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연애

2019. 11. 3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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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란 건 항상 쌍방일 수는 없는걸까. 천명이 짝사랑이라면 그 사랑에 운명이란 이름을 붙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양감 없이 새겨진 이름을 손으로 더듬었다. 양정인. 몹시도 똑바른 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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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새겨진다는 건 평생의 사랑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외피에 새겨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였다. 90년대 초 어느 여름의 신문 기사를 통해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내시경을 하던 사람의 식도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모두의 몸에는 이름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이름을 아는 것은 아니였다.

 

태어날 때부터 팔뚝 안쪽에 그 이름이 있었다.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서로 이어진 단 하나의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안다는 것은 꽤 행운이었다. 적어도 후에 내 몸 어딘가의 이름을 알고 그 사랑을 찾아 떠나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나는 마냥 양정인을 귀여운 여자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는 긴 생머리에, 키는 160 언저리, 그리고 공부를 잘할 것 같아.

 

그리고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어서야 만난 양정인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예민하고 귀여운 남자애. 송곳니 하나가 삐죽 나와 있었다. 저 뾰족한 송곳니 끝에 혀가 닿으면 어떤 느낌일까. 그건 아마, 저 애만 아는 거겠지. 아니면, 그 애의 여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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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머지 않아, 내 혀가 그 애의 송곳니에 닿게 되었다. 하복을 입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나는 그냥 양정인에게 대뜸 다가가 내 팔뚝 안쪽에 새겨진 그 애의 이름을 보여 줬다. 동성애가 사회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였으나, 네임이 새겨진 경우에 한하여 동성혼이 가능했다. 열림교회 닫힘. 동성혼 금지지만 동성혼 허용. 양정인은 그걸 보더니 그랬다.

 

 

그 양정인이 나인지 어떻게 알아요?

 

 

하지만 난 살면서 양정인이란 이름은 너밖에 못 봤는데. 왜인지 너일 것 같은데. 열아홉 짧은 인생에 유일한 양정인은 걔였으니까. 아무리 무작정 찾아가 네임을 보여준 무대포라도, 그런 단순무식한 대답으로 우리가 운명이라고 내놓기는 힘든 노릇이였다. 양정인은 그런 나를 보고 개구쟁이처럼 입꼬리를 찢어 웃었다.

 

 

뽀뽀해 보면 알 수 있을까요?

응?

 

 

바보 같은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얘 왜 이렇게 저돌적이야? 조금 머뭇거리자 양정인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전 운명 같은 건 안 믿거든요. 제 몸엔 이름이 없어서요. 근데 키스했을 때 스파크라도 튀면 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입술이 맞닿고 입이 벌어지자마자 내가 한 것은, 뭉툭한 혀를 바로 세워 그 애의 송곳니를 쓸어보는 것이었다. 이게 양정인이구나. 스파크 따위는 튀지 않았다. 오히려 미적지근한 키스였던 것 같다. 김정인이라는 여자애와 첫 연애를 하면서 했던 첫키스보다도 감흥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양정인은 제가 아닌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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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치고는 대담한 일이었다. 운명인지 확인하기 위해 입술을 포개는 것. 나는 첫키스가 아니였지만, 양정인은 그게 첫키스였다고 했다.

 

 

너도 참 보통은 아니다.

왜요? 운명이랑 첫키스할 기회일 수도 있었잖아요.

운명은 안 믿는다며.

그 순간을 믿은 거죠.

 

 

교실에서 입을 맞췄다 떨어지자마자 했던 생각이 그거였다. 우린 운명은 아니구나. '진짜 네임을 알아 보는 일곱 가지 방법.'이라는 기사에서는 내 진정한 운명과 키스하면 달콤한 맛이 나고, 귀에 종소리가 들리고... 그런 오감을  통해 확신을 얻게 된다고 했다. 나는 양정인 입에서 달콤한 맛을 찾으려고 한참동안 혀를 움직였으나, 급식시간이 끝난 뒤라 치약의 민트맛밖엔 나질 않았다.

 

황당하지만, 우린 그 뒤로 괜찮은 친구 사이가 됐다. 사실 더럽게 안 맞는 친구 사이였다. 마치 운명이 아니라고 반증이라도 하듯, 양정인은 만화카페로 나는 피씨방으로, 양정인은 버거킹으로 나는 맥도날드로, 양정인은 신전으로 나는 엽떡으로. 그렇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양정인은 여자친구가 두 번 바뀌었다. 나는 이제 정인이란 이름에게서 멀어지고자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정인이란 이름을 눈으로 쫓았다. 그러나 그 정인들은 '양'씨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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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기준, 우리나라에서 24번째로 많은 성씨랬다. 김씨인 내가 할 말은 아닌 것도 같지만 흔하다면 흔한 성씨다. 양희은, 양귀자, 양동근, 양세종, 양세찬. 근데 왜 양정인은 걔밖에 없냐고? 19세의 청춘은 너무 뜨거워서, 운명이 아니란 걸 수긍한 뒤로도 쉽사리 마음을 식힐 순 없었다. 운명이 아니라도 한번쯤 만나 볼 수는 있는 거였다. 하지만 양정인은 첫키스가 무색하게 여자 친구를 만들었다. 하복을 벗기도 전이었다. 그 여자애 이름은 김다민이였다.

 

다민, 승민. 다민, 승민. 비슷하다면 비슷한 이름 아닌가? 김다민은 양정인과 동갑인 여자애였는데, 동그란 얼굴에 쌍커풀 없이 큰 눈이 척 보기에 귀염상이었다. 양정인이 그 애를 엄청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 애는 양정인을 엄청 좋아했다. 그 둘은 반년쯤 사귀다가 헤어졌다.

 

 

그 애랑 키스하다가 입 안에 이름이 새겨진 걸 봤어요.

 

근데 내 이름이 아니였어요.

 

 

이러다가 평생 내 이름 새겨진 사람은 형밖에 없으면 어떡해요? 그걸 고민이랍시고 나한테 말하는 양정인의 표정은 너무 천진난만해서, 그럼 그땐 나랑 만나면 되지 않겠냐고 장난도 못 쳤다. 그저 평소처럼 뛰는 가슴고동을 꾹 움켜쥘 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만난 여자애와는 두 달 조금 넘게 사귀다가 헤어졌다. 대뜸 양정인을 학교 화장실로 데려가 셔츠를 벗더니, 브래지어 바로 아래에 새겨진 글자를 보여줬댄다. Yang cheng yan. 양정인은 황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 내 이름 아냐. 중국인 이름 같은데.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요?

뭐 그런 게 다 있냐. 아, 웃겨 죽겠네.

우린 운명이 아니라면서 화를 내더니 날 찼어요! 나는 진짜 걔가 국제결혼하는 것까지 알고 싶은 맘은 없었거든요.

어, 황당하다. 비슷하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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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됐든 중요한 건, 내가 양정인을 좋아하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운명을 거스르겠다는 거창한 명분은 아니었다. 그냥 좋아진 거야. 원래 네임이 있는 사람도 네임이 나타나기 전에 연애를 하곤 한다. 종착지만 그 사람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진짜' 이름이 뭐든 알 게 무엇인지, 그냥 같은 양정인이면 안 되는 거냐고. 월요일 4교시 수학은 창밖을 보는 게 일과가 됐다. 그 시간에 양정인네 반이 체육을 하기 때문에. 축구를 하고 쏘다니는 양정인의 얼굴이 콩알만하게 보이는 것도 괜찮았다. 그냥 그 애의 움직임이 좋았다.

 

수업이 끝날 때쯤 되면 양정인의 하얀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마냥 좋았다. 양정인 4교시 체육을 좋아하는 것도 좋았다.

 

 

안 뛰어도 급식 제일 먼저 먹을 수 있잖아요.

 

 

월요일 급식은 항상 별로였는데, 양정인은 그래도 좋아했다. 안 뛰어도 되는 거랑 안 기다려도 되는 게 좋대. 종종 월요일에 나오는 콩밥도 괜찮대. 난 양정인이 골라낸 콩을 쏙 들어간 보조개에 담궈 보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곤 했다.

 

 

그때는 벌써 볕좋은 가을이었으니,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었다. 성심성의껏 관리해둔 내신으로 일류 대학은 무리였지만, 적당한 인서울 4년제 대학에 수시 전형 원서를 접수해둔 뒤였다. 학교의 기강은 해이해진 지 오래였다.

 

 

제 소세지 드실래요?

안 먹어?

네, 저 이제 배불러서.

넌 가고 싶은 대학 있어?

딱 정해둔 건 없고, 그냥 인서울만 하면 돼요.

 

 

양정인이 남긴 소세지 야채볶음을 집어먹다가, 벌떡 일어났다. 교실로 올라가면서 그런 말을 했다. 우리 대학 가도 계속 연락하자.

 

 

 

6

 

하지만 대학에 가자마자 연락을 끊은 건 나였다. 고등학생이랑 놀기에는 대학이란 게 너무 별천지였다. 매일 밤 동기들과 병나발을 불고, 술게임을 하느라 고등학생과 카톡하는 것은 너무나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른 채로 일 년을 보내고, 양정인을 다시 만났다.

 

 

맞다, 형 여기 언홍과 붙었었죠?

어, 정인아. 진짜 오랜만이다.

저 여기 영문 붙었어요. 붙었을 때 막 인서울 성공해서 되게 좋아했는데.

 

 

그렇게 다시 만나서, 술을 먹다가, 눈을 떠 보니, 양정인의 자취방이었다. 밤새 달려 조금 초췌해진 몰골의 양정인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나는 침대 근처에 널부러진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아침에 있는 전공 수업은 날려 먹은지 오래였다. 슬쩍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양정인 못지 않게 처참했다. 침대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여전히 하얀 양정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가을볕 아래에 한참 있어도 까매지긴 커녕 빨개지는 애. 말랑해 보이는 볼을 감쌌다.

 

 

어째선지, 그 애랑 처음 키스했던 순간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첫키스도 가물가물한데, 그 애랑 키스했던 순간은 이렇게 선명해도 되는 걸까. 어쩌면 양정인에겐 나와의 키스가 그럴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임팩트 없는 첫키스. 그렇게 남고 싶지는 않았다. 안개속의 희미한 기억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는 양정인을 깨웠다.

 

 

정인아. 양정인.

 

 

난 원래 이렇게나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정인을 알게 된 뒤의 학창시절은 온통 짝사랑뿐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해왔다. 양정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

 

 

으음...

우리 만날래?

네?

사귀자.

 

 

베개 맡에 널부러져 있던 정인의 손을 꼭 잡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양정인은 이불 속에 얼굴을 숨기고 한참을 두더지처럼 파고들더니 다시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양정인의 등은, 얼굴보다도 더 하얗게 빛났다. 잔뜩 뻗친 양정인의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실실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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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양정인이랑 연애를 시작했었다. 평범한 연애였다. 양정인과 내가 '운명'이었다고 할 만한 부분은 두 가지뿐이었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마주친 것, 같은 대학교에 진학해서 우연히 같은 동아리에 들어온 것. 이런 얘길 하면 여자 동기들은 돌고래 울음소리를 내며 로맨틱하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우린 운명적인 구석이 전혀 없었다. 서로의 오해가 엇갈리다가 풀려 비 오는 날 서로를 끌어안고 웃은 적도 없고, 해외에서 우연히 재회해서 아름다운 노을을 배경으로 키스한 적도 없다.

 

오히려 우린 운명적으로 안 맞았다. 고등학생 때 안 맞았던 취향들이 갑자기 기적적으로 겹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고작 두 살씩 더 먹었단 이유로, 우린 티격대기보단 슬쩍 양보하기 시작했다. 진탕 술이나 마시고, 모텔 가서 섹스하고, 아침으로 양정인이 좋아하는 돈까스 먹고, 카페 가서 과제 좀 하다가, 둘 중 한 명의 자취방에서 뒹굴었다.

 

섹스가 끝나면 때때로 나는 양정인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내 이름이 있을까 봐.

 

 

이십 년 동안 거울 보면서 산 나도 못 찾았는데, 형이 어떻게 찾아요.

네 눈으로 못 보는 사각지대에 있을 수도 있잖아.

예를 들면?

등이나... 두피? 아니다, 너 예전 여친처럼 입 안에 있을 수도 있어. 아 해 봐.

없다니까아아아.

그렇게 계속 벌리고 있어.

이 형 집요하네.

 

 

쪽! 양정인은 귀찮다는 듯 입술을 맞췄다. 사실 운명이 아니라도 괜찮았지만, 내 몸에만 양정인이 있는 것은 꽤 불안한 일이었다. 나에게만 운명이면 어떡해. 짝사랑이 천명이면 어떡해. 지금은 이렇게나 사랑해도 나중엔 나만 사랑하고 있으면. 나는 당연히 양정인이 나와 결혼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양정인은 그런 내 불안을 알기는 하는지 시큰둥했다.

 

 

몸에 숨겨둔 이름 같은 거 없으니까 옷 입고 잘 준비나 해요. 우리 낼 1교시잖아요.

내일? 벌써 금요일이구나. 내일 교양 끝나고 돈까스 먹으러 갈래?

아뇨, 오랜만에 제육 먹어요.

오, 제육. 형이 좋아하는 거.

네, 형이 좋아하는 거.

 

 

그러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둘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후드득 웃었다. 여름철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기라도 한 것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결국 그렇게 실없는 소리만 하다가 기절하듯 알몸으로 잠드는 게 태반이었다.

 

 

 

8

 

제 몸에 정인 씨 이름이 있어요.

 

 

뭐, 어쩌라구요? 나는 학교 정문 스타벅스에 삐딱하게 앉아 맞은편 여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한참 홀리데이 이름을 달고 시즌 한정 커피들이 줄지어 나올 때였다. 그리고 내 손바닥 두 개만한 테이블 위에는 아메리카노만 두 잔이 있었다. 여자는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곳엔 선명하게 양정인이라고, 정갈한 글씨로 써 있었다.

 

 

양정인한테 가서 말하세요. 왜 저한테 오셨어요.

두 분이 사귀니까요. 헤어지셨으면 하거든요.

그러니까요. 양정인한테 가서 말하시라고요.

전 정인 씨랑 처음은 좀 더 운명적이었으면 하거든요. 지금 남자친구랑 헤어지라는 진부한 얘기를 꺼내는 것보다는요.

 

 

그 말을 듣자마자 코웃음이 나왔다. 나 어제까지 양정인이랑 뒹굴었어. 오늘 아침에도 굿모닝 카톡했어.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후드티를 벗어던지고 팔뚝에 새겨진 양정인 석 자를 보여 주고 싶었다. 나의 노골적인 비웃음에도 여자는 태평했다. 오히려 너무 떳떳해 보여서 내 어깨가 움츠러들 지경이었다.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저랑 양정인은 이미 운명이에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신 거겠죠. 정인이랑 얘기해 봐야 할 분은 제가 아니라 승민 씨인 것 같아요.

아니, 씨... 무슨 헛소리냐고요. 내 몸에도 양정인 이름 있거든요? 우리 존나 운명이에요. 고등학교도 같은 곳이었고요. 거기에서 만나서, 아. 양정인 첫키스도 저였고요. 그리고 또... 대학도 우리 우연히 같은 학교로 와서 다시 마주쳤어요. 그리고 만나자마자 첫눈에 다시 반하고, 지금 일년 다 되도록 만나고 있거든요? 진짜 무슨 수작질이신지 모르겠거든요? 그리고 어제 밤에 잘 자라고 카톡도 했는데 무슨 소리야? 당신 뭐, 사이비예요? 아님 다단계?

 

 

한번도 양정인과 나는 운명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이가 없고 열받아서.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그 여자가 가당치도 않아서. 어림도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여 떠들었다, 나랑 양정인이 운명이라고. 여자는 날 안쓰럽다는 듯한 눈동자로 응시했다. 점점 더 열이 올랐다. 그래, 양정인의 운명은 내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내 운명은 양정인이 맞는데.

 

 

 

9

 

그날도 어김없이 양정인의 자취방에 누워 양정인의 몸을 탐색하고 있었다. 뒷목, 허벅지 뒷편, 귀 뒤, 혀 밑, 엉덩이(아, 거긴 왜 자꾸 보냐고.), 두피까지 샅샅이. 양정인한테 내시경 받을 생각 없냐고 물었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내 엉덩이를 발로 찼다.

 

 

어떤 여자가 나한테 와서 자기가 니 운명이래.

그래요? 그 양정인이 나인 줄은 어떻게 안대요?

그러니까. 하고 많은 양정인 중에 딱 너를 점 찍었나 봐. 나한테 와서 헤어지라고 그러더라.

드라마 많이 봤나 봐. 웃긴다.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요.

나랑 정인이는 운명이라고 하면서, 막 우리가 운명인 이유를 백 개 정도 말했어. 그랬더니 바로 튀더라고.

음... 그렇구나.

 

 

양정인의 반응이 유독 미적지근했지만, 그냥 졸려서 그런 거라 생각하고 싶었다. 양정인의 마음이 변하는 걸 눈뜨고 볼 자신이 없었다. 내시경 받을 생각이 없냐고는 물었지만, 거기서 양정인 몸의 이름을 봐 버릴 자신이 없었다. 진짜 다른 사람이 운명이면 어쩌냐고. 얘한테 운명이 될 사람만 없다면, 나는 양정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천명 하나로 이 애를 평생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불 꺼 줄까? 네. 우리 내일 아침 수업이잖아요. 난 1교시, 형은 2교시. 지금도 늦었어요. 맞네. 정인이 너 나가기 전에 형 좀 깨워주고 나가. 싫어요. 야. 형 어차피 흔들어도 안 일어나잖아요. 그래도 깨워. 넵.

 

사실 그 여자가 손바닥을 보여줄 때 든 생각은 그거였다. 진짜 이 여자의 운명이 양정인이면 어떡하지? 마음 같아선 초소형 카메라로 양정인의 외피와 내피를 구석구석 핥듯이 탐색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확인하면 이 불안을 눌러삼키고 양정인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헤어질 때도 쿨하게 놔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오해라도 양정인 몸에는 이름이 없었으면 좋겠다. 독신이 양정인의 천명이었으면 좋겠다.

 

그날 그런 꿈을 꿨다. 내가 어릴적 꿈꾸던, 긴생머리의 귀여운 여자애 양정인. 동그란 인상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주름치마를 입은. 굽이 아주 낮은 메리제인 슈즈를 신은. 그 여자애의 귀 뒤에는 김승민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아, 귀 뒤에 있어서 그간 못 찾은 거구나. 내심 뿌듯했다. 나를 돌아보는 양정인의 얼굴은... 내가 아는, 그 송곳니가 툭 튀어나온 아이였다. 나는 양정인의 귀 뒤를 조심스레 더듬으며 입을 맞췄다. 어릴 때 동네 빵집에서 먹은 투박한 스폰지 케이크 맛이 났다. 송곳니를 뾰족한 생크림처럼 혓바닥으로 더듬으면, 양정인은 소리 높여 웃었다.

 

 

 

10

 

의사 외 보건행위 특별법 3조 1항 자신의 이름이 아닌 타인의 이름을 몸에 문신으로 새긴 자와 이를 조력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역시 인기가 많으면 피곤해, 그치.

왜요, 갑자기?

아니, 그냥. 너랑 사귀고 싶어서 그 여자가 몸에 문신하고 나타난 건 아닐까 싶어서.

아직도 그 생각해요?

너한텐 그런 여자 없었어? 내가 사실 김승민의 진짜 운명이다, 헤어져라. 그러면서 몸에 딱 김승민 새겨진 거 보여 주고.

없었어요.

.... 아, 짜증 나네.

 

 

그러게 내가 그 교양 재미없을 것 같다고 했잖아요. 이름이 뭐더라. 사회와 생활법률? 사실 몸에 새겨진 이 정체불명의 이름을 둘러싼 수많은 논문이 존재했다. 그 이름의 소유자와 결혼할 확률, 이것은 진짜 운명인가, 이름과 결혼생활 만족도의 상관관계 등. 그 논문들과는 별개로 몸에 새겨진 선천적 이름 때문에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자 법률부터 제정되었다. 문신으로 이름을 사칭하여 상속 분할 등 실제 사회생활에 문제가 생기자 급히 제정된 법률이었다.

 

나는 내심 그 여자가 양정인을 너무 사랑해서 미친 여자이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고서는 몸에 양정인이 새겨진 채로 태어난 모든 사람을 죽여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스타벅스에서 여자의 손바닥을 유심히 바라보았었다. 번진 자국도 없었고, 오히려 음각으로 들어간 것 같은 촉감이 만져졌다.

 

문신이라는 증거만 있었어도 고소했어. 그간 내 맘고생 다 더해서 위자료도 물어내라고 했을 거야. 한 천만 원이면 내 마음고생에 비해 싸게 해 준 거다. 넌 진짜 운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노트북을 닫았다. 과제고 지랄이고, 그냥 양정인 송곳니나 구경하고 싶어서.

 

 

 

11

 

사실 형이 그 여자 엄청 신경 쓴다는 거 저도 알고 있어요.

 

 

갑자기 양정인이 그랬다. 스타벅스에서는 머라이어 캐리 누님이 겨울을 맞아 수금 중이셨고, 나는 양정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 교환식을 맞아 손가락에 끼워 줄 커플링을 몰래 사서 가방에 넣어두었다. 그 그 그 그 그 그 여자라니. 모르는 척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덜덜 떨어 버렸다. 괜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나. 어쩐지, 오늘은 뜨거운 거 시키고 싶더라. 추워서 턱이 떨린 거지.

 

 

제 이름 손바닥에 있다고 보여 준 여자 있잖아요.

응.

네, 그 여자. 엄청 신경 쓰잖아요.

티 났어?

네....

 

 

크리스마스를 맞아 나온 케이크는 더럽게 맛이 없었다. 포크로 몇 번 뒤적거린 흔적은 있었지만, 입으로 들어간 건 세 입이 채 안 됐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정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방금 밖에서 들어왔는데, 이상하게 차갑지 않았다.

 

 

솔직히 우린 운명이 아니예요.

어....

형이 오늘 선물로 사 온 커플링도 분명 내 사이즈 아닐 거예요.

 

 

예리한 양정인은 내가 준비한 선물이 커플링이란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곤 슬금슬금 눈을 피하는 내 양볼을 두손으로 잡아 고정했다. 키스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운명이라면 기적적으로 내 손가락에 딱 맞았겠죠.

응.

만약 형이 그것 때문에 절 차 버리면, 전 버려졌다 여기고, 형은 놓아줬다고 여기는 이별이 될 거예요. 완전 최악이죠.

응....

운명보다 운명적인 건, 운명따위 통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생각해 줘요.

 

난 형이 내 운명은 아니지만, 정말 형을 사랑해요. 이마빡에 김승민 석 자가 적힌 여자가 스타벅스로 들어와서 형을 내놓으라고 하더라도요. 그 여자 이름이 양정인이라도요.

 

 

 

가방에서 꺼낸 커플링은, 정말 양정인의 손가락에 맞지 않았다. 형 제 손을 몇 번이나 잡았는데... 아니, 내 손이 이렇게 작을 거라 생각했다고요? 양정인은 몇 번이나 토라지려고 했다. 나는 양정인의 반지를 약지대신 소지에 끼워줬다. 내 앞에는 그제야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웃는 양정인이 있었다.

 

나는 짝사랑이 천명이라 생각했어. 그런데 그냥 운명보다 더 나은 사랑을 하려고 그랬던 거야. 내가 사랑하지 않는 수백 명의 양정인보다 너를 더 원했던 거야. 나는 나보다 똑똑한 사람을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양정인은 형언할 수 없이 운명적인 사람이었다. 어디서도 널 놓치지 않을 거란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양정인이 수천 수만 명이라면, 몸에 양정인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사람도 수천 수만 명이겠지. 그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난 절대 너를 잃지 않을 자신이 드디어 생겼어. 나보다 똑똑한 너를 만나서. 운명은 아니지만 운명적인 너를 만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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