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처음 만난 날부터 의도치 않게 거짓말을 해버린 셈이라 그랬다.
때는 양정인이 갓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정인이 가족들을 전부 부산에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왔을 때. 정인의 아버지가 직장에서 서울 지부 발령이 확정 난 상태였으나 그건 6월부터의 얘기였다. 부산에서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3개월 다니다가 전학을 가느니 위장전입이라도 해서 서울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게 낫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얘기했다. 정인의 부모님은 쉽게 수긍했고, 정인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열일곱. 정인은 잘 모르는 친척 집에 머무는 그 3개월이 어려웠다. 낯선 도시와 낯선 학교, 그 사이에 정인만의 공간은 없었다.
3개월만 버티면 되는 거라 가족들에겐 힘들단 말이 안 나왔다. 양정인이 좀 그랬다. 자기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걱정시키는 걸 싫어했다. 사실 쓸데없지 않은데도 그랬다. 아무도 정인에게 어른스러움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양정인은 늘 어른처럼 굴었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많은 걸 눌러 담고 버티던 정인은 꼭 한계까지 부풀린 풍선 같았다. 바늘 하나만 갖다 대면 펑하고 터져버릴 정도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봄날이었다. 한국의 3월은 봄이라기엔 춥고, 겨울이라기엔 꽃이 피어 애매했다. 봄도 겨울도 아닌, 말 그대로 환절기였다.
아침에 우산 챙기는 것을 잊은 정인은 온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가볍게 오는 비인 줄 알고 뛰어들었으나 빗줄기가 금세 사나워진 탓이었다. 정인은 아파트 입구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계단 아래 물웅덩이를 봤다. 떨어지는 빗물의 개수라도 세어야겠다는 심정이었다. 아파트 입구의 얕은 지붕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비를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튀어 들어오는 빗물이 이따금 정인의 볼에 와 닿았다. 그다지 차갑지도 않았다. 팔에 닿는 축축한 교복이 더 차가워서 그랬다.
“여기 왜 이러고 있어?”
낯선 목소리에 정인이 고개를 들었다. 같은 학교 교복을 입은 낯선 사람이었다. 명찰에는 김승민, 세 글자가 박혀 있었다. 정인의 교복 넥타이를 보고서 반말을 하는 것 같았다. 넥타이를 가로지르는 선들이 노란색이면 1학년이라는 뜻이었다. 노란색 섞인 넥타이를 맨 정인은 승민의 넥타이를 봤다. 빨간색 선 여러 개가 눈에 띄었다. 2학년이네. 정인이 속으로 생각하며 대답했다.
“현관 키를 두고 와서요.”
승민은 정인을 티 나게 훑더니 그랬다.
“집 열쇠는?”
“...없어요.”
“들어가자. 일어나.”
정인이 승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디로 들어가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현관 안으로? 승민의 말대로 일어나야겠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인이 여전히 쪼그려 앉아 있으려니 승민이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일으켜 줘?”
승민이 잠금장치에 현관 키를 가져다 댔다. 정인은 잠깐 고민했다. 현관 앞에 있는 것보다야 현관 안에서 튀는 빗물이라도 피하는 게 나았다. 정인은 같은 말 두 번 하게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짧은 고민을 끝내고 몸을 일으켰다.
승민이 엘리베이터를 잡고 기다리는 동안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승민이 짧게 질문하고 정인은 끊어내듯 대답하는 식이었다. 양정인은 낯을 가렸고, 원체 무뚝뚝해서 살가운 말을 못 했다.
“우산은 왜 안 갖고 나왔어.”
“일기예보를 안 봤어요.”
“안 추워?”
“춥긴 한데, 이제 들어와서 괜찮아요.”
모르는 사이에 가볍게 할 질문은 끝났고, 애매한 정적이 흘렀다. 대답만 하지 말고 무슨 질문이라도 할 걸. 정인이 후회하고 있을 때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뭐해. 안 타?”
“네? 저 집 열쇠 없는데요.”
“그렇다고 1층 현관에 계속 있을 거야?”
“네... 네?”
“우리 집 들어와 있어. 집에 아무도 없어.”
나중에 승민에게 들어보니 그랬다. 그날 양정인 운 좋았던 거라고. 하교 후에 바로 독서실로 향하는 승민이 오래간만에 집이 비었단 얘기에 독서실 대신 집으로 향했다는 거였다. 나 원래 집에 누구 있으면 집에서 공부 안 하거든. 양정인은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날 나 때문에 형 공부 못했구나. 그런 소리는 구태여 하지 않았다.
사실 그날의 첫 만남이 정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승민은 아마 모를 거였다. 그날의 승민이 정인에게 얼마나 큰 위로로 다가왔는지도. 힘든 타지 생활에, 쫄딱 맞은 비에, 잊고 나온 열쇠에. 무너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양정인이 막 무너지려던 때 김승민이 옆에 있어 준 거였다. 며칠이나마 같이 살았던 친척도,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새로 사귄 친구들도 아니고 그날 처음 본 사람이 정인을 위로했다. 승민은 그게 위로인 줄도 몰랐을 테지만 그랬다.
그날 정인은 승민의 집에서 저녁까지 함께 먹었다. 씻고 나와. 옷 갖다 줄게. 그랬던 승민 덕에 뽀송뽀송한 옷을 입고서 승민과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가 얼마 만인지 새삼스러웠다.
“형.”
“언제 봤다고 형이야?”
승민이 실실 웃었다. 나 참, 이 형 웃기네. 정인은 속으로만 툴툴대고 태연히 말했다. 그럼 형 말고.
“저기요, 밥 맛있네요.”
정인은 어이없다는 티도 내지 않았다. 장난친 입장에서는 퍽 재미없다고 할 만한 무반응이었다.
“아, 형이라고 해 줘.”
“언제 봤냐면서요.”
“장난이지.”
정인이 눈을 흘겼다.
“알겠어요. 형.”
“응, 정인아.”
“고마워요.”
“응, 밥 맛있지. 다 내가 좋아하는 거.”
승민이 뭐가 고마운지 되묻지도 않고, 제육볶음을 집어 들면서 그랬다. 정인은 그런 반응마저 고마웠다.
“제육 좋아해요?”
“음. 제육도 좋아하고, 한식이면 다 좋아.”
“저도요.”
정인은 제가 대답해놓고선 내심 놀랐다. 사실 정인은 한식이고 뭐고 먹을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승민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 보니 무의식 중에 거짓말을 해버린 거였다.
“정말? 가끔 우리 집 와.”
“네?”
“같은 아파트잖아. 가끔 같이 먹자, 저녁.”
“진짜 와요?”
“응. 와.”
정인이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 승민을 봤다. 이 형은 참 스스럼이 없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승민도 정인을 봤다. 그리곤 눈썹을 까딱.
“알겠어요.”
그제야 입 끝을 올려 웃는다. 양정인이 딱 삼 개월 동안만 같은 아파트 주민인 건 모르고.
정인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지? 승민을 모를 적에는 한 번 스친 적도 없었는데 처음 만난 날부터 거의 매일 마주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우연히.
“정인이 안녕.”
꼭 저렇게 인사했다. 양정인이라고 부르는 법이 없었다. 부산과 다르게 서울에서는 성 떼고 이름만 부르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땐 그게 그렇게나 간지러울 수 없었다. 하루 내도록 간지러운 정인아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했다. 김승민이 부르는 정인아 소리가 그렇게 간지러울 수가 없어서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보네.”
승민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김승민이 자주 짓는 표정이었다. 눈 끝이 아래로 가게 접고선 착하게 웃는 얼굴. 그 착한 표정으로 농담을 하고, 정인을 놀리기도 했다.
“그러게요.”
오늘도 본다는 승민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어제도 등교하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으니까. 정인이 1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두 층 내려오면 8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승민이 올라탔다. 대충 일주일에 서너 번꼴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부터 학교 정문 앞까지 못해도 20분이 걸렸다. 20분씩 거의 매일 대화를 하다 보니 부쩍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공유하는 이야기 주제는 그날그날 달라졌다. 아파트 근처에서 자주 보이는 길고양이 얘기, 1학년 담당 선생님들 얘기, 그리고 가족 얘기까지 나름 다양한 주제로 대화가 통했다. 승민이 처음 동네 얘기를 꺼냈을 때 정인은 제가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겠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친척 집에서 머물고 있다는 얘기는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정인은 문득문득 승민을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승민에게 솔직하지 못한 자신을 생각했다. 친척 집에서 몇 개월 사는 거고 6월부터는 어디서 살지 잘은 모르겠다고. 왜 그 얘기를 못 하겠는지.
정인이 우연에 기대지 않고도 승민을 만날 수 있을 때쯤엔 중간고사가 코앞이었다. 문자로 시답잖은 핑퐁을 주고받기도 하고, 승민의 집에서 몇 번이고 저녁을 함께 먹었던 때.
“정인아.”
꾸벅꾸벅 졸던 정인이 제 어깨를 쓰는 손길에 퍼뜩 눈을 떴다. 접이식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승민이 제 침대 쪽으로 턱을 까딱였다.
“너무 잠 오면 삼십 분만 자. 깨워줄게.”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히 고집...”
정인이 도끼눈을 떴다. 김승민은 별생각 없지만 양정인은 싫어하는 단어가 몇 있어서 그랬다. 고집 피운다는 말 듣는 거 싫어. 정인은 아예 대놓고 말했었다.
“미안.”
“알면 됐어.”
정인이 양 손바닥을 비벼서 제 눈가에 올렸다. 조금이라도 잠을 깨 보려는 노력이었다.
“정인아.”
“왜, 또.”
“그렇게 말할 거야? 형 상처 받는다.”
정인이 승민을 무시하고 펜을 잡았다. 개소리할 거면 공부나 하라는 뜻이었다. 승민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 시험 끝나고 공연 보러 갈래?”
문제집을 향해있던 시선 하나가 슬쩍 들어 올려졌다. 그리곤 정인이 눈썹을 달싹.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너 인디 음악 좋다며.”
아니었다. 어느 날 우연히 같이 하교하던 날, 승민과 이어폰 한쪽씩 나눠 끼고 들은 노래가 죄다 인디 음악뿐이어서. 정인은 또다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었다. 난 이런 노래가 좋더라. 그랬더니 너도 인디 좋아해? 하는 말이 돌아왔다. 얼결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정인은 집에서 혼자 인디가 뭔지 한참 찾아봤다. 성인가요 아니면 정통 발라드를 즐겨 듣는 정인에겐 영 취향 밖이었다. 그래도 뱉어놓은 말에 책임을 져야 했다.
“응. 근데?”
“인디 뮤직 페스티벌이라고, 우리 시험 끝난 주말에 하는 공연 있거든. 인디 밴드들 엄청 와. 같이 가자.”
정인이 눈을 굴렸다.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가기 싫은 건 아니고, 갔다가 잘 모르는 티가 나면 어떡하지 싶어서 고민이었다.
“싫어? 그럼 말고.”
“아니, 아니. 좋아. 가자.”
정말 잠깐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을 뿐인데, 김승민은 가끔 성질 급하게 굴 때가 있었다. 사실 승민은 성질이 급한 게 아니고,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들기 싫어서 그런 거였지만. 정인도 그걸 알았고, 망설임은 일단 접기로 했다. 진짜로 싫어하는 줄 알까 봐 길게 망설이지도 못했다. 시험 끝나고 열심히 공부하면 되겠지. 정인은 가볍게 생각했다. 우선은 고등학교 첫 중간고사를 무사히 끝마치는 데에 집중해야 했다.
시험 직후에 약속을 잡는 것은 당장의 시험공부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누구나 알지만 누구든 간과하고 마는 사실이었다. 눈앞의 시험보다는 시험 끝나고의 상상이 훨씬 달콤했다. 시험이 끝난 금요일, 정인은 같이 놀자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당장 다음날 예정된 승민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인디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던 지난날의 거짓말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인디 가수를 찾아보고 노래를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페스티벌에 나온다는 가수들 위주로 찾아보면 되겠지. 정인은 자기 직전까지 인디 음악을 들었다. 듣다 보니 승민의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노래도 몇 곡 기억났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아는 노래가 나오면 그날 승민과 걸었던 하굣길이나 나눴던 대화 같은 게 떠올라서.
기분 좋게 잠들었고, 기분 좋게 일어났다. 승민의 집에서 같이 보낸 시간은 꽤 쌓여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승민과 밖에서 따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정인은 그게 뭐라고 괜히 떨렸다.
“정인이 교복 말고 외출복 입은 거 첨 본다.”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그랬다.
“나도 형 이런 옷 입은 거 첨 봐.”
“그러게. 맨날 집에서 편한 옷만 입은 거 보다가 차려입은 거 보니까 어때?”
“뭐가 어때.”
솔직히 멋있었다. 자기도 거울 보면 알 거면서 괜히 물어봐. 정인은 속으로 툴툴대면서 절대 순순히 멋있단 말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정인이는 귀엽고 멋있네.”
승민이 선수를 쳤다. 이건 반칙 아닌가. 그러고는 늘 짓는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또 놀리지. 이 형 진짜 안 되겠다.”
“아냐. 진짜 멋있는데 왜. 정인이를 누가 또 놀린대.”
“형이요, 형.”
승민이 실실 웃으면서 정인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았다.
“뭐얼.”
“됐어. 가기나 해요. 나 길 몰라.”
나란히 걸어가는 길에 바람이 따뜻했다.
정인은 빨간 펜으로 시험지에 동그라미를 연이어 그릴 때보다 지금이 더 뿌듯했다. 무대가 이어질 때마다 모르는 노래가 없어서. 심지어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나 지금 완전 인디 팬 같다.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하면서 광대를 끌어올렸다. 정인이 기분 좋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턱을 살짝 들고, 원래도 가로로 길쭉한 눈을 더 길게 만들어 웃는 표정. 볼록 튀어나오는 애교 살이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한참이나 무대를 즐기던 정인이 바로 제 옆에 선 승민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놓고 고개를 휙 돌린 건 아니고, 그냥 흘긋. 그리곤 시선이 붙잡혔다. 김승민의 눈이 반짝이고 있어서 그랬다. 공연장 불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건 맞는데, 꼭 승민이 눈을 빛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나 좋은가. 공연 자체로 인한 만족보다는 제가 공부했던 보람을 느끼고 있던 정인이 내심 시무룩해졌다.
정인은 자신만의 취향이랄 게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승민의 모습이 빛나 보였다.
이후로는 무대에 통 집중을 못 했다. 공연보다는 김승민을 관람했다고 보는 게 맞을 정도였다. 승민이 어떤 가수를 더 좋아하는지, 어떤 노래에 가장 설레 했는지 다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승민에게만 집중한 시간이었다. 정인은 어제 노래를 찾아 들으면서 승민과의 기억을 떠올렸던 것처럼, 오래도록 오늘의 승민이 노래에 새겨질 거라고 생각했다.
정인은 공연을 본 승민의 흥분에 찬 감상을 들으면서도, 집 앞까지 와서 안녕 인사를 하면서도, 집에 들어와 잘 준비를 하면서도 내내 공연 생각을 했다. 공연과, 공연을 보던 승민을.
자려고 불을 끄고 막 누웠을 때 정인의 휴대폰이 울렸다. 승민이 보낸 문자였다.
- 정인아 이거 봐
들어가 보니 승민이 공연 내내 찍은 사진이 한가득했다. 승민은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공연장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기에 정인이 눈짓으로 물어보니 그랬다. 사진이 잘 나오려면 무거운 걸 들어야 하는데, 무거운 건 들고 다니기 힘들 것 같아서 가벼운 것으로 하나 샀다고. 어디 갈 때면 꼭 챙겨 다닌다고 했다. DSLR에 대해 잘 모르는 정인은 그러려니 넘겼는데, 생각보다 사진이 예뻤다.
- 사진 잘 찍었네! 예쁘다
문자 하나 남겨놓고, 본격적으로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정인이 몇 개의 사진을 슬슬 넘기다가 멈추고 사진 하나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공연장 아래에서 무대 조명을 받은 채로 웃고 있는 양정인이었다. 공연 초반에는 정인도 무대를 보면서 뿌듯해했으니까. 아마도 그때 찍힌 것 같았다. 정인이 승민을 곁눈질로 살펴보기 전.
정인은 신기했다. 내가 이렇게 웃기도 했나?
- 뭐가 젤 예뻐
- 나
때마침 승민에게서 온 문자에 정인이 뻔뻔스레 답했다. 내가 제일 예쁘네.
- ㅎㅎ 형이 좀 잘 찍지?
- 응
정인은 잠깐 후회했다. 나도 승민이 형 찍을걸. 그런 후회. 좋아하는 걸 좋아할 때 빛나는 눈이 너무 좋아서 다시 보고 싶었다. 앞으로 다시 볼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그래도.
- 담에는 우리 같이 찍어
- 응?
- 나랑 형이랑 같이 사진 찍자고
김승민을 찍고 싶었던 건데, 나도 형 찍겠단 말은 안 나왔다. 그래서 그냥 같이 찍자고 했다. 김승민이랑 양정인이랑 같이 나온 사진도 괜찮을 것 같았다.
- ㅋㅋㅋㅋㅋ알겠어
- 웅 나 잠 온다
- 잠 오면 자야지
- ㅇㅇ 형 잘 자
- 정인이도 잘 자
한 번은 정인이 승민의 집에서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나 사실 영화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영화를 보려고 만난 건 아니었다. 저녁만 먹고 가기는 아쉽지 않냐며 승민이 정인을 붙들어 앉혔던 거였다.
“근데 웬 영화예요.”
“그냥. 이제 좋아해 보려고.”
그래 놓고 찾아온 영화는 로맨스 영화였다. 아주 옛날 영화도 아니고, 최근 개봉작도 아니고, 애매하게 철 지난 영화. 정인도 이름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영화였는데, 딱 그 정도로 유명할 만했다는 감상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승민이 그랬다. 남자 주인공 싫다고. 집이 바로 두 층 위에 있는데도 굳이 바래다주겠다기에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선 채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길게 대화할 순 없어서, 영화 얘기를 잠시 했다. 승민은 남자 주인공이 잘못 끼운 첫 단추 때문에 여자 주인공이 고생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주변 사람들한테 폐 끼치는 사람이 제일 싫다고.
“그런가요. 결국 둘 다 잘됐으니까 된 거 아닌가?”
정인은 그렇게 대답했다. 승민이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잘 가라고 인사하는 승민에게 손을 마주 흔들어준 정인이 집에 와서 한참 생각했다. 사실 승민 없이 혼자서 그 영화를 돌려보기도 했다. 김승민이 그동안 싫은 소리를 한 적이 별로 없어서 궁금했다. 남자 주인공의 어떤 점이 그렇게 싫은지 알고 싶었다.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나서 생각했다. 승민이 형한테 미움받을 짓 하지 말아야지. 승민의 싫단 소리가 향하는 게 자신이 된다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거짓말하곤 못 산다. 정인이 요즘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말이었다. 양정인은 원체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자랐다. 가풍이 그랬다. 집안사람들은 하나같이 솔직했고, 정인은 스스로 솔직한 걸 넘어 다른 사람의 솔직함에도 베이지 않는 사람이 됐다.
그런데 김승민에게는 유난히 솔직해지는 게 어려웠다. 승민을 만날 때마다 작은 거짓말이 쌓였으니까. 저 혼자 덩치를 불린 거짓말은 양정인의 솔직함 자아를 긁어댔다.
너 나중에 어떻게 감당할래.
나중에 김승민이 알게 되면 어떡할 거야.
나중에, 나중에. 정인은 자꾸만 승민과의 나중을 그렸다. 거짓말을 해서 괴롭기보단 거짓말이 밝혀져 망칠 사이가 두려웠다. 양정인은 원래 인간을 대할 때 먼 미래를 내다보지 않았고, 그래서 모두에게 솔직할 수 있는 거였다. 김승민만은 오래 보고 싶어서 솔직해질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오래 보고 싶다는 건 그랬다. 상대방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자꾸만 없는 말을 하게 됐다. 모두에게 솔직한 양정인이 승민에게만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그랬다. 김승민을 오래 보고 싶어서. 김승민에게 한 거짓말이 괴로운 이유도, 김승민을 오래 보고 싶어서.
정인은 오래 보고 싶은 마음도, 어쩌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알고 나서는 돌이킬 수 없어진다. 그게 뭐든 그랬다.
김승민을 알게 되고 자주 마주친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일지도 몰랐다. 같은 아파트, 같은 학교이니 알기 전부터 수없이 마주쳤을 거였다. 알기 전엔 같은 공간에 있어도 신경 쓰이지 않았을 사람. 승민에게 의도치 않은 위로를 받고 나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 떼고 불러주는 간지러운 제 이름에도 신경이 쓰였다. 인사든 문자든 먼저 말 걸 용기는 없는 정인에게 항상 먼저 건네주는 말에도 신경이 쓰였다. 스스럼없이 제 집을 드나들게 하는 것에도 신경이 쓰였다.
김승민을 알고 나서는 김승민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사랑도 그랬다. 정인은 이제 제 마음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솔직해져야 했다. 거짓말의 이유가 사랑이었단 걸 알게 돼서. 김승민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오래 보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낸 거짓말이었지만, 둘 사이에 거짓말이 쌓이면 인연이 길어질 수가 없었다. 정인도 그걸 알았다. 양정인은 혼자 생각하는 때가 많아서, 그걸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이 정인에겐 가장 적절한 때였다. 승민에게 그동안 해온 거짓말을 고백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 다음 주부터 가족들이랑 함께 살 집은 학교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승민의 집과는 학교를 사이에 두고 정반대였다. 학년도 다르고, 마음만 먹으면 얼굴 자주 보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정인은 승민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을 말하기로 했다. 얼굴 보지 않을 각오로. 제 마음이 훨씬 커지기 전에.
“형, 사실 나...”
막상 제 마음을 고백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사랑을 말하는 것보다 그동안 해 온 거짓말을 고백하는 게 힘들었다.
“사실 나, 형이 좋아. 형이랑 매일 연락하고 싶고, 매일 보고 싶고, 형이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정인이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제 마음은 내놨고, 이제 정말 말하기 힘든 것들을 말할 차례였다. 사소하지만 정인을 괴롭게 했던 거짓말에 대한 고백.
“정인아.”
“잠시만. 조금만 더 들어줘. 그리고 그동안 형이 좋다는 거 나도 좋다고 했던 거... 그거 다 거짓말이야. 한식 좋다고 한 거랑, 인디 음악 많이 듣는다고 한 거. 그리고 나 사실 형이랑 같은 아파트 안 살아. 친척 집에서 잠시 사는 거고, 다음 달부턴 어디서 살지 몰라. 형한테 좀 더 잘 보이고 싶어서 거짓말했는데. 솔직하지 못해서 미안해. 형이 이제 나를... 별로 안 좋아한대도 괜찮아.”
사실 안 괜찮으면서 그랬다. 안 괜찮은데, 정인이 잘못한 일이니까 책임지는 건 정인의 몫이었다. 괜찮지 않은 마음을 추스르고, 김승민의 미움을 견디는 것. 전부 정인이 져야 할 책임이었다.
“정인아, 눈 들어 봐.”
길게 말을 내뱉으면서 승민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해서 고개를 숙이진 않았지만. 정인은 마음 같아선 고개를 푹 숙이고 싶을 정도였다. 목에 힘을 주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생각할 정도였는데. 내리깐 눈을 들라고 말하는 승민의 목소리가 다정해서 눈물이 났다. 거짓말하지 말걸. 처음부터 솔직할걸. 오래 보고 싶은 사람이 처음이라, 사람을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게 처음이라 몰랐다. 정인이 눈물을 참았다.
“정인아, 형 좀 봐줘.”
두 번 무시할 수는 없어서, 정인이 눈을 들었다. 그리고 마주한 김승민의 눈은
“내가 왜 널 안 좋아해.”
양정인의 눈과 똑 닮아 있어서. 사랑이 아닐 수 없어서.
“왜 울고 그래.”
꾹 눌러 담았던 눈물이 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