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to 20. 말도 안 되는 일과를 이어 온 지가 벌써 2주 째였다. 한창 바쁠 때였다. 더위가 한 풀 꺾이니 춘 3월 만큼이나 빽빽하게 예약이 들어 찼다. 하루 종일 남의 머리를 지지고 볶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인이 하는 일은 보잘 것 없어 보여도, 비면 비는 대로 티가 났다. 잘린 머리카락을 쓸고 다 쓴 수건을 개고 음료수를 내오고 전화를 받고 … 어째 각 잡고 머리를 만지는 디자이너들 보다 더 바빴다. 종일 이곳 저곳에서 열심히도 불러 댔다. 어쨌든 호칭은 쌤이었으나 시키는 태도는 하인 부리듯 했다. 이엔 쌤, 여기 좀 치워 줘요. 그럼 정인은 꾸벅 꾸벅 인사 하며 군 말 없이 빗자루를 들고 왔다.
이러려고 손 끝 다 헤지도록 롯드를 말아 온 게 아닌데. 정인은 탕비실에서 아아메를 열 잔 째 내가며 생각 했다. 취직만 하면 금세 이것 저것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다 못 해 잘 나가는 디자이너 어깨 너머로 뭐라도 배울 줄 알았다. 그래서 벼르고 별러 서울 청담의 커다란 샵에 취직 한 거고, 쥐꼬리 만한 월급에도 군 말 없이 모든 노동력을 바치고 있는 거고. 그런데 어째 생각 한 거랑은 좀 달랐다. 종일 허드렛일만 하니 딱 죽을 맛이었다. 밥도 잘 못 먹고, 내내 서 있으니 다리가 퉁퉁 부었다. 하루 내도록 제일 많이 하는 말은 “ 음료는 뭐로 준비 해 드릴까요? ” 였다. 나 염색도 잘 하는데. 컷트도 실기 시험 1등으로 졸업 했는데. 그딴 것들은 다 소용이 없었다.
출 퇴근 전후로 짬짬이 마네킹을 붙들고 연습도 착실히 했다. 고졸 후에 곧장 인턴으로 들어 온 게 저 혼자인 게 마음에 걸렸다. 진즉 다른 샵에서 일을 하다 왔거나 전문대를 졸업 한 동기도 있었다. 정인은 제일 어린데다 쌩초짜였다. 미용고 1등 졸업생 타이틀은 별 힘을 못 썼다. 정인도 그걸 알기에 자꾸 감기려는 눈꺼풀을 붙들고 더 싹싹하게 굴었다.
컷트 연습을 끝내고 떨어진 머리칼을 주운 정인이 이만 앞치마를 풀렀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퇴근이었다. 탕비실 쓰레기통을 비우곤 꾸벅 꾸벅 홀에다 인사를 했다. 다들 자리를 떠 사람도 몇 없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리고는 잽싸게 샵을 빠져 나왔다.
승민과 약속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승민과 그 친구들까지. 오랜만에 멀쩡한 정신으로 보는 거였다. 사실 지금도 피곤해서 몸이 말이 아니지만, 내일은 간만에 주어진 휴일이었다. 2주가 넘는 주말 출근이 겨우 끊겼다. 예약이 세 개도 넘게 펑크 난 덕이었다. 샵 입장에서는 눈물 나겠으나 정인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오전 4시에 집을 나섰으니 승민과 제대로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 역시 대학생의 삶에 적응 하느라 바빴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시험 기간에는 거의 좀비나 다름 없이 걸어 다녔다. 그는 정인이 현관에서 신발을 꿰어 신고 있으면 반 쯤 잠 든 채로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벌써 나가? 엉망이 된 까치집에, 웬 할아버지 같은 파자마를 주워 입은 꼴이었다. 승민은 그러고서도 집을 나서려는 남자 친구를 붙잡았다. 뺨에 쪽 뽀뽀를 하고서야 겨우 출근을 허락 했다. 어우, 빨리 가서 더 자. 정인은 그러면서 승민을 밀어 냈지만 종종 그 뽀뽀 하나로 하루를 버텼다.
정인의 취직 소식에 가장 기뻐한 것은 승민이었다. 여태 시험이니 실습이니 하며 몇 번이고 승민의 머리를 조져 놓은 게 영 헛짓은 아니었다. 소식을 알리는 전화에 승민은 전공 수업을 제끼고 곧장 집으로 뛰어 왔다. 어디서 산 건지 모를 아주아주 커다란 꽃다발과 함께. 너 학교는? 놀란 눈으로 묻는 정인을 대뜸 끌어 안는 바람에 둘 사이에서 꽃다발이 짜부가 됐다.
정인이 청담의 유명 샵에 취직 했다는 것. 연예인들이 제 집 처럼 드나들고 전국의 신랑 신부가 찾아 오는 대단한 곳에, 정인이 한 자리를 꿰차게 됐다는 사실. 승민은 틈만 나면 그 얘기를 하려 들었다. 친구인 현진이 너무 많이 들어 입만 열면 녹음기 처럼 따라 할 지경이었다. 대단하고 멋진 정인이. 승민은 제 남자친구가 자랑스러워 안달이 났다. 그럴 때 마다 한 턱 내라는 말들을 흔쾌히 받아 들일 만큼. 오늘의 만남도 자랑을 들어 주다 못 한 현진이 니 남친 취업 턱을 내라는 소리에 만들어진 자리였다.
연기가 자욱한 술집 끄트머리에 승민이 보였다. 정인이 히 웃으며 테이블로 다가 갔다. 김승민! 어깨를 붙잡으니 모두가 올려다 봤다. 승민과 현진, 그리고 … 처음 보는 얼굴. 정인이 어색하게 웃자 승민이 가리키며 말 했다.
“ 동기야. 현진이랑도 친구래. ”
“ 아 … 안녕하세요. ”
밍숭맹숭한 웃음에도 뉴페이스는 살갑게 마주 인사 했다. 한지성. 승민의 대학 동기. 현진이야 전부터 다 같이 알다 같은 대학에 간 거지만, 이렇게 그의 대학 친구를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종종 동기들 얘기 하는 것만 들었지 막상 실물로 마주 보니 퍽 어색 했다. 새삼 승민이 대학생이 됐다는 게 실감 났다. 정인은 승민이 제 앞에 놔 주는 수저를 받들며 힐끔 그를 바라 봤다. 입은 옷이 좀 … 요상하다는 것만 빼면 귀여운 인상의 사람이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질 못 했더니 허기가 졌다. 정인은 맨 속에 술을 마시면 안된다며 열심히 안주를 집어 먹었다. 승민은 구워진 삼겹살을 수북하게 정인의 앞에 쌓아 놨다. 야, 나는 뭐 먹어. 현진이 입술을 삐쭉이며 투덜댔다.
“ 너 계란찜 좋아 하잖아. ”
“ 누가 고기 먹으러 와서 계란찜만 먹어. 김승민 진짜 … ”
태연한 대꾸에 말을 말자며 현진이 고개를 저었다. 지성은 승민이 열심히 주장 하는 정인이 고기를 먹어야 되는 이유를 군 말 없이 듣고 있었다. 오 그래. 와 정말. 살짝 진심이 부족한 맞장구도 함께였다.
“ 근데 너 왜 이렇게 살 빠졌어? ”
현진이 사이다를 시키곤 문득 물었다. 그러더니 밥을 퍼먹던 정인이 손목을 잡아 채 탈탈 흔들었다. 뼈 밖에 없네. 김승민이 니 밥 다 뺏어먹냐. 퍽 걱정 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 말에 승민이 어디 보자며 정인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 … 그러게. ”
승민이 양 볼 가득 빵빵히 고기를 씹어 먹는 중인 남자 친구를 보며 말 했다. 확실히 하루 종일 바쁘게 일 하다 보면 밥 먹을 시간이 없긴 했다. 일찍 부터 예약이 몰려 있는 터라 그걸 다 상대 하고 나면 금세 점심이었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점심 시간이 주어 지는 것도 아니라 대충 탕비실에서 삼각 김밥이나 과자 나부랭이로 떼우는 게 전부였다. 퇴근 후엔 피곤해서 밥 보다는 잠이 우선이었다. 출근 한 지도 벌써 석 달이 넘어 가고 있으니 한창 살이 내릴 참이었다.
“ 진짜 살 빠졌네. ”
별 일 아니라며 허허 웃던 정인이 움찔 했다. 승민의 손이 쑥 내려와 허벅지를 쥔 탓이었다. 이 사람이 미쳤나. 짐짓 굳은 얼굴로 째려 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고 쪼물쪼물 허벅지를 만지며 제가 더 심각한 표정을 했다. 정인은 행여나 남자 친구의 변태 같은 행태를 누군가 볼까 싶어 다리를 바짝 오므렸다.
“ 승민이가 진짜 자랑 많이 하던데. 엄청 좋은 샵 다닌다고 … ”
새로 나온 갈비를 굽던 지성이 문득 말 했다. 정인이 여즉 제 허벅지를 쥔 승민의 손을 찰싹 때리며 하하 웃었다.
“ 나는 그냥 … 아직 신입인데. ”
“ 트와이스도 여기 다닌대. 그치 정인아. ”
철 모르고 걸그룹 소리나 하는 남자친구의 주둥이를 꼬집어 주고 싶었으나 정인은 웃기만 했다. 제가 하루 종일 허드렛일이나 하는 걸 알면 아주 기절을 할 터였다. 승민의 머릿 속에 정인은 거의 전국구 헤어 디자이너나 다름 없었다. 아직 월급도 적고, 그 만큼 대단하지 않대도 홀로 환상 속에 살았다. 몇 번이고 샵으로 쫓아 온다는 걸 겨우 겨우 막았다. 아주 축 취직 화환을 보낼 기세였다. 정인은 굳이 그의 뿌듯함을 꺾어 버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냥 두기로 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현진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 나 머리 하러 가면 꽁짜로 해 주나? 지인 찬스. ”
“ … 그건 안 돼. ”
단호한 대답에 현진이 삐진 척을 했다. 지성이 양심도 없다며 거기다 불을 지폈다. 정인은 둘이 투닥대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제 앞으로 밀려 드는 고기를 열심히 집어 먹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라 그런지, 셋이 열심히 뭐라 떠들든 그저 웃음만 나왔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제법 알딸딸 했다. 스텝이 엉망으로 꼬였다. 역 앞에서 헤어져 현진은 집으로, 지성은 기숙사로 향했다. 승민은 술도 깰 겸 집까지 걸어가자며 혼자 게처럼 걷는 정인을 부축 했다.
매달리다시피 해 집으로 향하는 와중에 야무지게 내일 먹을 식빵까지 샀다. 찬 바람을 맞으며 왔더니 정말 정신이 좀 돌아 오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엘레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 걸음은 열심히 비틀거렸지만. 정인이 겉옷을 벗고 소파에 누웠다. 일사천리라 말릴 틈도 없었다.
“ 씻어야지. 정인아. ”
승민이 금세 잠 들려는 정인의 양 볼을 쥐어 땡기며 말 했다. 정인이 겨우 눈을 떴다. 잠이 쏟아졌다. 안 그래도 이 시간만 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졸렸는데, 술까지 마셔서 그런지 더더욱 피곤했다. 내일 출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긴장이 다 풀렸다. 잘래 … 웅얼댔더니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 했다.
“ 나 잘래 … ”
승민은 아랑곳 않고 지난 밤 세탁 해 놓은 잠옷까지 가져 와 야무지게 갈아 입혔다. 그러고 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꾸벅꾸벅 졸았다. 승민이 앉아서 자다시피 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 봤다. 아까 현진이 말 한 대로, 정말 살이 제법 내린 듯 했다. 안 그래도 홀쭉한 얼굴이 부쩍 말랐다. 가만가만 쥔 뺨을 쓸어 보던 승민이 나지막히 이름을 불렀다. 정인아. 그러자 겨우 실눈을 떴다.
“ 많이 피곤해? ”
새벽 같이 나가는 정인을 붙잡고 물으면 별 말이 없었다. 그냥 씩 웃으며 다녀 온다는 인사만 남기고는 쌩 출근 해 버렸다. 눈 뜨기도 힘든 이른 시간에 직장으로 걸음 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힘든 게 당연할 텐데, 정인은 신기할 만큼 티를 안 냈다. 어쩌다 주말에 밥상에 마주 앉으면 숟갈을 뜨다가도 깜빡 졸면서 그랬다. 피곤하냐는 말에 정인은 또 고개를 저었다. 느리게 가로 저어진 머리통을 승민에게 기대곤 웅얼댔다.
“ 그냥 졸려 … ”
승민이 고요히 제게 기댄 남자 친구를 조심스레 바로 앉혔다. 졸음에 고꾸라지려는 몸을 세우고 어깨를 쥐었다. 안마 해 줄게. 정인이 간지럽다며 힘 없이 웃었다.
“ 가만히 있어 봐. ”
“ 뭔 … 안마야. ”
“ 이러면 덜 피곤해. ”
나 안마 짱 잘해. 승민이 마른 손으로 정인의 어깨를 조물조물 주물렀다. 정인이 잔뜩 뭉친 곳을 꾹꾹 누를 때 마다 몸을 움츠렸다. 아파아. 앓는 소리를 하다가도 시원하다며 아저씨처럼 굴었다. 승민은 말 없이 열심히도 주물러댔다. 정인의 목덜미가 빨개졌다.
“ 좀 어때? ”
한참을 안마에만 집중 하던 승민이 갑자기 귓가에 대고 물어 오는 탓에 정인이 화들짝 놀랐다. 시원함에 젖히고 있던 고개를 바로 했다. 대답이 없자 승민이 뺨에 쪽 입술을 찍었다. 어떠냐니까. 반응을 기대 하는 눈에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 영 … ”
“ 영? ”
“ 영 … 별론데. ”
미적지근한 대답에 돌아 오는 건 승민의 숨 막히는 포옹이었다. 정인이 그 품에 꼭 갇힌 채 크게 웃었다. 안마 보다는 이 쪽이 더 피로 회복에 효과가 좋았다.
정인이 나가는 소리에 깨지 않은 게 참 오랜만이었다. 승민이 제 코 앞에서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남자 친구를 보며 느리게 눈을 꿈뻑였다. 주말 오전. 간만에 주어진 정인의 휴일. 새벽 네시에 부리나케 집을 나서지 않아도 되는 날. 거기까지 로딩이 끝나니 잠이 확 깼다.
승민이 열심히 손 꼽던 날이었다. 미뤄 놨던 데이트를 열심히 하리라 다짐 하고 또 다짐 했다. 정인이 출근 하는 날은 아무래도 그게 힘들었다. 기껏 해야 승민이 열심히 조른 끝에 심야 영화나 보는 게 전부였다. 물론 그 마저도 백 퍼센트 확률로 정인은 중간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 했지만.
“ … ”
그래서 분명 오늘은 아침부터 밤까지 실컷 데리고 놀겠다 다짐 했건만. 승민이 손을 뻗어 이마를 덮은 정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줬다. 곤히 잠든 얼굴을 보니 그런 마음이 쏙 들어갔다. 긴장이 풀렸는 지 정신 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혹시나 싶어 귓가에 정인아, 하고 작게 불러 봐도 소용이 없었다. 정인은 미동도 없이 잠든 채였다.
승민은 하염 없이 그 얼굴을 바라 봤다. 정인이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깰까 싶어 숨까지 다 참았다. 간만의 휴일에 들떠버린 애인은 아랑곳 않고 깊은 잠에 빠진 정인은 도무지 깰 기미가 없어 보였다.
결국 황금 같은 휴일은 정인의 피로를 푸는 것으로 거의 하루를 다 보냈다. 저녁이 다 될 때 쯤에야 느지막히 일어난 정인이 시계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다섯시? 지금 아침 다섯시지? PM 5:00를 뻔히 보고도 그렇게 물었다.
비록 남자 친구의 휴일에도 홀로 점심을 차려 먹은 승민은 조금 쓸쓸 했지만, 일어난 정인의 낯이 반짝거려 이내 아쉬움을 싹 지워버렸다. 정인이 오래 자서 분홍빛이 된 얼굴로 승민의 곁에 찰싹 붙어 앉았다. 승민이 TV 볼륨을 조금 낮췄다.
“ 배 고프다 … ”
끼니도 거르고 내리 잠만 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뭐 먹을까? 승민이 까치집이 된 정인의 뒷통수를 슥슥 쓰다듬었다.
“ 먹고 싶은 거 있어? ”
승민의 물음에도 답은 않고 빤히 바라 보기만 했다. 왜? 승민이 입모양으로 묻자 정인은 그제야 히 웃었다. 간만에 귀엽게 구는 탓에 승민은 속이 다 말랑거렸다.
“ 2인분 배달 되는 걸로 시켜. 나 없으면 못 먹는다며. ”
정인이 승민에게서 받은 카톡을 떠올리며 말 했다. 종종 저녁 먹을 때마다 상황 보고 하듯 연락을 하는데, 가게에서 1인분 배달을 안 해 주는 걸 엄청 서러워 했다. 너 있으면 두 개 시키는 건데 ㅠㅠ. 투정 하는 메세지는 그냥 보고 치우곤 했지만, 한편으로는 은근 신경이 쓰였다.
“ 어 … 찌개는 별로? ”
“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
내가 다 사줄게. 덧 붙인 말에 승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하고 묻는 표정이었다. 식비가 포함 된 생활비는 항상 일정 했다. 승민은 집-서울에 본가가 있는데도 굳이 정인과 자취 하겠다며 떼를 써 뛰쳐 나온 그 곳-에서 꼬박꼬박 받아다 쓰는 용돈의 일부를, 정인은 월급의 일부를 떼다가 공동 생활비로 썼다. 당연히 외식도 거기서 지출이었다. 직접 돈을 벌어 쓰고 난 뒤로 정인은 근검절약을 위해 애 쓰고 있었다. 영수증도 열심히 모으고 포인트도 꼬박꼬박 챙겼다. 의외라는 듯 한 승민의 반응에 정인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 돈 버는 사람이 사주려고. ”
방금 좀 멋있었지. 정인이 한껏 고개를 치켜 들고 승민을 바라 봤다. 아쉽게도 마주치는 눈에는 존경심보다는 당장에라도 깨물어 주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해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정인이 처음으로 머리를 잘라 줬던 날을 기억 한다. 간절히 부탁 했다. 시험이 코 앞인데 사람 머리에 한 번만 해보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승민은 과감히 학원을 제끼고 정인을 따라 나섰다.
이제 머리 할 일 있으면 나한테 말 해.
정인이 열심히 치운 실기실 구석에다 승민을 앉혀 놓고 말 했다. 목에는 엉성하게나마 천까지 묶어 줬다. 승민은 꼼짝 않고 앉은 채 왜? 하고 물었다. 허공에 가위질을 해보이던 정인이 씩 웃으며 대답 했다.
내가 잘라 줄게.
… 계속?
승민이 조심스러운 빗질에 눈을 감고 물었다. 마침 앞머리가 조금 길어 눈을 찌르려던 참이긴 했다. 정인이 분무기를 쥔 채 제가 시킨 대로 얌전히 있는 승민을 바라 봤다. 졸업 사진 찍는 날 한 시간이나 머리를 만지던 사람이 어쩌자고 뭣도 없는 제게 모든 걸 맡긴 지는 몰라도, 이러고 있는 승민이 귀여워 보이긴 했다. 말 잘 듣고 착한 남자 친구. 이 정도면 오래 오래 공짜로 머리 해 줄 마음이 생겼다.
당연하지.
정인이 느리게 답 하며 다시 가위를 들었다. 승민의 머리칼이 조금씩 잘려 나가기 시작 했다.
감은 눈 위로 살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 바짝 다가온 정인에게서 풍기는 알싸한 약품 냄새. 머리칼을 조심스레 매만지는 손가락. 모든 것이 신기할 정도로 생생히 느껴졌다. 승민은 이 고요한 공기가 좋았다. 허접하기 짝이 없는 실습실에서, 잔뜩 긴장 한 채 컷트 연습을 하는 남자 친구. 하염 없이 좋기만 했다.
그 때 정인의 컷트에 점수를 매기자면, 후하게 60점 정도. 다음 날 등교 한 승민이 몇 번이나 머리 어디서 했냐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물론 물어 본 이유는 “거기는 거르려고” 였다. 생각보다 짧게 잘렸다. 눈썹이 거의 다 보일 정도였다. 컷트 직후에 정인은 울기 직전의 얼굴로 안절부절 했다. 마네킹 대가리만 자르다 직접 잘랐더니 너무 긴장 했다는 게 이유였다.
… 괜찮은데.
승민이 거울에 앞 뒤 옆을 비춰보며 겨우 말 했다. 좀 많이 … 짧긴 해도 전체적인 모양새는 괜찮았다. 물론 돈 내고 전문가에게 맡긴 머리였으면 환불 요청을 고민 해 볼만 하나, 이건 어디까지나 정인의 솜씨였다. 행여나 맘에 안 드는 티를 냈다가 코앞이라는 실기 시험을 망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쯤이야 다시 기르면 되지만, 망친 시험은 다시 칠 수 없었다. 승민이 최대한 활짝 웃으며 말 했다. 너 진짜 계속 내 머리 잘라 주는 거다.
그래도 진짜 머리를 잘라 본 보람이 있는지, 정인은 그 시험을 높은 점수로 통과 했다. 기장 조절에 문제가 있던 거지 스킬 자체는 능숙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승민은 그새 집 앞에 나갈 때 모자를 쓰는 버릇이 생겼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 때의 약속은 계속해서 착실히 지켜 지는 중이었다. 승민은 그 후로도 몇 번이고 기꺼이 정인에게 머리칼을 몽땅 내줬다. 염색 연습도 하고, 펌 연습도 했다. 하필 시기가 딱 겹치는 탓에 새내기 배움터에 불 타는 새빨간 머리로 참석 하기도 했다. 그 덕에 몇 번이고 “빨간 머리”앞으로 밀려 드는 술잔을 받아야만 했지만 정인은 까맣게 모르는 일이었다.
승민이 부쩍 길어버린 앞머리를 넘겼다. 눈을 찌를락 말락 해서 불편 했다. 시험 기간이라 그런지 별 게 다 신경 쓰였다. 정인이 잘라 준 지도 한 달쯤 된 것 같았다. 바쁜 탓에 머리 얘기는 꺼낼 틈도 없었다. 하루 종일 샵에서 남의 머리를 붙들고 있는데 집에서까지 해 달라는 건 좀 염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정인은 부쩍 바빠 보였으니까. 유명 샵에 첫 취업을 했다는 기쁨도 잠시, 일이 많이 고된 듯 했다. 평생 아르바이트라곤 수능 직후 사촌 동생 수학 과외가 전부인 승민은 가늠 하기도 힘든 노동이었다. 엄마가 사다 준 소꼬리 곰탕을 솥 째로 퍼다 먹여도 기를 못 썼다. 힘드냐고 물으면 언제나 그렇듯 고개를 젓고 말았지만 까칠한 낯은 숨겨지질 않았다. 단연코 신경 쓰일 수 밖에 없었다.
“ 야. ”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에 승민이 고개를 들었다. 현진이 무거워 보이는 백팩을 끌어 안고 옆에 앉았다. 벼락치기를 한다며 이제껏 미뤄 뒀던 걸 전부 가져 온 거였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 열람실에 빈 자리가 없었다. 현진이 아메리카노를 소리 나지 않게 마시느라 노력 중이었다. 승민이 노트 끝에 글을 써 내밀었다.
한지성은?
분명 같이 온다고 했는데 어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셋이 함께 열람실에서 밤을 새기로 했는데 하나라도 빠지면 김이 샜다. 현진이 빨대를 문 채로 그 밑에 답을 썼다.
이번 학기 버린대.
승민은 대꾸 않고 다시 노트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숙이니 넘겼던 머리칼이 또 내려왔다. 대충 넘기고 펜을 쥐는데 다시 슬슬 이마를 간지럽혔다. 집중 하려 들면 그러고, 또 괜찮나 싶으면 눈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승민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나처럼 해. ”
그러고 있는 걸 가만 보던 현진이 제 머리를 가리켰다. 아주 길러버린 머리칼을 귀에 꽂은 모양새였다. 현진의 헤어 스타일은 거의 단발과 비슷해 지고 있었다.
“ … ”
펜을 입가에 대고 고민 하던 승민이 문득 뭔가 생각 해 냈다. 핸드폰을 열었더니 6시가 막 넘어 가고 있었다. 정인은 8시에 퇴근 했다. 당장 샵으로 향하면 충분 한 시간이었다. 승민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대충 가방에 쑤셔 넣었다.
“ 어디 가? ”
책을 펼쳐만 놓고 핸드폰만 만지던 현진이 일어 서는 승민을 올려다 보며 입모양으로 물었다. 승민이 가방을 고쳐 메며 대답 했다. 정인이 보러.
*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꿈 같은 휴일이 끝나고 나니 더 정신이 없었다. 같이 입사 했던 동기들이 둘이나 그만 뒀다. 사람을 뽑으려면 시간이 걸리는 탓에 빵꾸를 메우는 건 죄다 정인의 몫이었다. 한 끼도 못 먹고 뛰어 다니다시피 했다. 뭔 놈의 중요한 일들이 그리 많은지, 예약이 끝도 없었다. 정인은 제 월급의 반을 염색과 펌에다 쏟아 붓는 손님들에게 쉼 없이 다과를 갖다 받치고 잡지를 대령 했다.
“ 이엔 쌤. ”
쌤. 뭐해요? 멍하니 서있던 정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승민이 지어 준 닉네임이었다. 본명을 쓰려니 다들 하나씩 귀여운 이름을 갖고 있는 게 좀 신경 쓰였다. 곧장 승민에게 전했더니 그는 긴 고민 끝에 아이엔이라는 이름을 내놨다. 네이밍에 다 이유가 있었다. 너 양정, 인이니까. 완벽하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열성을 다 해 지어 준 거니까. 정인은 줄곧 가슴팍에 아이엔 석자가 새겨진 명찰을 달고 다녔다.
“ 연우 쌤이 부르세요. 빨리 가 봐요. ”
탕비실에서 얼음을 꺼내던 정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연우는 정인이 입사와 동시에 어시로 배정 받은 디자이너였다. 무뚝뚝한 사람이라 여즉 말 섞기가 힘들었다. 여태 따로 지시를 받은 적이 없기에 괜히 긴장이 됐다. 정인이 펌 중화 중인 손님에게 리필 한 다과를 낸 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아, 제가요? ”
연우가 라텍스 장갑을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인은 선뜻 대답 하지 못 하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쌤이 한 번 해 봐요. 그러면서 샴푸실을 턱짓 했다.
“ 1등으로 졸업 했다며. 그래서 뽑은 건데. ”
“ 아, 그거는 컷트 … ”
“ 지금 쌤한테 컷트 맡겼다가 샷다 내릴 일 있어요? ”
정인은 뭐라 덧붙이려던 말을 삼켰다. 연우가 샴푸를 맡겼다. 정인은 좀 더 허드렛일을 한 뒤에야 맡을 수 있는 일이었다. 마감을 한 시간쯤 남긴 지금, 연우가 손을 다쳤다. 심한 건 아니라 응급 처치를 했지만 속도가 느려졌다. 안 그래도 사람이 빈 상황이라 큰일이었다. 남의 스태프를 맘대로 찍어다 붙을 수도 없으니, 급한 대로 정인에게 시키는 거였다. 머리 감기고 말리는 일이 뭐 그리 어렵겠냐 싶어도 이게 다 요령이 있었다. 물론 정인은 고등학교 내내 학교와 학원에서 샴푸를 배웠으나 실전은 또 처음이었다. 생각지도 못 한 일이라 손 끝이 싸늘해졌다. 긴장 돼서 식은땀이 다 날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김승민 머리 좀 감겨 볼 걸. 정인이 속으로 울며 손님의 손을 붙잡았다.
“ 샴푸 … 하실게요. ”
하필이면 또 어린 손님이었다. 유치원생이나 됐을까 말까. 엄마를 따라 왔다가 강제로 펌을 당한 건지 표정이 영 부루퉁했다. 아이들은 모발이 약해 컬이 나오기 까지 유달리 오랜 시간이 걸려 보통 컨디션이 좋질 못 했다. 정인이 앞치마에 넣어 놨던 카라멜까지 꺼내며 겨우 샴푸실로 유인 했다.
“ 샴푸 해 드리겠습니다. ”
작은 손님을 겨우 앉히고 물이 튀지 않도록 얼굴에다 타올을 덮었다. 심호흡을 열심히 했다. 옆에서 샴푸 중인 한 기수 위의 스탭이 힐끔 쳐다 보는 게 느껴졌다. 쟤가 왜 샴푸실에. 딱 그 표정이었다. 정인은 샴푸와 트리트먼트 앞에서 혼자 몰래 아자아자 화이팅을 외쳤다. 할 수 있다. 긴장 하지 말자. 그냥 … 애기 머리 감겨 주는 건데, 뭐. 이 쯤이야. 그렇게 생각 하며 떨리는 손으로 샤워기를 붙잡고 물을 틀었다. 쨍한 울음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동시였다. 수도 꼭지가 온수 쪽으로 있는 힘껏 틀어져 있었다.
정인의 직장까지는 지하철로 20분 쯤 걸렸다. 종종 다니던 동네지만 이렇게 헤어샵이 즐비 한 줄은 모르고 있었다. 승민이 고개를 처들고 비슷비슷한 느낌의 건물들을 지나쳤다. 하나 같이 세련된 외관의 헤어샵들이 줄줄이 깔려 있었다.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차량도 몇 대 지나갔다. 새삼 정인이 얼마나 화려한 곳에서 일 하는 지가 실감 났다.
양 손에 들린 것들이 제법 묵직 했다. 한참을 고민 끝에 간식을 좀 샀다.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잘 몰라서, 되는 대로 샀더니 양이 많았다. 스태프들이 전부 나눠 먹으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았다. 쿠키랑 조각 케이크 같은 것들. 부러 예쁘게 포장 해 주는 베이커리를 찾아 갔다. 손 바닥 만한 것들이 어찌나 비싼지, 덕분에 이번 주 용돈의 팔 할을 다 탕진 했다. 일종의 뇌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정인이 좀 예쁘게 봐 달라는 표시.
일 하는 정인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몇 번이고 퇴근 하는 정인을 데리러 가려고 했지만 극구 말리는 탓에 가 본 적도 없었다. 그게 못내 아쉬웠는데 오늘에서야 한을 풀 예정이었다. 깔끔한 셔츠를 차려 입고 양 손에 빗과 가위를 든 정인. 그는 집중 할 때 큰 눈을 더 부릅 떴다. 승민이 좋아 하는 표정 중에 하나였다.
정인의 샵은 단연 눈에 띄었다. 커다란 간판에 멋들어진 필기체가 반짝였다. 몇 번이고 카카오 지도를 다시 확인 한 승민이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마감이 다 된 시간이라 그런지 생각만큼 복작거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닥에 널린 머리카락을 분주히 치우는 스태프들을 보니 얼마나 바빴는지 얼추 짐작이 됐다. 정인을 불러 달라 하려는데 마침 카운터도 비어 있었다. 그 앞에 얌전히 서서 기다리려던 승민이 안 쪽에서 나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샴푸실에서 웬 꼬맹이가 머리에 물을 뚝뚝 흘리며 뛰어 나왔다. 쪼끄만게 얼마나 크게 우는 지 샵이 다 울릴 정도였다. 꼬맹이가 옆 쪽에서 롤을 말고 있던 아빠-로 추청 되는 사람-에게 덥썩 안겼다. 거기까지 보고 다시 시선을 돌리려던 승민이 그대로 정지 했다.
정인이었다. 집까지 가져 와 자랑 하던, 샵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앞치마를 한 양정인. 꼬맹이를 곧장 뒤쫓아 샴푸실에서 나온 그가 고개를 꾸벅 꾸벅 숙였다.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손이 새빨갰다.
스태프 몇 명이 모여 들었다. 정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입 밖으로 하는 말은 들리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분명 그렇게 말 하고 있었다. 뒷쪽에 서 있던 여자가 나왔다. 정인이 몇 번 말 했던 사수인 듯 했다. 그가 손님에게 사과 하는 동시에 정인을 바라 봤다. 두 눈이 싸늘했다. 다른 스태프가 서둘러 꼬마 손님을 데리고 먼 자리로 이동 했다.
“ 예약 하고 오셨어요? ”
승민이 제 뒤에서 들리는 말에 돌아 봤다. 어느새 카운터로 나온 직원이 묻고 있었다. 승민은 대답 하지 못 한 채 눈만 깜빡였다. 등 뒤에서 제법 큰 소리가 났다. 정인이 혼 나고 있었다.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다니냐는 힐난이었다. 대꾸는 없었다.
“ 손님? ”
아무런 답이 없는 그에게 카운터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승민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예요.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엉망으로 튀었다. 승민은 서둘러 샵을 빠져 나왔다. 손바닥을 파고 드는 쇼핑백이 너무 무거웠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시간이었다. 9시가 조금 덜 된 저녁. 정인이 도어락을 열고 들어 오는 소리가 났다. 소파에 파묻혀 책을 뒤적이던 승민이 일어 났다.
“ 공부 하고 있었어? ”
바람 냄새를 잔뜩 묻히고 온 정인이 현관에 서 있었다. 꼬질한 스니커즈를 대충 벗어 내며 물었다. 승민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고 뭐고,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속이 상했다. 된통 깨지는 남자 친구를 직접 목격 하는 건 생각보다도 훨씬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심장이 바닥까지 다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주말 마다 피곤해서 꾸벅 꾸벅 조는 정인이 생각 나서 더 그랬다. 왜 그렇게 샵에 찾아 오지 말라고 했는지, 오늘은 뭘 했냐 물으면 대꾸 없이 씩 웃기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게다가 정인은 그런 걸 티내는 타입도 아니었다. 하염 없이 속으로만 눌러 삼킬 게 분명 했다. 그 누구에게도, 하물며 승민에게도 말 하지 않고 늘 그렇듯 꾹꾹. 명치께가 얹힌 듯 답답했다. 어떻게 해 줄 수도 없는 일이라 그저 한숨만 나왔다.
“ 자. ”
정인이 멍하니 서 있는 승민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 뭐야? 받아 들어 열어 보니 아이스크림이었다.
“ 아이스크림? ”
외투를 벗은 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고개를 들며 히 웃는데, 누가 봐도 실컷 울어 제낀 얼굴이었다. 눈은 시뻘건데다 퉁퉁 붓고, 얼굴이 다 허옇게 질려서는. 승민은 차마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눈치도 없이 입꼬리가 자꾸만 굳어졌다.
“ 민트 초코로 다 채웠다. ”
짱 맛있음. 정인이 승민의 손에 들린 걸 뺏어다 상 앞에 앉았다. 이제 붕어빵 팔겠더라, 짱 추워. 너 안 추워 반팔 티? 정인이 열심히 조잘대며 숟가락을 들었다. 승민은 말 없이 옆에 앉아 그걸 쳐다만 봤다.
“ 오늘 지하철 사람 역대급. 나 한 번도 못 앉았어. ”
“ … 웬 아이스크림? ”
승민이 제 손에 숟가락을 들려 주는 정인을 보며 물었다. 정인이 말 없이 아이스크림을 한 숟가락 펐다. 곧장 제 입으로 넣는가 싶더니 냅다 그걸 불쑥 들이밀며 말 했다. 승민이 빨간 눈을 한 정인을 가만히 쳐다만 봤다.
“ 아 해. ”
“ … ”
“ 아. ”
영문 모를 귀여운 짓에 승민은 일단 아이스크림을 받아 먹었다. 싸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정인이 그걸 보다 작게 웃었다.
“ 기념이야. ”
“ 기념? ”
승민이 머릿 속으로 온갖 기념일들을 다 떠올려 봤다. 그런 승민을 눈치 챈 정인이 그런 거 아니고, 하며 다시 입을 뗐다.
“ 나 이제 샴푸 하는 거 기념. ”
“ … 샴푸? ”
“ 어. 나 오늘 샴푸 했거든. ”
약간 진급 같은 거지. 정인은 그제야 제 몫의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손가락 끝이 여즉 빨갰다. 밴드도 덕지덕지, 자잘한 상처가 끊일 날이 없는 손. 승민이 가만히 아이스크림을 먹는 정인을 바라 봤다. 줄곧 나지막하게 들끓던 속상함은 끊어질 기미가 없었다.
“ … 정인아. ”
웅? 입에 숟가락을 물고 고개를 들던 정인이 그대로 바짝 굳었다. 승민이 갑작스레 크게 팔을 벌려 끌어 안은 탓이었다. 왜 이래? 당황해 물어도 답이 없었다. 하염 없이 끌어 안고만 있었다. 숨 막힌다며 밀어 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야아 … ”
뭔 일이라도 있나 싶어 조심스레 불렀더니 그제야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뺨에 입술을 찍었다. 턱 끝과 목덜미에도 몇 번이고 짧게 붙었다 떨어졌다. 정인이 살짝 몸을 비틀었다. 얼핏 드러난 승민의 낯이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뽀뽀를 퍼붓던 승민이 다시 정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정인아.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정인은 여전히 반쯤 굳은 채로 대답 했다. 승민에게 안긴 부분이 유달리 따끈따끈 했다.
“ 나는 … ”
“ … ”
승민이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 나는 뭐? 기다리다 못 한 정인이 되물어도 답이 없었다. 끌어 안은 팔에 더 힘을 주기만 했다. 정인은 아주 갇혀 버린 양 가만히 안겨 있었다. 오래도록 가만히 있던 승민이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했다. 느릿하게 입을 떼는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 뺨 위로 가득 쏟아져 내렸다.
“ 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
…. 정인은 아무 말 없이 승민을 바라 봤다. 몰래 큰 숨을 들이 쉬느라 가슴이 막 부풀었다. 유달리 피곤 했던 하루 끝에 마주 하는 다정함에는 면역이 없었다. 승민의 말이 어딘가를 쿡 찔렀다. 굳은 살이 박히지 못 해 연한 곳이었다. 속이 막 요동쳤다. 단단히 쌓아 왔던 틈을 비집고 뭔가가 터져 나오려 했다. 입술을 꾹 깨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급히 얼굴을 가려 봐도 이미 늦은 뒤였다.
정인이 다시금 저를 꼭 끌어 안는 승민의 온기를 느꼈다. 보여 주지 않으려 푹 숙인 낯으로 부드러운 손이 파고 들었다. 정인은 고개를 들고 승민이 제 뺨을 훔치도록 놔뒀다. 울지 말라는 목소리가 하염 없이 다정했다.
쪽팔렸다. 귀가 뜨겁게 달아 올랐다. 승민에게는 아무 일 없는 것 마냥 열심히 일 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엉엉 울어 버리면 투정이나 하는 것 같았다. 새벽같이 일어나 밤에 들어 오면서도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 무던 애를 쓰던 게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 갔다. 완벽한 남자 친구가 되는 건 실패였다. 그것도 대 실패. 승민은 항상 이렇게 정인을 무장 해제로 만들었다.
눈물로 어룽진 시야로 다정한 낯이 보였다. 정인이 가까이 다가 온 승민의 뺨을 단단히 붙잡았다. 왜 나를 울려. 쏘아 붙이고 싶은 걸 꾹 참고 무작정 입술을 갖다댔다.
키스에서 짠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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