지를 까 꼬다리를 떼주면서 말하는 거다. 입술 뜨겁지. 땡땡 부었어. 식혀야 돼. 손수 입에 쭈쭈바까지 물려준 김승민은 과하게도 배려심이 넘쳤다. 그 날 내려가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둘은 역 화장실 칸에 들어가 또 한 번 키스했다.

 

이제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자연스레 마주치는 눈빛이 조금 짙어졌다 싶으면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몇 번 해봤다고 이제는 꽤 혀를 쓰는 것에 익숙해진 정인은 반사적으로 눈도 잘 감고 승민의 목도 넙죽 넙죽 끌어안았다.

 

사귄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미 혀도 섞고, 모텔도 대실 해서 헐 벗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자던 날, 정인은 내내 울었다. 8할이 아파서이긴 했지만 세심하게 신경 써주고, 기분 좋게 해주려 애쓰는 승민이 좋았다. 아프면 말해. 싫어도 말해. 바로 그만둘 테니까. 조근조근 다독여주는 목소리에 꾸역꾸역 참다가도 기어이 눈물을 흘리는 저를 내려다보며 승민은 수도 없이 눈물을 닦아줬다. 울지 말라고 눈가고 볼이고 입가고 여기저기 입을 맞춰주는 다정함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것들뿐인지라. 열아홉 정인은 그저 스무 살 승민이 좋았다. 마음에도 없었다면 애초부터 거금을 써가며 서울을 오가지도 않았을 테다.

 

부산으로 돌아갈 때, 곧 종강하면 부산에 내려갈 여유가 있을 거란 그의 말과는 달리 12월 초 기점으로 승민에게서 연락이 뜸해졌다. 1은 사라졌지만, 답이 없어 방치된 카톡방을 며칠 동안 노려봤는지 모른다. 우리 다음엔 언제 만나느냐 톡을 했더니 5시간 후 답장이 왔다.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동기들끼리 봉사활동을 다녀야 해서 만나기 힘들 것 같다는 답변이었다. 그리고 의심은 의심을 낳았다. 근데 만약 봉사가 아니라 거짓말이라면?

 

페북 친구는 아니지만 이름을 검색하는 것쯤이야 쉬웠다. 10분 만에 찾아 들어간 그의 페북은 20분 전에 올라온 사진이 마지막이었다. 술집에서 친구들과 다 같이 모여 찍은 사진. 그 아래로는 어제 다른 친구의 페북이 태그된 사진이 보였다. 스크롤 바를 내리며 발을 달달 떤 정인이 코웃음을 쳤다. 바쁘다고 한 게 친구들이랑 노느라 바쁘다 하신 거였어? 스크롤을 내려도 내려도 줄창 술집에서 찍은 사진들에 태깅된 승민뿐이다. 계속 보고 있으면 울화가 치밀 것 같아 정인은 신경질적으로 페북 앱을 껐다. 왜 사람들이 이런 걸 판도라의 상자라 하는지 알겠다. 물론 서치 해 들어가 확인한 저가 제일 멍청이지만 사진을 보고 확인사살을 당하니 이쯤 되면 승민이 저를 가지고 노는 건가 싶었다.

 

10대는 그 누구보다 치기 어렸다. 기다 아니다 확실한 게 필요했고, 저한텐 바쁘다 해놓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김승민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결국, 짜증이 한발 앞선 정인은 한동안 침대에 누워 뒤치락거리다, 2시간 전 승민이 대답한 채팅방에 들어가 꾹꾹, 한껏 짜증을 담아 키패드를 눌렀다.

 

 

[형은 저랑 자려고 만나죠?]

 

 

순전히 홧김이었다. 10분 뒤면 제정신으로 돌아와 양정인 미쳤어, 등신, 천치라고 욕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을지 모르지만, 인간은 순간에 충실한 동물이라, 지금 막 카톡을 보낸 순간 정인은 후회되질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모 아니면 도였다. 채팅장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노라니 1은 금방 사라졌다. 20분 전이 술집이었으니 아직도 술집일 터였다. 잠시 술 마시다 쉬는 타임이기라도 한가보다. 세우고 있는 한쪽 다리 무릎 위에 남은 다리를 올린 정인은 또다시 발을 달달 떨었다. 할머니가 본다면 복 달아난다고 발등을 때렸겠지만 불안하면 반사적으로 나오는 버릇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형 너는 뭐라 대답할래. 1은 사라졌으니 이제 남은 건 승민의 대답뿐이었다. 내심 정인은 승민이 아니라고 해주길 바랐다. 내가 왜 너랑 자려고 만나, 정인아.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그런 소릴 해. 주말에 형이 내려갈까? 원하는 시뮬레이션의 대답은 그랬다. 그런 대답이 와 주길 내심 바랐다. 적어도 승민이 저처럼 진심이었으면 했으니까.

 

노려보기만 하던 화면이 이내 자동으로 꺼져 컴컴해졌다가, 가벼운 진동과 함께 대기화면에 답장이 떴다. 차마 보지 못하겠는 마음에 정인은 두 눈을 꾹 하니 감아버렸다. 가슴이 제 맘대로 뜀박질을 쳐댔다. 전처럼 똑같이 다섯 시간 후에나 보낼 것이지 왜 이렇게 일찍 보냈대. 한껏 맴도는 긴장감 속에서 방 안은 적막했다. 제발, 제발, 하나님. 모태신앙이지만 잘 찾지 않던 하나님을 절실하게 불렀다. 기도문까지 중얼중얼 외다 꾹 감고 있던 눈을 차츰 뜬 정인은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승민에게서 온 카톡을 확인했다.

 

 

[승민이형♥ : 너도 그런 거 아니야?]

 

 

시뮬레이션이 울고 갈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예상은 했어도 저런 식의 대답이 올 줄은 몰랐다. 배신감에 달달 입술이 떨렸다. 잠시간 승민의 카톡을 말 없이 쳐다보던 정인은 그대로 전화번호부에서 승민의 번호를 삭제했다. 카톡도 차단을 먹였다. 만남 어플도 미련 없이 삭제했다. 그 와중에도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 베갯잇을 적셔댔다. 진짜. 개 짜증나. 존나 짜증나. 씨발. 개새끼. 재수 없는 새끼!!!!! 기어이 정인은 악을 지르며 엉엉 눈물을 터뜨렸다. 비록 짧은 시간이긴 했으나 여태껏 제 마음이 단번에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그럴 거면 다정하지나 말던가. 실연이 이렇게 슬픈 거였으면 애초에 만남 어플을 깔지도, 승민과 만나려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내가 다신 저딴 새끼랑 만나나 봐. 이를 바득바득 갈며 정인은 눈물을 훔쳤다. 그게 열아홉 겨울이었다.

 

그리고 스무살 봄. 대학에 들어갔다. 여느 대학교 앞 원룸촌이 그랬듯 싱크대, 가스렌지, 전자레인지, 화장실 필요한 건 다 구비 되어 있었지만 집이 좁았다. 그나마 제일 맘에 들었던 넓은 신식 투룸 건물은 한 달 80을 부르길래 식겁하며 단번에 포기했다. 80은 저에게 사치였다. 운 좋게 서울에 사는 엄마 친구 아들이 고3이라 과외 선생을 구한다기에 한다고 했다. 엄마에게 손을 벌릴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는 제 선에서 생활비라도 충당해야만 했다. 짐을 다 정리하고 침대에 시트까지 갈아 끼운 정인이 쓰러지듯 침대 위로 누웠다. 내가 상경이라니. 아직도 주변에서 서울말씨를 쓰는 사람들의 말만 들려도 귀가 간지러웠다.

 

그렇게 승민을 차단 먹이고 남은 3개월 동안 놀랍게도 정인은 이 남자 저 남자 만났다. 비록 단순 만남에 대실 해서 유사로 끝내는 게 다긴 했다. 올곧이 김승민에 대한 경험만 가진 채로 서울로 올라가기는 싫었다. 정말 꼴 같지 않은 자존심이었다. 이제는 대학도 들어갔겠다, 교내 퀴어 동아리든, 밖이든 제정신 박힌 남자 하나 만나 제대로 된 연애를 해봐야겠다 싶었다. 인생 스무 살부터 시작인데, 암. 괜찮은 남자야 깔리고 널렸을 거라고. 그렇게 부푼 맘을 안고 정인은 OT 준비를 했다. 나름 아끼는 후드티랑 바지를 챙겨 입고, 집합하라던 장소에 모여 처음 보는 동기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참석이 자유여서인지 모인 사람들은 많지는 않았다. 이미 다 줄을 세운 타과와는 달리 생판 모르는 신입생들만 있는 정인의 과는 인솔자를 찾으라 두리번대기 바빴다.

 

머지않아 인파를 뚫고 학회장으로 보이는 선배가 나타나 안경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여기 사복과 맞죠? 네에. 늦어서 미안해요. 봉활 하고 오느라 시간이 좀 늦어졌어요. 저 따라오세요. 앞서 걷기 시작하는 선배를 따라 뭉쳐있던 무리 들이 줄을 맞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학교를 빠져 나와 근처 술집에 들어서자 드문드문 테이블에 선배로 보이는 이들이 앉아있었다. 학회장은 줄을 지어 선 채 긴장한 신입생들을 보며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다들 편하게 앉아요. 어차피 오늘은 얼굴들 익히고 궁금한 거 물어보고 대답해주는 그런 자리니까. 우리는 뭐 크게 대면식이다 뭐다 그런 것도 없거든요. 사회복지과답게 군기 같은 것도 없나 보다. 눈치를 보다 하나둘 앉는 동기들을 보며 정인도 대강 보이는 빈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엔 아까 들어오기 전부터 앉아있던 선배로 추정되는 이가 있었다. 과와는 어울리지 않게 벙벙한 힙합 맨투맨과 테크웨어 바지 차림에 귀까지 뚫고 있어 겉모습만 보면 날 티 나게 생겼다. 인상까지 제법 매서워 테이블에 앉은 셋이 일제히 눈치를 보자, 당사자는 금방 이럴 줄 알았다며 조금은 억울 하단 듯이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와, 진짜. 내가 생긴 건 이렇게 생겨 먹었어도 성격 좋다는 소리는 많이 듣거든요, 무섭다고 눈치 보지 말아요들.”

 

 

이미 음식은 세팅한 지 오래였고, 버너의 불을 켠 선배는 조잘조잘 입을 열었다. 여기 골뱅이 소면이랑 오삼새 진짜 맛있거든요? 이따가 끓으면 덜어줄 테니까 한입씩들 맛봐봐요. 친구들. 배고프죠. 아, 그러고 보니 통성명을 안 했구나. 나는 18학번 황현진이고, 스물하나. 현역 2학년이에용. 현진의 입에선 생김새와 달리 애살스러운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것저것 챙겨주는 현진의 모습에 바짝 세우고 있던 긴장이 풀렸다. 같은 테이블의 동기들이 돌아가며 가볍게 이름과 나이를 이야기했다. 각자 테이블마다 다르겠지만 정인의 테이블은 전부 다 현역이었다. 술잔 좀 채워달라는 학회장의 말에 맥주 뚜껑을 딴 현진이 빈 잔에 술들을 따라줬다. 다들 술들은 좀 해요? 우리가 군기는 안 잡아도 술은 진짜 잘 맥이는데.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현진의 뒤로 일어선 학회장의 건배사가 이어졌다. 아, 그렇다구 해서 겁먹지 않아두 돼요. 못 마시겠다고 하면 억지로 먹이지는 않으니까. 얼마 안 가 잔 네 개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물기가 맺힌 잔을 들며 어색하게 웃어 보인 정인은 머리를 굴렸다. 어떡하면 많이 안 마시고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그렇게 술 한 잔을 들이켜는데 뒤에서 등을 두드리는 손이 있었다. 아는 얼굴도 없어서 부를 사람도 없을 텐데. 반 정도 마시고 있던 잔을 뗀 정인이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보이는 건 초중고 동창도, 가벼운 만남으로 만났던 사람들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 이곳에는 없어야만 할. 3개월 전, 근 몇 달 동안 절 쥐락펴락하다 울게 만든.

 

 

“정인이?”

 

 

김승민이었다.

 

 

**

 

 

부스럭부스럭 대는 소리에 정인은 잠에서 깼다. 상체를 일으키려 하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다시 도로 누워버렸다.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떠 주변을 살폈다. 배경은 제집이 아니었다. 집을 고를 때 저가 제일 탐냈었던, 월 80짜리 큰 투룸이었다. 탁상 위 디퓨져하며 미니 전등에 나란히 세워진 책들까지 정돈이 착실하게 된 방을 보며 정인은 속으로 기함했다. 도대체 얼마나 깔끔을 떨어서 집이 이렇게까지 깨끗해? 잘은 모르겠지만 집주인이 결벽으로 유난 하나는 엄청 부릴 듯 했다. 어젯밤 적게 마시겠다던 의지와 달리 정인은 술을 들이부었다. 그도 그럴 게 눈앞에 예상도 못 한 김승민이 있었으니까. 만나도 어떻게 같은 대학 그것도 같은 과 선후배로 만나나 싶었다. 정말 지독한 인연이여. 얼굴을 보자마자 드는 생각은 그저 좆됐다, 였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원룸에 있는 짐을 도로 싸서 부산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직 입학 무를 수 있나. 아님 자퇴를 해야 하나. 자퇴를 하자니 이 대학 합격하자마자 아파트에 현수막 걸고 같은 둥 온 호수에 떡을 돌리며 자랑을 해대던 엄마가 생각나 눈물이 났다. 백퍼 이 학교 안 다니겠다 하면 엄마는 뒷목 잡고 쓰러지겠지. 그렇다고 계속 이 학교에 다니자니 저가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선택의 기로에 선 정인의 도피처는 술뿐이었고, 그래서 코가 비뚤어져라 마셨다. 여기저기서 건네오는 술 마다하지 않고 다 마셔댔다. 그러니 필름이 끊길 수밖에 없었고, 꽐라가 된 저를 부축해 먼저 들어가 보겠다 하던 이의 옷에 거하게 토를 한 것까지. 기억이 났다.

 

머리를 쥐어뜯던 정인은 순간 제 몸이 허전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맨몸에 브리프 차림으로 이불만 덮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신이 말끔하게 돌아오니 허리도 찡한 것이 느껴졌다.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만약 이걸 엄마에게 들킨다면 뒷목에서 끝나지 않고 제 머리털이 죄다 뽑히고도 남았다. 진짜, 미쳤어. 돌았어.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사고를 쳐도 단단히 쳤나 보다. 이불을 만지작대며 잠시 고민하다 정인은 몸을 일으켰다. 우선 저를 들쳐 안고 온 이에게 사과해야 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저를 데리고 오느라 얼마나 욕을 봤을지 안 봐도 뻔했다. 열어진 방문에선 직방으로 부엌이 보였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뒷모습은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북엇국 냄새다. 저 때문에 만드는 해장국인 것 같아 머쓱함에 큼큼, 목소리를 다듬자 기척을 느낀 건지 국자를 젓던 뒷모습의 이가 몸을 틀어 제 쪽을 쳐다봤다.

 

 

“정인이 일어났어? 머리 아프지.”

 

 

그러니까, 형이 왜 또 여기에 있는 건데요.

 

금방 눈앞에 물이든 컵이 들이밀어 졌다. 꿀 탔어. 어제 많이 마셨잖아. 시발, 설마. 설마…? 아닐 거야. 형이랑 그럴 리가 없지 내가. 그렇게 이를 바득바득 갈아댔는데. 목이 타서 받아든 꿀물을 어쩔 수 없이 들이켰다. 두 눈은 자연스럽게 김승민의 목덜미를 훑었다. 없기를 바랐던 검붉은 울혈이 여기저기 자기주장들을 펼쳐댔다. 버릇이었다. 흥분하면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물고 빨아버리는 버릇. 그래서 초반에 승민이 무척 진을 빼며 다음날 대일밴드를 사와 목에 붙이던 일까지 있었더랬다. 아연실색한 저를 알면서도 그러는 건지 승민은 눈치 없는 척 말을 이어 갔다. 오랜만에 하는 거라고 너 엄청 엄살 부리더라. 금방 비워진 컵을 부드럽게 뺏어든 승민은 밥 다 됐으니 기다리라며 다시 방을 빠져나갔다.

 

승민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는 척을 해오는 걸 애써 모른 체하며 술을 들이켰고, 기어이 고주망태가 되어버린 저를 일으켜 먼저 가보겠다고 하던 김승민. 정인아, 똑바로 좀 걸어봐, 응? 취한 와중에도 그런 다정한 말투가 짜증이나 시비도 걸어댔다. 형은 그렇게 아무한테나 다정해여? 우리 이미 쫑난 사이인데 왤케 매너남처럼 굶? 재섭써. 뭐가 웃긴지 금방 부축하는 김승민의 입에선 김빠지는 헛웃음이 들려왔지만, 정인은 나름 진지했다. 인정하기 싫어도 순정이었다. 어플로 만난 건 조금 모양 빠지긴 하다. 그래도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형이었고, 승민의 다정함에 반했다가, 그 다정에 상처를 받았다. 근데 진짜 생각해 보니 웃기잖아. 자려고 만난 거였으면. 왜 그렇게 맛난 건 많이 사준 건데. 배려는 왜 그렇게 잘해준 건데. 그날만 생각하면 속이 화병 나듯 열이 올랐고, 눈물이 핑 돌았다. 나쁜 놈. 승민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욕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저를 끌고 걷는 당사자는 답이 없었다.

 

놔요, 혼자 걸을래. 되지도 않는 고집도 부려댔다. 알코올에 머리가 절여진 것처럼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눈앞이 드문드문 페이드아웃 되듯 새카매졌다 돌아왔다 하는데 혼자 걷겠다고 뻘 소리를 하는 저가 웃겼다. 승민은 생 떼 쓰는 걸 제일 싫어했다. 되도 않는 떼를 쓰는 저 때문에 그의 입에서 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어깨를 끌어안은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놓으면 금방 쓰러질 애가 그런 소릴 잘한다. 얼른 들어가자. 혼 내는 말투지만 목소리는 여적 다정하다. 아직 쌀쌀한 이른 봄의 밤공기에 머리가 아팠다. 희미한 담배 냄새와 익숙한 향수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러대니 안 좋은 속이 더 울렁댔다. 무슨 패기로움인지는 몰라도 정인은 승민을 한번 밀쳐 냈다. 안 밀려날 것처럼 굴던 승민도 차츰 성질이 난 건지 떠밀린 힘에 보란 듯이 정인에게서 몸을 뗐다. 지탱해 주던 승민이 한 발짝 떨어지자 또 한 번 취한 몸이 크게 휘청였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정인이 그런 승민을 향해 골이 난 얼굴로 고개를 팩 들었다. 진짜 떨어지란다고 떨어지냐!!! 맨정신이라면 절대 못 할 소리를 원룸촌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양정인. 지금 새벽 한 시야. 조용히 해. 형 너라면 조용하게 생겼어?! 진짜 이 나쁜 놈아!! 사람 실컷 데리고 놀다 버리니까 재밌…!!! 우욱. 그 언젠가 만나면 실컷 욕 해주고 돌아서야지. 했던 말들은 처참히도 마무리되질 못했다. 치밀어 오는 토기 때문에.

 

욕이라도 퍼부을 법도 한데 토를 하는 정인의 등까지 두드려줬다. 이쯤 되면 성자나 다름없었다. 다 토했냐는 물음에 끄덕이는 정인을 다시 부축한 승민의 입에선 큰 한숨이 흘렀다. 세 번째였다. 참을성 하나만큼은 끝내주지만 깔끔하지 못한 것은 죽어도 용납 못 하는 승민이었다. 그래서 집에 정인을 데리고 오자마자 바로 욕실로 직행했다. 아까 전 오바이트를 하느라 드문드문 튄 흔적을 놓치지 않고 봤기 때문에 바로 빨아야만 했다. 정인아. 만세 해봐. 만세. 제정신도 아닌 데다 힘이 없는 애가 자의적으로 만세를 할 리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승민을 그리 말을 하며 후드티 손으로 손을 집어넣어 정인의 소매에서 팔부터 뺐다. 다행히 안에 반소매 티를 받쳐입고 있어 새로 옷을 따로 입히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됐다. 손님용 칫솔 하나를 까 대강 이를 닦이고, 바지마저 벗기고 화장실 앞으로 내쫓듯 밀어냈다. 방에 들어가서 자고 있어. 형도 씻고 나갈게. 다시 닫히는 문과 물줄기 소리에 입술을 삐죽댄 정인은 승민의 방으로 거의 기어가듯 걸어갔다. 추웠다 따듯한 곳으로 들어오니 취기가 더 빠르게 온몸에 퍼지는 기분이었다.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워있으니 온몸이 노곤했다. 두 눈을 느릿느릿하게 감았다 뜨기를 몇 번을 반복하는 사이, 곧 젖은 머리를 털며 승민이 방을 들어왔다. 짧은 추리닝 반바지에 반팔티 차림새였다. 정인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런 승민을 훑었다. 그런 저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시선을 승민이 모를 리 없었다. 몇 번 자본 경험상 정인의 눈빛이 담고 있는 의도 또한 모를 리 없었고. 둘 사이에 먼저 섹스텐션을 부추긴 건 승민이 아니라 정인 본인이었다. 어지러울 텐데, 자자. 정인아. 침대 위로 올라와 이불을 정리하려는 승민을 그대로 눕혀버린 정인이 위에 올라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머리에 얹어져 있던 수건은 떨어졌고, 당황한 승민이 무어라 입을 떼는 것보다 셔츠 속으로 들어간 정인의 머리가 더 빨랐다. 아랫배에 닿아오는 뜨거운 입김에 허벅지 안쪽에 힘이 들어갔다. 뒤이어 배를 이로 깨물어왔다. 저릿함에 승민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졌다. 형, 남자친구 생겼어요? 아님 여자친구? 구질구질한 질문을 던져대며 정인은 셔츠 속에서 열심히 얼굴을 움직였다. 입술이 타고 올라오면 올라올수록 셔츠가 위로 젖혀져 맨살이 드러났다. 가만히 그런 정인의 행동들을 받아주던 승민은 가슴에서 뗀 입술이 옷에서 빠져 나와 목을 깨물려 들 때 그대로 몸을 반 바퀴 굴러 정인을 눕혀버렸다. 전만 해도 이러면 부끄러워하던 애가 이제는 제법 대담하게 바지 속으로 손까지 집어넣는다. 만지는 손놀림도 늘었다. 느릿하게 위아래로 쓸다 살살 엄지로 귀두를 비비는 자극에 승민이 거친 숨을 뱉었다. 정인의 브리프 속으로 집어넣은 승민의 손도 그에 맞춰 진득하게 움직였다. 색색 대는 정인의 입술 너머로는 알콜 섞인 민트 냄새가 났다. 몽롱한지 눈에 바짝 힘을 주려 하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가만히 그 얼굴을 내려다보다 코끝을 맞대 부비자 끙끙대던 입술이 승민의 윗입술을 물었다. 어라, 이거 봐라. 전엔 부끄러워서 먼저 키스도 못 했던 앤데. 이제는 먼저 능숙하게 입안으로 혀도 집어넣을 줄 알고, 입천장도 간질일 줄도 알았다. 어이가 없어 키스를 하다말고 혀를 밀어내 고개를 뗀 승민이 웃었다.

 

 

“너 형 없을 때 다른 애랑 했어?”

“…그걸 알아서 뭐하게?”

 

 

어쩜 이렇게 얄미운 소리만 잘도 골라 묻는지 모르겠다. 버린 건 지면서 추궁하는 질문에 날카롭게 반응한 정인이 부러 쥐고 있는 것을 더 꽉 쥐어버렸다. 때리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하니 소심한 복수였다. 아아. 아퍼. 엄살을 피우는 승민도 지지 않듯 정인의 것을 빠르게 손으로 훑었다. 이미 프리컴까지 흘리는 제 것과 달리 정인의 것은 아직 반밖에 서질 못했다. 형아, 내 짐 취해서 잘 안 서나 보다. 언제 고양이처럼 굴었냐는 듯 그새 눈썹을 내리고 사투리까지 써대며 찡찡댄다. 그런 정인을 내려다보며 승민은 성급히 허벅지에 걸쳐져 있던 브리프를 다 벗겨 버렸다. 안 서면 어때, 정인아. 넣는 건 형인데. 이미 형 껀 다 섰으니까 괜찮아. 협탁 서랍에 손을 뻗어 젤과 콘돔을 꺼내 드는 승민을 본 정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챙김받고 귀염받는 게 좋았다. 그걸 승민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집 안에선 삼 형제 중 둘째인 저를 얼러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 초반엔 오글거렸다가도, 종종 승민이 저에게 귀엽다, 착하다, 예쁘다 소릴 하며 앞머리를 넘겨주고, 귓바퀴를 만지고, 볼에 뽀뽀해줄 때면 기분이 좋았다. 한동안 넣질 않아 뻑뻑한 길을 트는 데엔 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도 승민은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손가락을 늘려가며 정인을 살폈다. 괜찮아? 안 이상해? 아프면 바로 말해. 알겠지. 아프다고 하면 바로 빼지도 않을 거면서, 그래도 다 저를 위해주는 말 들이라 정인은 또다시 눈물이 핑 돌 뻔했다.

 

손가락으로 공을 들인 탓인지 삽입은 제법 수월했다. 끝까지 다 밀어 넣은 승민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자 끙끙대던 정인의 입에서 얼마 안 가 앓는 소리가 흘렀다. 비록 몇 번 해보지는 않았으나 그게 좋아서 나오는 소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좁혀진 미간 새로 잘게 주름이 잡혔다. 그새 이마에 땀이 맺힌 얼굴을 훑어보며 느끼는 곳을 찾아 승민이 여기저기 찔러보던 찰나 깊숙하게 찔러넣은 한 지점에서 정인이 입을 벌렸다. 아, 아아. 거기. 여기? 여기 좋아? 응, 으응. 흐으. 좋아하는 곳만 자극받자 그새 인상을 푼 정인의 두 눈이 거의 감기다시피 했다. 정인아. 형 봐야지. 그러면 괜한 고집이 생겨 승민은 정인이 저를 봐주기를 종용했다. 보일러를 튼 따듯한 방 안에 더운 숨이 부유했다. 형, 혀엉. 애처럼 저를 부르며 매달려오는 정인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끼운 승민이 저보다 조금 더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눈이며 귀며 코며 입술이고 안 붉은 곳이 없다. 마음 같아선 다 잘근잘근 깨물어 삼켜 버리고 싶었다. 애써 그 욕구를 참아내며 승민은 아쉽게나마 눈에 보이는 정인의 귓불을 깨물었다.

 

 

“그래서, 형. 아까, 으응. 내 질문, 왜, 대답. 안 해, 줘.”

 

 

대답이고 뭐고 눈앞에 보이는 너랑 뒹굴고 있는데 대답이 나오겠냐고. 열심히 귀를 빠느라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 대신 승민은 혀를 내밀어 귓바퀴를 핥았다. 그게 자극적인지 박을 때마다 점점 오므려지는 두 무릎을 가볍게 무릎을 세워 저지한 승민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정인아 다리 조금만 더 벌려보자. 제 말에 대답은커녕 눈치 없는 척 다리나 좀 더 벌려보라 하는 승민이 짜증이 날 만도 했다. 반항하듯 벌리기는커녕 두 다리가 허공을 바동댔다. 아, 형 쪼옴! 왜, 왜. 뭐. 뭐. 성질을 부리자 그제야 귀에서 얼굴을 뗀 승민이 움직임을 멈추고 땀에 젖은 정인의 앞머리를 넘겨 주며 얼렀다.

 

 

“애인 생겼냐고오….”

 

 

구차하게 느껴져도 좋다. 찌질하다 생각해도 좋다. 근데 애인 있다고 하면 눈물 좀 날 거 같은데. 저 얼굴 저 성격에 애인이 그새 안 생겼을 리가 없겠지만. 저랑 연락이 끊긴 뒤 어떻게 지냈는지도 궁금했다. 한동안 말없이 승민은 정인을 내려다 봤다. 오랜만에 본 정인은 이전과 꽤 달라졌다. 고집스레 앙다문 입술 하며 이따금 무시하거나 흘겨보는 눈이 낯설었다. 그리고 지금 김승민의 시점에서 양정인은 아직도 알코올에 취해 해롱해롱한 상태였다. 안 그래도 교정을 하느라 그닥 좋지 않은 발음이 취해서 거의 뭉개지다시피 한 것만 봐도 그랬다. 어차피 지금 말해 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지만 고집을 부려대니 말해 줄 수밖에. 정인의 두 다리를 잡아 들어 어깨에 걸쳤다. 한층 더 깊어진 삽입에 정인이 헉, 밭은 숨을 뱉었다. 그와 반사적으로 내벽이 조여왔다. 단번에 몰려든 자극에 눈살을 잠시 찌푸리던 승민이 정인의 눈가를 문지르며 입을 뗐다.

 

 

“내가 애인이 있으면 지금 너랑 이런 짓 하고 있겠니, 정인아.”

 

 

그리고 곧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제아무리 부정해 보려 해 봐도, 조작 좀 해보려 해도, 불가능했다. 어젯밤 섹스 도중 제 입에서 나온 소리는 듣지도 못할 민망한 신음과 엉엉 울며 좋다는 말뿐이었다. 자꾸 좋다는 소릴 해대서, 종국엔 승민이 웃으며 그렇게 좋냐 물었고. 고개를 끄덕대며 더 세게 해달라 겁도 없이 뱉은 것도. 그리고 그 말에 자극받은 승민이 꽤 거칠게 움직이다, 몰려오는 사정감에 빠르게 움직이던 허리를 빼 빳빳이 선 성기에 씌워진 콘돔을 벗기고 몇 번 흔들다 제 배 위로 사정을 하는 것까지. 또렷이 다 기억났다. 게다가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저가 더 하자고 졸라 두 번 더 했던 것도. 미쳤다. 진짜, 미쳤어. 몇 주 금욕했더니 몸 정에 미쳤구나, 정인아. 속으로 욕을 삼킨 정인은 할 수 있다면 제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밖에서 밥 먹자는 소리가 발랄하다. 네. 마지못해 대답하던 정인은 제 목소리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얼마나 소릴 지른 건지 듣기 흉하게 갈라져 있었다.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둘은 밥을 먹었다. 식사 내내 말을 먼저 꺼내는 건 승민 쪽이었다.

 

 

“난 네가 우리 대학 올 줄 꿈에도 몰랐어.”

“저도요.”

 

 

알았으면 원서를 넣지도 않았겠죠.

 

 

“어떻게 와도 같은 과를 와? 형이 말해 준 적 없잖아.”

“네, 그랬죠.”

 

 

과라도 다르게 넣었으면 적어도 이런 식으로 만날 일은 없었을 텐데.

 

 

“어제는 그렇게 반말 찍찍 까더니 오늘은 또 제정신 돌아왔다고 깍듯하게 존댓말 써, 정인이?”

“아, 그건. 잊어 주세요.”

 

 

잠시 발끈하다 문득 떠오르는 어제 일에 급 민망해져 정인은 고개를 숙이고 밥만 퍼먹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승민이 웃는 게 느껴졌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는데 승민은 넉살 좋게 잘도 먹었다. 내가 요리실력이 그렇게 좋지는 못해서. 레토르트에 파랑 콩나물만 더 넣었는데, 맛있다, 그치. 네, 네. 자퇴하면 정말 호적에서 제 이름이 파일지도 모르니 정인은 제 나름의 루트를 짰다. 얼른 눈앞에 있는 밥을 해치우고, 옷을 챙겨 입고, 어제는 대단히 죄송했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나오기. 그리고 최대한 김승민을 피해 다니는 것. 근데 생각해 보니 짜증나네. 마음에도 없는 동생이 유혹 한번 했다고 그새 또 같이 자 주는 게 사람인가. 괜한 자존심이 상해 입안에 미어지라 집어넣은 밥을 꼭꼭 씹던 그 와중이었다.

 

 

“근데 정인아.”

“네?”

“왜 그때 이후로 연락 안 했어?”

 

 

왜 않긴요, 인간아. 네가 나랑 자려고 만난 거라면서요. 저 형이 진짜 어제부터 사람 서럽게 만드네. 하고 싶은 말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미 다 지난 이야기를 이제 와 꺼낸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래서 귀찮은 얼굴로 정인은 목만 긁적였다. 아니, 뭐. 형이 제 질문에 너도 그런 거 아니냐고 해서. 별달리 할 말도 없고, 그냥. 그냥 차단 먹이고? …어떻게 아셨어요? 그럼 내가 모르겠니. 시도 때도 없이 카톡을 보냈는데 1은 안 사라지지, 네 프사도 안보이지. 명백히 차단 아니냐고. 명백한 제 쪼잔함이 고스란히 승민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정인은 쪽팔려서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 나가고 싶었다. 아니, 그래도 너무 하네. 마치 저가 잘못했다는 것처럼 구는 승민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잘못한 건 본인 아닌가. 아까만 해도 구차하니 말하지 말자 했던 마음이 금방 뒤바뀌었다. 원래 사람 맘은 갈대 같은 것 아니겠냐고.

 

 

“근데 말은 바로 하세요. 나쁜 건 형이죠.”

“나? …나 왜?”

“제가 틈만 나면 언제 또 만나요, 언제 볼 수 있어요, 보냈는데. 그럴 때마다 자꾸 나중에 보자 하고, 시간 없다 하고. 당연히 나한테 질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아요?”

“…그리고?”

 

 

되묻는 질문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정인은 고개를 들어 승민을 쳐다봤다. 당황할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차분한 얼굴이 더 말해보란 듯이 고갯짓을 했다. 어느새 수저까지 내려놓고 내려놓은 두 엄지손가락을 맞댄 채 만지작거리던 정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다 봤어요. 형 페북.”

 

 

나한테 시간 없다고 하고, 대답도 다섯 시간이나 늦게 했을 때. 친구들하고 술 마시고 있던데요. 태그된 거 다 봤어요. 쪽팔림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냥 이렇게 벌려진 판 다 털어놓자 싶었다. 난 나름 형이랑 잘해보려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챙겨주는 형이 좋고, 얼굴도 내 취향이었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형이 카톡 대답도 늦고, 맨날 일 생겨서 바쁘다 하고. 속상하고 의심 갈 수밖에 없죠. 페북 염탐한 건 미안해요.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어요. 그날 술집에서 찍힌 사진 보고 욱해서 형한테 무작정 질문한 거예요. 형은 나랑 자려고 만나는 거냐고. 나는 진짜 형이랑 말만 않았지, 연애 비슷한 걸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형은 단지 나랑 자려고 만나는 거 같아서. 불안했어요. 아니길 바랐고요.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형이 너도 그런 거 아니냐면서요. 그 소리에 누가 상처를 안 받겠냐고요. 형은 아니었겠지만 전, 진짜 형 좋아했어요. 뜻하지 않는 고해성사가 되어버렸다. 다시는 승민을 못 볼줄 알았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언젠가 해도 승민의 앞에서 털어놓는 날이 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제 고백에도 승민은 표정을 굳힌 채 덤덤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에 또 서러워져 흐르던 눈물이 봇물 터졌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었던 말도 다 했고,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이라면 다신 마주쳐도 인사 안 하겠지. 빠르게 눈물을 훔쳐내며 정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 고개를 든 승민의 눈을 쳐다보지도 않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옷만 챙겨입고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날, 그렇게 정인은 제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래,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기왕 같은 과 선배인데 나중에 MT나 학술제에서 같은 조가 될 수도 있으니 차단은 너무했나 싶어 차단 해제했다. 차단이 해제되었습니다. 지금 친구로 추가하시겠습니까? 취소와 친구 추가 버튼 중 잠시 고민을 하다 친구 추가 버튼을 눌렀다. 금방 새로운 친구에 뜬 승민이 제일 상단으로 올라왔다. 프사는 이전 만남 어플에서 봤던 베이지색 셔츠를 입은 프사였다. 그래, 이런 얼굴로 열아홉을 꼬셨지. 참나. 내가 무슨 부귀를 누리자고 저거에 홀랑 넘어갔냐. 회상에 잠기듯 중얼대며 침대 위를 뒹굴었다. 21학점을 듣지만 운이 좋게 9시 아침 수업 공강이 주 2회나 있었다. 일찍 일어나는 타입이라 큰 이득은 없긴 했지만, 자취방에서 두 시간 뒹굴뒹굴하는 건 나름 꿀이었다. 할 것도 없는데 어젯밤 보다 켜놓고 잠든 넷플릭스 영화를 이어서 볼까. 중얼댄 정인이 앱을 켜기가 무섭게 연속으로 카톡이 왔다. 카톡! 카톡! 카톡! 아, 진짜 누구야. 보낼 거면 한꺼번에 다 쳐 보내던가. 심드렁하니 정인은 상단 바를 내렸다.

 

 

[김승민 : 프사 보인다~ 차단 풀었나 보네ㅎㅎ]

[김승민 : 정인아. 너 우리 집에 두고 간 거 있어.]

[김승민 : 사진]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그날 난 내 옷 다 바르게 챙겨 입고 갔는데. 뭔 말도 안 되는 이야길 하고 앉아있냐며 정인이 귀찮은 손짓으로 카톡창을 열었다. 급 나한테 미련이 생겼나. 그렇다 한들 미련도 참 유치하게 떠는구나 싶었다.

 

 

“…….”

 

 

만날 건수를 잡으려고 부러 저에게 말을 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거만함을 비웃듯 김승민이 찍어 보낸 사진을 확인하자마자 정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승민이 보낸 사진 속 저가 두고 간 팬티는 분명 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군대에 말뚝 박고 있는 친형이 팬티 몇 장에 제 이름 자수를 아주 요란하게 수놨기 때문이다. 자취하거나 애들끼리 있으면 팬티가 뒤섞이는 게 다 반수라고 제 형은 필요 없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런 거 내동 필요 없다, 필요 없다, 했지만 군바리 형은 완고했다. 밴딩 쪽에 작은 궁서체로 양정인, 빼도 박도 못하게 제 이름이 박혀 있어 제 팬티가 아니라 할 수도 없었다.

 

 

[ㅋㅋ;; 그게 왜 거기 있지;]

[김승민 : 그 날 끝나고 정리하다가 네 팬티 더러워져서 빨고 내가 가진 여분 새 팬티로 입혔거든. ㅎㅎ]

 

 

미친, 어쩐지. 손빨래할 때 내가 이런 고급팬티를 가지고 있었나 싶었다. 아오. 등신. 작게 탄식을 한 정인은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한 대 쳤다.

 

 

[가지러 갈게요ㅋㅋ; 수업 중이세요?]

[김승민 : 응ㅎㅎ 안 그래도 챙겨 왔어. 3교시 수업 있지? 2교시 끝나고 쉬는 타임에 볼까?^^]

 

 

저 웃음이 마치 제 목숨을 잡고 있는 웃음 같았다. 내가 이래도 너 나랑 안 만날래?^^같은 악마의 웃음. 이런 민망한 비밀은 승민 혼자만 알고 있는 것으로 족했다. 그래서 정인은 그 제안을 넙죽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네 ㅋㅋ 갈게요. 연희관으로 가면 되죠? 차마 ㅗ를 붙이지 못한 건 승민에게 붙잡힌 인질이 너무나도 제 치부여서 그랬다.

 

강의실에서 우르르 빠져나오는 사람들 속에서 승민이 보였다. 먼발치에서 서 있던 정인이 손을 들어 보이자 동기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그가 제 앞으로 달려왔다. 많이 기다렸어? 아뇨, 5분 전쯤 도착했어요. 혹여 저가 보이지 않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까 노심초사하며 달려왔다는 소리는 집어넣었다. 승민이 들고 있던 쇼핑백 봉투를 내밀었다. 이 형 이럴 땐 참 센스 있단 말이야. 다른 애라면 검은 봉지에 대강 집어넣어서 줬을 텐데. 번거롭게 만들어 죄송하다며 쇼핑백을 받아 들려고 했는데, 쇼핑백이 정인의 손을 피해 위로 올라갔다. 이게 도대체 뭐 하자는 시츄에이션? 슬밋 인상을 쓰자 승민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장난스레 웃어 보인다.

 

 

“장난하지 말고요, 선배.”

“와, 이젠 선배라고 부르네.”

“선배를 선배라 부르지 뭐라 불러요, 그럼.”

“형 좀 섭섭해 지려 한다. 정인아.”

“아, 얼른 주기나 하세요.”

 

 

짜증스레 말한 정인이 승민의 앞에 손을 까딱였다. 잔말 말고 빨리 달라는 뜻이다. 장난치는 거 재미없다 했는데도 고집부리듯 승민은 여전히 손 하나 꿈쩍도 하질 않았다. 그저 두 눈만 깜빡여댈 뿐이었다. 슬슬 인내심에 한계에 다다랐다. 진짜, 팬티 하나 가지고 사람 불러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차츰 얼굴이 굳어가는 저의 안색을 캐치한 승민이 제 이름을 불렀다.

 

 

“정인아.”

“왜요. 갑자기 주기가 싫어졌어요?”

“너 나랑 한 번 제대로 만나볼래?”

 

 

뻘 소리로 만날 구실을 만들더니 기어이 이 형이 미쳐버린 건가 싶었다. 뭐요? 누가 누굴 만나? 되묻는 양정인의 표정은 험악한데 김승민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롭다. 저번엔 네가 네 말만 다 쏟고 갔잖아. 형 입장도 들어 봐 줘야 하는 거 아냐? 이성적인 반론이었다. 저 형은 왜 이런 때에도 차분한 거야. 어른스러운 행동에 괜히 지는 기분이 들었다. 입술을 씰룩이며 잠시 승민과 눈싸움을 벌이듯 하던 정인이 한숨을 쉬며 승민을 흘겼다. 그럼 어디 말해보든가요, 선배 입장. 잠자코 들어주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승민은 위로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려 정인의 손에 쥐여줬다.

 

 

“답장 늦고 약속 못 잡은 건 미안해. 근데 진짜 그때는 바빴어. 너도 이 학교 들어와서 곧 알겠지만, 동기들끼리 봉사활동도 하고, 지방 농촌 봉사도 다니느라 바빠질 때가 있거든. 그럴 땐 답장할 시간도 없고, 지쳐서 자느라 뭘 할 시간도 없어. 맨날 우리 봉활 하면 뒤풀이도 하거든. 페북에 올라온 사진들도 다 뒤풀이 사진들이야. 나도 진짜 너랑 그렇게 연락 끊길 맘은 없었어. 내가 그날 너한테 그렇게 대답한 건. 그래, 솔직히 애 같지만 인정할게. 그날 피곤한 데다 술도 들어가서 조금 감정적이었고, 네가 그렇게 물어봐서 조금 기분 나빴어. 얘는 내가 그냥 자는 게 좋아서 만나는 건 줄 아나? 나는 그런 게 아닌데. 아니면 얘가 날 그런 마음으로 만나고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나더라.”

“…….”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했어. 그렇게 보내고 정신 차리자마자 바로 사과라도 한 통 보내야지 싶었는데, 취한 애들 챙기고 집 보내고 하느라 보낼 타이밍을 놓쳤어. 이미 다시 카톡 들어갔을 땐 너한테 차단당한 상태더라. 더 이상 네가 나한테 마음 없는 줄 알고 나도 그냥 포기했지. 근데 OT때 널 본 거고, 취한 너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내 집 데려가서 재우려 데리고 나온 거야. 그리고 네가 자자해서 같이 잤고. 아, 오해하면 안 돼. 형은 당연히 아직 마음 있어서 너랑 잔 거야. 그때든 전이든 난 너랑 잔 거 후회 안 해, 정인아.”

“…….”

“대답이 이 정도면 될까?”

 

 

쓸데없이 진솔한 고백이다. 저가 어렸다. 제 입장이 있으면 상대방의 입장 또한 있는 건데. 저 혼자 단정 짓고, 저 혼자 정리하고, 혼자서 끝을 맺었다. 승민의 생각 따윈 제대로 물어볼 생각 따윈 하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김승민은 치사하다.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왜 인제 와서 꺼내고 난리야. 어제는 서러움에 눈물이 났었다면 오늘은 짜증과 안도에 눈물이 났다. 형은, 그걸 왜 지금 말해요? 나 나쁜 새끼 되라고? 말은 그렇게 뱉으면서 속으로는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날 승민의 메시지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이었다. 우는 저를 가만히 쳐다보던 승민이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손을 내밀어 볼을 감쌌다. 울지 말어. 속상해하지도 말고. 반듯하게 손톱이 잘 깎여있는 그의 엄지가 연신 정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줬다.

 

 

“그날 너 돌아가고 나서 많이 생각했어. 형도 정인이 맘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해. 이제는 매일 틈만 나면 연락도 하고, 바빠도 시간 내서 카톡 할게. 공강 겹치면 우리 만나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쉬는 날엔 놀러도 가자. 예전처럼.”

 

 

형 너랑 다시 잘 해보고 싶어. 따지고 보면 승민은 변한 게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저를 보고도 반가워했고, 취한 저를 구태여 챙겨 집에 데려가기도 했고, 한없이 다정했다. 그런 승민이 다시 만나보자 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만 울어, 정인아. 너 곧 수업인데 눈 띵띵 붓겠다.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 뽑아줄까? 그거 눈에 대고 있을래? 이 와중에 제 눈이 부을까 걱정하는 이 사람을 도대체 누가 싫어할 수 있겠냐고. 그 언젠가 형이 마지막으로 서울에 올라가던 날, 부산역 플랫폼에서 잠시 껴안았던 그 날이 생각났다. 흰 입김을 폴폴 뿜으며 승민은 말했었다. 정인이 보고 싶어서 2주 또 어떻게 참지. 무드라곤 느껴지지 않는 솔직한 표현이었지만 나름 로맨틱했다. 입바른 소리일 줄 알았던 게 다 진심이었다.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를 표현할 길이 없어 정인은 그대로 승민을 껴안았다. 잠시 당황한 듯 몸을 굳히던 승민도 곧 팔을 움직여 정인의 등을 끌어안았다. 날이 춥지만 품은 따듯했다. 익숙한 품과 향수 냄새에 또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코를 크게 훌쩍인 정인이 승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회색이라 눈물 콧물 자국 다 묻을 테지만 아무런들 좋았다. 이런 분위기도 나름 로맨틱하니까. 그래서 정인은 용기 내 입을 열었다. 만나요. 우리. 질리도록 연애해요, 형. 전처럼.

 

아무래도 포기하기엔 아직 많이 좋았다. 승민의 모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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