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민찾기

2019. 11. 30. 23:30

 

 

 

 

 

 결국 콜센터에서 짤렸다. 완벽히 고치지 못한 사투리 억양이 드문드문 묻어나서였다. 여태 해본 일자리들 중에는 그나마 시급도 세고 덜 힘든 곳이었는데. 아쉽게 됐다. 건물에서 나와 회색빛 패딩을 여미는 정인의 얼굴도 근심이 가득 낀 회색빛이었다. 분명 없는 게 없는 서울 바닥인데, 딱 둘만 없었다. 정인이 마땅히 일할 만한 곳. 그리고 김승민.

 

 평생을 이 작은 동네에서만 보낸 네가 연고도 없는 서울서 어떻게 혼자 버티냐는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올라온 서울도 어느덧 3년째였다. 그런데도 정인은 아직까지도 서울이랑 서먹했다. 어울리지 못하고 낯을 가렸다. 그래서 더 그리워지는 얼굴 하나가 기억을 들쑤셨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이 끊기고 시간이 빌 때면 느지막이 시작한 공부를 틈틈이 했다. 그래봤자 기껏 무료 인강 듣는 게 다인지라 모르는 걸 물을 데도 없고, 다시 일자리를 구하면 겨우 30분 듣고 꾸벅꾸벅 졸곤 했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싸인볼 하나 덜렁 놓인 고시텔 책상에서 나름대로 애를 썼다. 뭐 하나라도 더 배워놓으면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는 걸 서울 올라와서 몸소 깨달았다.

 

 그러다 가끔 전에 단기 알바했던 곳 팀장님한테 연락이 오곤 했다. 부탁했던 대로 야구장 아르바이트 건이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관중석에서 승민을 찾는 건 그야말로 서울 가서 김 서방 찾기랑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차라리 그게 나았다. 주차장에 배치되는 날은 그냥 잴 것도 없이 꽝이었다. 그런 날은 근무가 끝나고 사람들 다 빠진 경기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돌아오곤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이 잘 안 떨어졌다.

 

 

 

 아르바이트 구인 어플을 들여다보던 정인이 오래 못 가 손을 감춰 넣었다. 잠깐 핸드폰 만지는 것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만큼 저녁 공기가 찼다. 부산보다 이르게 찾아오는 서울의 겨울 역시 적응이 안됐다. 몸을 한껏 움츠린 채로 걷던 정인이 천천히 멈춰 섰다. 고시텔 근처 당구장 위에 있는 야구 연습장에 정인의 시선이 머물렀다. 손님이 뜸한지 폐업을 앞두고 낮춘 가격으로 막바지 영업 중이었다.

 

 

 영업장 공기가 인적 없이 서늘했다. 녹이 슨 문을 열고 맨 끝 칸에 들어선 정인이 어설프게 허리를 숙이고 동전을 넣었다. 흘러나오는 안내 멘트에 따라 야구 배트를 든 정인이 영 어색한지 자세를 이리저리 고치던 중, 첫 공이 쏜살같이 날아와 푹신한 벽에 퍽 부딪혔다. 바보같이 놀라다가 두 번째 공도 날려 먹었다. 세 번째 공은 헛스윙. 네 번째 공은 팅 빗겨 맞고.

 

 열 번의 기회가 순식간에 끝났다. 정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니 허연 입김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기운이 다 빠졌다. 정인이 배트를 제자리에 놓아두며 풀썩 주저앉았다. 야구 어렵네. 벽에 고개를 기댄 정인이 가만히 숨을 골랐다. 이 어려운 걸 어떻게 그렇게 잘했대 형은.

 

 

 

 "아 힘들다."

 

 

 

 야구든 뭐든. 정인이 별안간 눈을 크게 뜬 채로 눈동자만 굴렸다. 그러다가 참기가 힘들었는지 손등으로 눈 위를 투박하게 슥슥 닦았다.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서울에서 버티는 것도. 공 하나 치는 것도. 눈물 참는 것도. 옛날 같았음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들이 정인의 빈틈을 파고들어 괴롭혔다. 결국 정인이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형. 승민이 형.

 

 

 

 "…내 힘들다."

 

 

 

 

 *

 

 

 

 

 운 좋게도 생각보다 빨리 알바를 구했다. 오피스텔이 밀집한 옆 동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였다. 수습이라고 최저 시급도 안 챙겨주면서 체력 뺏는 일이 은근히 많았다. 손님은 겨우 한 시간에 한 번꼴로 오는데, 쓰레기통 비우는 것부터 시작해서 창고에 쌓인 박스 정리하고 냉장 칸 선반에 재고 음료 채우고. 이것저것 하고 나면 몸이 금방 지쳤다. 밖은 이제야 해가 뜨는데, 반대로 정인의 눈은 자꾸만 감겼다. 그러다 손님이 들어오면 화악 끼쳐오는 바깥공기에 놀라 어영부영 몸을 일으켰다.

 

 삼다수 두 통. 옥수수수염차 한 통. 햇반 한 묶음. 2+1 행사 중인 컵밥 여섯 개. 계란 한 판. 그 외 등등. 퇴근까지 30분 앞두고 들어온 손님이었다. 아마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겠거니 정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나씩 바코드를 찍는데, 카드를 꺼내고 기다리던 손님이 별안간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모자챙 아래로 살짝 훔쳐보니, 온장고 안을 들여다보던 손님이 짧은 고민 끝에 캔커피 하나를 꺼내 왔다. 카드 먼저 받고 봉투를 잠깐 올려뒀더니 정인이 계산하는 동안 알아서 물건을 봉투에 담더랬다.

 

 

 

 "이거 드세요."

 

 

 

 온장고에서 갓 꺼내온 캔커피가 정인의 앞으로 슬그머니 밀어졌다. 뭐지, 나 피곤해 보이나. 알바하면서 눈을 왜 그렇게 뜨냐고 꼬투리 잡힌 적은 있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당황한 정인이 감사 인사도 꺼내기 전에 오만 원 이상 결제 시 서명해야 한다는 알림이 포스기에 떴다. 아… 사인해주셔야 되는데. 서명을 받는 동안 정인이 뜨끈한 커피를 제 쪽으로 슬그머니 가져왔다. 감사하다는 말을 꺼낼 참이었다. 근데, 포스기에 뜨는 사인이 이상하리만치 눈에 익었다. 받은 커피는 손에 단디 쥔 채 얼빠져 있는 사이에 손님이 수고하라는 인사와 함께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문틈 사이로 들어온 한기가 다시 한번 정인의 정신을 확 깨웠다.

 

 무작정 들입다 쫓아 나갔다. 정인이 그토록 찾던 이였다. 하마터면 코 앞에 두고 놓칠 뻔했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팔부터 잡아 돌려세웠다. 정인의 눈동자가 무참히 흔들렸다. 가슴이 철렁하도록 변한 구석이 많았다. 항상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검은 머리는 밝은 갈색으로 물들어서는 한층 길어져 그의 눈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제 나이보다 앳되었던 얼굴에서 이제는 성숙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렇다고 한들, 김승민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까먹기라도 할까 봐 '바름고등학교 김승민' 치면 나오는 몇 년 전 야구 경기 동영상들을 수없이 돌려보며 기억하려 애썼던 그 얼굴이 맞았다.

 

 

 

 "…형."

 

 

 

 형, 겨우 그거 한 번 불렀다고 정인의 턱 아래가 덜덜 떨려왔다. 3년 만에 듣는 형 소리가 얼떨떨한 건지, 저 못지않게 놀란 듯한 승민도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하고 싶었던 얘기가 많았다. 들어줄 사람이 없으니 혼자 속에 묻어두고 지냈던 것들. 어떻게 지냈는지, 아픈 데는 좀 어떤지, 내 얼굴은 인터넷에도 안 나오는데 보고 싶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더럭 울컥할 때도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매몰차게 가버리고는 연락 한 번이 없나. 만나자마자 멱살 잡고 따져야지 생각한 것도 있었다. 갈 거면 그냥 가지 그런 쪽지는 왜 두고 갔냐고. 분명 그랬는데. 막상 승민을 마주하고 처음 꺼낸 말은.

 

 

 

 "진짜 왜 이렇게 많이 변했나."

 "…."

 "형 왜 이렇게 많이 변했는데."

 "…정인아."

 "이렇게 딴 사람 돼서 내 진짜."

 "울지 말고."

 "내 진짜 형 기억 못 하기라도 했으면…."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말끝이 밀려온 울음에 쓸려갔다. 사무치도록 그리웠던 사람 앞에서는 모든 게 무용지물이었다. 상상하기도 싫었던 만약의 가정, 승민이 원하던 대로 정인이 승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일그러진 얼굴이 순식간에 눈물범벅이었다. 그걸 가만 보고 있다가, 바들바들 떠는 정인의 어깨 위로 승민은 겨우내 한 손을 올렸다. 봉투 들고 있던 왼손 대신 오른손이 정인의 어깨를 천천히 토닥였다. 울지 말라고, 달래주는 거였다. 제가 먼저 안아주질 못하니 그랬다.

 

 그러니 정인도 어디 가지 말라고 애끓는 것처럼 승민의 후드집업 밑단만 움켜쥔 채로 숨을 토해냈다. 그런 정인을 차마 보고만 있기 힘겨워서. 정인아, 형 안고 울어. 그제야 정인이 승민의 품을 파고들어 허리를 꽉 끌어안고 끅끅 서럽게도 울어댔다.

 

 

 제 품에 안긴 정인은 저와는 달리 변한 게 하나도 없어서. 지난날 승민을 버티게 했던 기억 그대로라. 그제야 승민은 다 부질없는 짓이었구나 생각한다.

 

 

 

 

 

 

김승민찾기

 

 

 

 

 

 

 열여덟 무렵 승민은 누나 지연과 함께 수정동으로 왔다. 집과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민이 정인네 학교로 전학을 온 건 동네에서 유일하게 야구부가 있는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서울서 야구로 이름 좀 날린 아라는 소문이 금방 동네에 돌았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1년 늦게 고등학교에 들어왔다는 것. 단정한 서울말을 쓰는 것. 사시사철 손에 야구공을 쥐고 있는 것까지. 승민은 여러모로 범상치 않았다. 특히나 등하교 할 때도, 급식 먹으면서도, 수업 중에도 빠짐없이 쥐고 있는 야구공이 자연스레 애들의 관심을 샀다. 뭔가 있어 보이는 거랑은 별개로, 그때까지만 해도 정인을 포함해 승민이 야구하는 걸 제대로 본 애가 없었으니까 그랬다. 야구부 훈련에서도 승민은 예외로 빠지는 일이 다분했다. 서울 아도 별거 없다이가, 그에 굳이 대응하기보다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것도 승민이 유별난 것 중 하나였다.

 

 

 우연히 짝이 됐다. 원래 정인과 같이 앉았던 애가 전학을 가는 바람에 줄곧 혼자 앉았던 승민이 자리를 당겨 앉게 된 거였다. 가까이서 보니 어디 모난 곳 없이 참 깔끔하게도 생겼네 싶었다. 정인은 아니고, 정인의 엄마가 좋아할 것 같았다. 오냐오냐 큰 도련님 같아서 영 맥도 못 출 것 같은데, 이 몸으로 야구를 한다고. 한 손에 야구공을 쥐었다 폈다 하는 걸 정인은 종종 곁눈질로 구경했다. 진짜로 촌놈들한테 무시당하기 싫어서 야구 잘 한다고 대포친 건가. 몰래 그런 생각을 하다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는 서울말에 정인이 티 나게 흠칫했다.

 

 

 

 "가져가서 봐."

 "어?"

 "계속 쳐다보길래."

 

 

 

 백날 천날 만지고 있길래 소중한 건 줄 알았더니. 이렇게 불쑥 넘겨주는 걸 보니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닌가 보다 했다. 앞으로 내밀어진 야구공을 정인이 조심스레 가져갔다. …이건 뭐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정인이 한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승엽 싸인. 평온하기 짝이 없는 승민의 말투와 최대치로 커진 정인의 눈이 대비를 이뤘다.

 

 이승엽 알아? 엄청, 엄청 유명한 사람… 아이가. 승민이 설핏 웃어 보였다. 얼핏 보고 비웃는 줄 알았더니, 다시 보니까 웃는 게 스스로도 버거워 보이더랬다. 끝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 정인은 홀린 듯이 시선을 두고 있었다.

 

 좋아하는 거면 주려고 했는데, 잘 모르나 보네. 야구에는 문외한이었다. 그제야 정인이 민망한 듯 목을 긁적이며 야구공을 도로 승민에게 내밀었다. 됐다, 형 해라. 그래도 제 손에 왔다 간 그 야구공이 너랑 얘기해보고 싶다는 신호였던 것 같아서. 다음에는 내가 먼저 말 걸어줘야지. 그렇게 싱겁게 말을 텄다.

 

 

 

 

 *

 

 

 

 

 "신기하데, 니 그 서울 아랑 얘기하는 거."

 "형이다."

 "맞나."

 "액면가는 니가 형이네."

 "장난하나, 그래서 니한테 뭐라 카는데."

 

 

 고상한 서울 도련님이랑 말 좀 텄다고 여기저기서 정인을 귀찮게 했다. 자기네들이 궁금한 걸 정인 더러 물어보라고 닦달했다. 왜 살기 좋은 서울 두고 수정동까지 내려왔는지. 왜 한 살 어린 놈들이랑 같이 학교 다니고 있는지. 야구도 안 할 거면서 야구부는 왜 들어갔는지. 사실 정인도 하릴없이 입이 근질거리긴 했다만. 처음 봤던 웃는 얼굴에 입꼬리가 자꾸 맘에 걸려서. 여차했다가 덜 아문 속을 쑤시게 될까 봐 조심 또 조심했다.

 

 입은 다물고, 손만 바삐 움직였다. 승민이 사투리를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 제 교과서 귀퉁이에 무슨 뜻인지 최대한 쉽게 적어서 옆 책상으로 밀어주고. 엎드려 잠든 승민이 쥐고 있던 야구공을 책상 아래로 떨어뜨리면 조용히 주워서 다시 손에 살짝 쥐여주고. 가끔 정인의 소리 없는 노력을 알아채고 승민이 옅게 웃으면 그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이제 좀 편하게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양정인 잘 받아라, 내 제대로 함 던져본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정인의 교복 바지 위로 우유가 뚝뚝 떨어졌다. 바지에 밸 우유 냄새 따위를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제 얼굴 앞에 불쑥 나타난 승민의 손에 정신이 빠졌다 이내 돌아왔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교실의 정적을 가르고, 승민이 손에 잡힌 우유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조심해, 얘 얼굴 맞을 뻔했잖아. 희봉이 미안하다며 갖다 준 두루마리 휴지로 승민은 손을, 정인은 허벅지 위를 슥슥 닦았다.

 

 

 

 "바지 계속 입고 있게?"

 "그럼 벗고 있나."

 "체육복 바지 없어?"

 "없다, 어제 집 가져가서 빨았다."

 "내 거 빌려줄게, 갈아입어."

 

 

 

 바지를 갈아입고 나오니, 세면대에서 승민이 손을 씻고 있었다. 아까 어쨌더라.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라 기억도 잘 안 났다. 희봉이 무식하게 던진 우유가 정인의 얼굴로 날아오는 걸 옆에 있던 승민이 순식간에 잡아챈 게 끝이었다. 야구의 이응 자도 모르는 희봉이가 속구를 던졌을 리는 없고. 아마 승민이 하도 세게 잡는 바람에 우유가 터진 모양이었다. 손을 가볍게 털며 나가려는 승민을 정인이 붙잡아 세웠다. 형 손은 괘안나. 물기가 남은 승민의 오른 손목을 잡고 들여다보니 군데군데 굳은 살이 박여 있었다.

 

 

 

 "…야구 잘했다는 거 진짠가보네."

 "궁금해?"

 "엉?"

 "나 야구 잘하는지."

 "그야 얘기만 듣고, 한 번도 본 적 없으니까는."

 "나 야구하는 거 보고 싶어?"

 "보고 싶다 하면 보여주나."

 "…생각 좀 해보고."

 

 

 

 얼마 안 가 승민은 부산시 고교 야구 대회 예선전을 앞두고 첫 정식 훈련에 들어갔다. 포지션은 투수랬다. 정인의 눈에 승민이 하는 거라고는 공 던지는 게 다인데, 아는 건 없어도 제일 잘하는 것 같더랬다. 얼굴이 보여야 되는데. 촌스러운 야구부 모자에 가려져 승민의 얼굴이 반쯤 가려진 게 퍽 아쉬웠다. 며칠간은 내내 미스터리였던 승민의 야구 실력에 동네가 술렁였다. 우리동네 야구스타 하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고. 비록 얼마 안 가 흥미들이 떨어졌지만, 정인만큼은 착실하게 승민을 지켜봤다. 룰도 뭣도 모르지만, 승민이 처음으로 제게 보여주는 거니까. 한 개도 안 놓치고 다 눈에 담고 싶었다.

 

 방과 후 훈련이 끝나면 종종 승민의 집에 놀러 가곤 했다. 승민에게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건 눈치껏 알게 됐다. 하나 있는 누나인 지연이 저를 예뻐했다. 정인이 덕분에 승민이가 다시 야구한다고. 그러면 승민은 그게 무슨 얘 때문이냐고 민망한 듯 목 부근을 주무르며 정인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승엽 싸인볼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승민은 야구공 쥐었다 폈다 하던 손으로 정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사내놈들끼리 손잡는 거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는데, 그거랑은 달랐다. 낯 대신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떨리나."

 

 

 

 첫 경기를 앞둔 날. 정인이 물어도 승민은 묵묵부답이었다. 애꿎은 정인의 손만 하염없이 만지작거리며 괴롭히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긴장한 게 다 티 났다. 서울 살 때는 전국 대회에서도 잘만 이겼다더니, 그에 비하면 쨉도 안되는 부산 바닥에서 치고받는 건데 뭐 그리 떨리는지. 양반다리 하고 앉은 정인이 친히 고개까지 기울여 승민과 눈을 맞췄다.

 

 김승미니. 왜 양정이니. 형 와 떠는데. 못할까 봐 그러지. 그거 좀 못해도 된다, 죽는 것도 아니고. 그런가. 그래도 잘하면 더 좋고. 한 박 늦게 말을 덧붙이며 장난스럽게 히히 웃는 정인에게 승민이 슬그머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럼 잘하고 올게."

 "그래라."

 "잘하고 오면."

 "잘하고 오면? 뭐 해주까."

 "우리 사귀자."

 "…사겨?"

 "약속한 거야."

 

 

 승민의 활약이 돋보인 깔끔한 승리였다. 겨우 한 경기만에 몇몇 인터넷 기사에는 승민의 투구 사진과 함께 신예 야구 유망주라며 김승민 이름 세 자가 거론되기도 했다. 보란 듯이 잘할 거면서. 정인이 제 고백에 거절 못 하도록 엄살 부린 거다. 눈이 빠져라 검색창 새로 고침 하고 있는데, 승민에게 전화가 왔다. 탈의실인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옷도 채 갈아입지 않고 연락부터 하는 걸 보면, 승민은 안 그럴 것 같으면서 정인에게만 미련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승민에게 마음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더랬다.

 

 

 -뭐 하고 있었어?

 "사람들이 형 잘했대."

 -약속 지켜라 양정인~

 "근데 그러믄 뭐가 달라지는데."

 -왜? 싫어?

 "아니, 내 누구 사겨보고 이런 거 안 해봐서… 잘 몰라."

 -그냥.

 

 

 앞으로 내가 공 던질 때마다 정인이 너 생각 하게 되는 거야. 아…. 별로야? 아니… 그건 원래 하는 거 아이가.

 

 

 

 

 

 *

 

 

 

 

 

 부산시 고교 야구 대회 MVP 바름고등학교 2학년 김승민. 당분간은 끊이질 않는 러브콜에 정신없었다.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기 시작하면서 서울-부산을 왔다 갔다 하는 날들이 잦아졌다. 한 번은 주말에 정인과 단둘이 서울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잠깐만 정인아. 승민이 지갑을 꺼내려고 맞잡고 있던 손을 잠깐 풀자, 정인이 부리나케 승민의 야구 잠바 팔꿈치 부분을 잡아왔다. 돌아본 정인의 까만 눈에 낯선 곳에 대한 경계심이 가득했다. 잠시간 멍하니 있던 승민이 지갑을 꺼내자마자 도로 정인의 손을 꽉 힘주어 잡았다.

 

 

 

 "사람 많지."

 "엉. 내 혼자는 무서워서 서울 다시 못 오겠다."

 "뭐가 무서워, 나 있는데."

 

 

 

 훈련받는 동안은 주변 구경 좀 하고 와도 된다는 코치의 말에도 정인은 그날 하루 종일 훈련장에 붙박이로 앉아만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급해졌는지 승민은 몇 번이고 평소에 안 하던 실수를 했다. 승민아, 너 그렇게 던지면 이번에는 진짜 손목 나간다고 했냐 안 했냐. 코치의 불호령에도 승민의 온 신경은 들어올 때 그대로 가방을 메고 앉아 있는 정인에게로 쏠려 있었다.

 

 

 돌아가는 기차에 타고서야 정인의 안색이 한층 밝아졌다. 미안, 오늘 피곤했겠다. 미안할 것도 많다, 미안하면 싸인 하나만 해주던가. 무슨 싸인? 엄마가 싸인 받아다 달라캐서, 내보다 형을 더 좋아해. 삐죽대는 그 입술에 승민은 참지 못하고 제 입술을 몇 번이고 갖다 눌렀다. 당연한 수순으로 이 싸람이 미쳤나 하고 옆구리에 꽂히는 정인의 주먹이 한 개도 안 아팠다. 백 장도 더 해줄게. 형 싸인은 있나.

 

 

 그날 기차 안에서 정인이 제 손바닥에 대고 만들어준 싸인을, 승민은 아껴뒀다 쓸 생각이었다. 나중에 정인이가 좋아할 만큼 이승엽처럼 유명해지면, 그 때가 되면.

 

 

 

 

 "김승민, 너 정인이 좋아하지."

 "…."

 

 

 다 큰 것 같다가도. 지연은 이럴 때면 승민이 다 크려면 한참 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섯 살이나 어린 동생은 숨기는 게 서툴렀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 장례식에서도, 같은 사고로 다친 승민이 앞으로 야구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도. 승민은 괜찮은 척했지만, 그게 그렇게 서투를 수가 없었다. 지연이 일부러 엎어둔 가족사진이 다시 제대로 세워진 채로 놓여 있고, 나갈 채비를 하다가도 옷장에 걸린 야구부 유니폼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는 승민을 볼 때면 언제든지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승민이 여느 때와 같던 저녁 식사 도중에 담담하게 야구 다시 해보겠다고 말했을 때. 지연은 얼떨떨한 채로 입술만 달싹이다 '그럴래?' 물어본 게 다였다. 승민이 야구를 다시 시작한 게 다름 아닌 또래 남자애 때문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재활치료 때문에 1년이 넘게 쉰 야구를 다시 시작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는 정인이건만, 승민은 다시 전처럼 열심이었다. 걱정과 달리 승민은 자신의 바뀐 역할에 차츰 적응해갔고, 옆에는 항상 정인이 있었다. 승민이 씻으러 간 사이에 조용히 누나 하고 저를 불러내, 그때 누나가 같이 가자고 했던 승민이 형 경기 아무래도 못 갈 것 같다고, 혹시 지기라도 하면 자기가 너무 속상할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 거듭 말하던 정인을 미워하기란 어려웠다.

 

 

 

 "정인이도 너 좋대?"

 "걔 오면 괜히 그런 거 물어보지 마."

 "그러니까 너가 대답하면 되잖아, 좋대?"

 "그런 얘기 해본 적 없어."

 "너 혼자만 좋다고 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매력 없다."

 

 

 

 별달리 대꾸가 없었다. 열아홉이나 돼서 징그럽게 삐지면 가끔 저렇게 입을 닫았다. 어지간히 좋나 보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지연에게 조용하던 승민이 되물어왔다. 그래 보여? 그래 보이면 뭐, 정인이한테 쪼르르 가서 이르게? …더 많이 좋아할 수도 있지, 매력 없을 것까지 있냐. 승민이 답지 않게 툴툴대며 소파에서 일어나 벙찐 지연을 지나쳤다.

 

 누가 뭐래도 승민은 제 모든 감정이 정인에게 온전히 닿았으면 했다. 제 진심이 조금이라도 덜 전해질까 그게 무서웠다. 정인의 마음이야 은연중에 알게 모르게 다 알고 있었지만, 그 크기가 비교적 작든 어떻든 상관없었다. 방으로 향하는 승민의 등에 대고 지연이 당부하듯 말했다. 너 너무 무리하지 마, 야구든 뭐든.

 

 

 

 

 

 *

 

 

 

 

 "승민아, 든든히 무라."

 "감사합니다."

 "차암 잘생깃네."

 "고마 하고 밥 먹어요."

 

 

 

 이제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했다. 형 우리 집 올래? 쭈뼛거리며 떠보길래 마다할 이유가 없어 따라갔건만, 정인네 식구가 다 같이 모여 승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이것도 내심 좋았다. 승민에게 쏟아지는 질문을 제가 대신 답하느라 바쁜 정인은 근래 본 것들 중 가장 사랑스러웠다. 정신없는 틈을 타 정인의 밥그릇에 고기 한 점 올리고 모른 척하는 승민에게 정인의 엄마가 재차 물어왔다.

 

 

 

 "승민이네 부모님은 아들을 우째 이리 잘 키우셨나."

 "아 무슨 그런 걸 물어보는데. 이제 진짜 고마 해라."

 

 

 

 승민이는 가만히 있는데 왜 인이 네가 더 호들갑이냐고 정인의 엄마가 한소리를 했다. 정말 그랬다. 난처한 질문을 받은 건 승민인데, 오히려 옆에 있던 정인이 더 당황해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반응을 보니 정인도 승민의 부모님이 안 계신 걸 언젠가부터 눈치채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에 대해 제게 물어보기는커녕 안다고 티 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승민조차도 몰랐던 부분이었다. 밥그릇을 비우는 내내 머릿속이 멍했다. 옆에서 정인이 팔꿈치로 승민을 툭 쳤다. 형 밥 더 먹을래? 그렇게 물어오는 정인의 밥그릇은 아직 반도 넘게 차있었다.

 

 

 

 그날 밤에는 정인의 방에서 같이 잤다. 승민에게 제 침대를 내어주고 정인은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침대 끄트머리에 엎드려 누워 있던 승민이 팔을 아래로 내려 정인의 손을 찾았다. 정인이 눈 감은 채로 물었다. 잠 안 오나.

 

 

 

 "정인아."

 "엉."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 없어?"

 

 

 

 그제야 슬며시 눈을 뜬 정인이 어둠 속에서 시선을 어렴풋이 맞춰왔다. 듣고 싶은 거라도 있나. 그냥 아무 얘기나. 뚱딴지같은 질문에 정인이 제법 심각하게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내 망설이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승민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정인의 손등을 엄지로 조심스레 매만지며.

 

 …형 좋다. 응? 내, 형 좋다고. 뜻밖의 사랑고백에 순식간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틈새 공격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느새 정인 때문에 웃는 게 당연한 일이 됐다. 정말이지 사람을 들었다 놨다. 이 역시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만, 좋았다. 승민은 정인이 정말 좋았다.

 

 

 

 "정인아."

 "왜 자꾸 불러, 이 사람아."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그냥 해도 돼."

 "갑자기 뭔…."

 "숨기지 말고, 혼자 속에 묻어두지 말고."

 "…."

 "알았지?"

 "알았다, 그럼 내 지금 하나 말해도 돼?"

 "뭔데?"

 "…형이랑 침대에서 같이 자도 되나."

 

 

 

 승민은 말없이 팔을 끌어당겼다. 1인용 침대에 마주 보고 누워 정인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어렸을 때 몽유병이 있었다고 했다. 자다가 갑자기 내가 나갔대. 엄마가 놀래서 내 잡아오니까 내가 '엄마가 아이스크림 사 오라고 했잖아요' 캤대. 내 무섭지. 그렇게 물어오는 정인의 머리통을 감싸 안고 승민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아니이. 안 무서운데. 하나도 안 무섭고, 좋기만 해.

 

 

 

 

 

 *

 

 

 

 

 

 연이은 야구 경기에 승민의 오른 손목이 심상치 않은 낌새를 보였다. 야구를 다시 시작한다고 했을 때부터 감수해야 했던 건데도 이제 와서 겁이 덜컥 났다. 전문의의 말에 훈련도 대폭 줄였다. 자연스레 투구 정확도가 눈에 띄게 떨어지고, 공이 자꾸만 제 맘이랑은 다르게 던져졌다. 이전에 느꼈던 불안함을 알기에 더 초조했다. 정인은 괜찮다고, 천천히 하면 된다고 했는데, 승민은 그렇게 천천히 가다가는 영영 멈춰버릴 것 같았다. 말과는 달리 잘못 날아간 공에 저 멀리서 고개 푹 숙이고 저보다 더 속상해하는 정인을 보며, 승민은 처음으로 제 운명을 원망했다.

 

 

 전국 대회 본선이 코앞이었다. 승민을 눈여겨보고 있는 구단 스카우터들보다 처음으로 승민의 경기를 보러 오는 정인이 승민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었다. 정인이 있는 한 어떻게든 끈질기게 버텨보고 싶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정인이 생일 선물이라고 웬 손목 보호대를 내밀었다. 분명히 형 생일까지 온다고 했는데, 계속 지연돼서… 늦어서 미안. 그걸 차고 안 보이는 데서 수없이 공을 던졌다. 정인이 속상해하지 않도록 잘할 수 있을 때까지. 야구든 뭐든 무리하지 말라는 지연의 말이 떠오르는 걸 애써 무시했다.

 

 

 

 대회 당일. 겨우 2회말 만에 승민을 대신해 구원투수가 투입됐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정인은 승민이 병원을 다녀올 때까지 경기장 앞에서 꿋꿋이 혼자 기다렸다. 그 큰 경기장 앞에 서있으니 제가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지연의 부축을 받고 돌아온 승민은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초점 없는 눈을 깜빡이기만 하는 승민의 손목이 부은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정인도 말이 없었다. 그저 얼마나 아플지 가늠조차 안되는 승민의 치부를 제 손으로 감싸 쥔 채 걷기만 했다. 승민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보지 말라는 듯이.

 

 

 

 그날 밤 제 집으로 돌아갔던 정인은 새벽에 승민을 찾아왔다. 영락없는 잠옷 차림이었다. 놀란 승민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인은 무작정 승민을 껴안았다. 품으로 파고든 정인은 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추운 줄 알고 제 겉옷이라도 덮어주려는 승민에게 정인이 예고도 없이 토해내듯 말했다. 형, 내 무섭다… 내 진짜 무섭다…. 정인은 무서워서, 겁먹어서 떨고 있는 거였다. 자칫 승민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승민을 너무 좋아하는 제 마음이 이렇게 만든 걸까 봐.

 

 

 다음 날 정인은 제가 승민을 찾아갔던 걸 기억하지 못했다. 몽유병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렇게. 맞나. 승민의 맨 팔을 붙잡고 테이프를 감는 손의 움직임이 꽤 자연스러웠다. 갑자기 손목 테이핑을 해주겠다고 나서더니, 정인이 승민의 소매를 차곡차곡 걷어냈다.

 

 

 

 "이런 건 또 언제 배웠대."

 "그냥, 혼자 있을 때."

 

 

 

 혼자 있을 때는 숨 좀 돌리지. 승민이 다른 손으로 반질반질한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정인에게는 들리지 않을 물음이 승민의 속을 어지럽혔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았다. 저도, 정인도. 이미 어린 가슴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를 담고 있었다. 이렇게 좋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바람에 생긴 생채기들이 이미 한가득이었다. 정인아. 집중하느라 아래로 깔려 있던 촘촘한 속눈썹이 들리면서 정인의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왜 그러냐는 듯한 눈. 형도 너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 승민이 한참동안 말을 골랐다.

 

 

 

 "형."

 "어?"

 "밖에 눈 온다."

 

 

 

 테이핑을 끝낸 정인이 이내 승민의 손을 사이에 끼고 제 두 손을 기도하듯 겹쳐 모았다. 정인의 코 끝에 승민의 손 끝이 살포시 닿았다. 이 사람 많이 웃게 해주세요. 여유 되시면 내도 같이요. 소소하지 만은 않은 소원을 속으로 되뇌이는 정인의 입술 위로 별안간 말캉한 감촉이 느껴졌다. 푸스스 웃으며 뒤로 얼굴을 빼는 정인을 승민이 손에 힘을 주고 제 쪽으로 끌어 당겼다. 저항 없이 끌려온 정인의 눈에 웃느라 눈이 정갈하게 접힌 승민이 고스란히 비쳤다. 처음 봤을 때랑 다르게 입꼬리가 빙글 올라가 있어서 괜히 속이 뭉클했다. 이렇게 웃는 게 예쁜 사람이라. 그냥 딱 지금처럼만요.

 

 

 

 정인이 열아홉을 앞둔 겨울. 승민은 하루 아침에 수정동을 떠났다. 정인의 집 우편함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제 싸인볼을 남겨두고. '정인아 나 기억하지 마', 평생토록 기억에 박혀 가슴 저릴 말을 남겨두고. 이번만큼은 처음으로 정인에게 제 마음이 닿지 않기를 바랐다.

 

 그 해는 하늘이 여유가 없었나보다.

 

 

 

 

 *

 

 

 

 

 빨갛게 충혈된 눈이 졸음과 사투를 벌이는 모양새가 안쓰러웠다.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승민이 정인의 앞에 놓여 있던 밥그릇을 옆으로 치웠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다시금 힘겹게 눈을 뜬 정인에게 승민이 말했다. 그만 먹고 들어가서 좀 자. 싫어. 또 5분도 안 돼서 밥도 못 씹고 꾸벅꾸벅 졸 거면서 괜한 고집을 부렸다. 승민이 치운 밥그릇을 정인이 제 앞으로 소리 내 끌고 왔다.

 

 

 

 "…알았어."

 "…."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뭐라고 안할게."

 "…왜 그렇게 말하는데."

 

 

 

 아까까지 눈물 콧물 한바탕 빼놓고. 돌연 또다시 속상한 얼굴을 했다. 아랫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승민의 품에 몸 구겨 넣고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더니, 지금은 지 밥그릇 뺏는다고 울어대는 고양이처럼 날을 세웠다. 그래도 그게 아주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닌지라 승민은 휴지부터 찾으러 일어섰다. 벌써부터 정인이 얼굴 부을 걸 속으로 걱정하며. 정인이 그런 승민의 소매 끄트머리를 잡아왔다. 언젠가 팔꿈치 위로 야구 잠바를 붙잡았던 것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정인의 손끝에 깃든 감정은 똑같았다.

 

 

 

 "형 찾겠다고 보러 다닌 야구 경기가 몇 갠 줄이나 아나."

 "야구장만 가면 형이 있을 줄 알았어?"

 "나 무서워서 못 자, 꿈이면 어쩌라고."

 

 

 

 언제 한 번 승민의 방에서 공포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눈도 못 뜨고 괴로워하는 승민을 보며 신명 나게 놀려대더니. 방문 뒤에 안 보이게 세워져 있던 승민의 야구 배트를 들고 귀신 나오면 제가 다 패주겠다던 정인은. 알고 보면 무서운 게 많았다. 낯선 사람 많은 서울도 무섭고, 자기 때문에 승민이 다치는 것도 무섭고, 승민이 또 사라질까 무섭고.

 

 그런데도 여즉 그 무서운 걸 다 참고 버틴 거다. 무섭다던 서울도 혼자 올라왔고, 저보다도 다친 승민이 더 무섭겠거니 별말 없이 집까지 데려다줬고, 또 저를 두고 사라질지도 모를 승민을 먼저 찾아내고. 공포영화보다 몇 백 배는 더 무서웠을 텐데. 미안한 마음에 승민이 손을 뻗어 정인의 마른 뺨을 어루만지다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이거 봐, 꿈 아니지."

 "…한 개도 안 아픈데."

 "어디 안 갈게. 좀만 자자."

 "…."

 "씻고 나와, 형 옷 줄게."

 

 

 

 따뜻한 물로 노곤해진 몸이 침대 위로 눕혀지니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눈이 스르르 감기려는 찰나에 정인이 푹 잠긴 목소리로 승민을 불렀다. 침대 아래에 걸터 앉은 승민이 응? 대답하니, 대뜸 '손' 했다. 속된 말로 강아지 취급이었다. 이불 밖으로 빼꼼 보이는 손 위로 승민이 군말 없이 제 손을 올리니 깍지를 단단히도 껴왔다.

 

 

 옅은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주변이 조용해졌다. 정인이 깰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심산으로 승민은 작은 인기척도 내질 않았다. 그제야 죄다 꿈같더랬다. 다시는 쓸 일 없을 줄 알았던 오른손으로 정인의 손을 잡고 있는 지금이. 꿈이 아니라고 일러주기라도 하듯 정인이 몸을 뒤척이면서 이불끼리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승민은 한 손이 결박된 채로 곤히 잠든 정인을 들여다보고는 다시 하염없이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형."

 

 

 

 깬 줄 알고, 좀 더 자라고 이불을 고쳐 덮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들여다본 정인은 평온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가슴팍 말고는 몸에 미동이 없었다. 꼭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승민의 손이 멈칫했다.

 

 

 

 "왜 그렇게 갔어."

 "…."

 "많이 힘들었나."

 

 

 

 승민만이 알고 있는 그날 새벽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내 옆에서 정인이 너 무서워하는 거 다 보이는데."

 "…."

 "난 아무 얘기도 못 들어주는 거."

 "건 또 어떻게 알았대…."

 

 

 

 내로라하는 야구선수가 되는 게 오랜 꿈이었다. 그렇게 믿어왔던 꿈이 한순간에 무너지면 화가 날 줄 알았는데. 탓할 곳도 없으니 제 운명이 그렇다고 잠자코 수용하는 수밖에 없더랬다. 주변에서는 목숨 부지한 게 다행이라고 하니, 그렇다 생각하고 살아야겠거니 했다. 다만 그 허탈한 상실감은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가지지 않으면 잃을 것도 없으니, 차라리 아무 것도 내 것이 아닌 채로 살아가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줄 알았는데, 경계조차 흐릿해진 승민의 범주에 꿋꿋이 자리잡은 정인을 욕심내지 않기란 참으로 어렵더랬다. 얼마든지 나가도 되는데 승민을 혼자 두지 않겠다고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보니 정인이 있는 곳이 곧 승민의 범주가 됐다. 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내가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살면서 해본 게 야구 야구 야구 뿐이라, 그 방법에 선택권이 없었다.

 

 

 형 야구하는 거 보고 싶다는 정인을 위해 다시 야구를 시작했다. 단순 우승 레코드보다도 저 때문에 기뻐하는 정인의 얼굴이 더 욕심났다. 미련하게도 공 던질 때마다 정인을 생각하면 저릿한 손목도 버틸 만했다. 저는 그랬는데.

 

 그날 새벽, 정인은 아닌 것 같았다. 잃을 게 생기면 없던 겁도 생기는 게 사람인지라. 정인이 하나도 못 지킬 만큼 약한 주제에 버티기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게 다였다. 제 범주에서 정인을 빼내는 것. 그게 다인 줄 알았다.

 

 

 

 "근데 내는… 내 옆에 형 없는 게 훨배 무섭더라."

 

 

 

 결국 다 부질없는 짓이었구나 싶었다. 승민이 전처럼 정인의 손등을 엄지로 부드러이 문질렀다. 무섭지 말라고. 너는 이거 다 기억 못 하겠지만. 전처럼 이렇게 만져주면 조금 덜 무섭지 않으려나.

 

 

 

 "형 찾게 해서 미안."

 "…."

 "이제 안 그럴게."

 

 

 

 깍지 낀 채로 손등을 문지르던 승민의 엄지 위로 정인의 엄지가 슬며시 올라왔다. 그만 하면 됐다는 듯이. 그리고는.

 

 

 

 "내 이거 다 기억한다."

 

 

 

 하나도 변한 게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

 

 

 

 

 재회와 동시에 승민에게 신세 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건만, 결국 정인은 승민의 오피스텔로 들어왔다. 어찌 보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정인이 지내는 고시텔에 갔다가 한참 동안 정인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승민 때문이었다. 동정하라고 데려온 거 아닌데. 그렇게 말했지만, 동정이 아니라는 걸 정인도 알았다. 엄청 미안해하네. 물론 인사도 없이 가버린 건 승민의 잘못이지만, 정인이 저 찾겠다고 서울 올라와서 고생할 거 알았으면 그렇게 안 했을 거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미안해해도 되는데. 정인의 사랑이 승민의 면죄부가 되어주는 거다.

 

 승민의 사인이 그려진 야구공까지 해서 얼마 없는 짐 들고 나오는 길에 보니, 당구장 위 야구 연습장이 문을 닫은 모양이었다. 나 얼마 전에 저기서 야구해봤는데. 같은 곳을 올려다본 승민이 다시 시선을 정인의 옆모습으로 고정시켰다. 몇 개 쳤어? …기억 안 나는데. 하나도 못 쳤구만. 정곡을 찔린 정인이 입을 꾹 다무니 승민이 샐쭉 웃었다.

 

 

 

 "그래서 내 생각 했어?"

 "엉."

 "공 칠 때마다 김승민 나쁜놈 했어?"

 "그것도 하고."

 "응."

 "이렇게 어려운 걸 형은 어떻게 그렇게 잘했나 했지."

 

 

 

 왼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잠시 내려놓은 승민이 정인의 패딩을 여며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형 이제 야구 못해. 마주한 정인이 눈 하나 깜짝 않고 대꾸했다. 누가 지금 잘한댔나. 빨개진 볼로 승민의 손이 옮겨갔다. 그래도 괜찮아? 한 치의 망설임도 필요 없는 질문에 못나게 뭉개진 얼굴의 정인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춥다니까 왜 저래. 퉁퉁 부은 얼굴 뭐 보여줄 게 있다고 후드 뒤집어쓰고 나와서 편의점 앞에서 덜덜거리는 게 여간 마음이 쓰였다. 보다 못해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해도 기어이 고집을 부렸다. 결국 새 일자리 구하는 즉시 편의점 야간 알바 그만 두기로 상호 간 합의를 봤다. 이제 수습 기간 끝나서 시급 좀 제대로 받나 했더니. 사람들 다 자는 시간에 나가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는지 보는 양정인 찔리라고 저렇게 아침마다 나와서 기다렸다.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다. 승민이 어디 안 가고 저를 기다리는 게.

 

 

 

 "무겁나."

 "별로."

 "손을 벌벌 떠는데. 무거우면 주던가."

 "집 다 왔는데 뭘."

 

 

 

 겨우 삼다수 두 통 담은 봉지를 든 승민의 손이 덜덜거렸다. 잠 덜 깨서 추워서 그런갑다 했다. 씻고 나와서 마주 보고 아침 먹는데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거다. 국 한 숟갈 뜨려던 정인이 멈칫하더니 의아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형 왜 왼손으로 먹어?"

 "어?"

 

 

 

 마주친 눈을 곧바로 내리 까는 승민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불현듯 불안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정인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인아. 다급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승민의 옆으로 섰다. 식탁 아래, 허벅지 위에 올려진 승민의 오른손. 삼다수 두 통 그거 좀 들었다고. 아까부터 여태껏 덜덜거리고 있었다. 전에는 야구 배트도 잘만 휘둘렀다는 사람이. 정인의 위태로운 시선이 그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뭐 좋은 거라고 그렇게 봐."

 "…."

 "밥 먹자, 응?"

 

 

 

 승민이 오른손을 슬그머니 뒤로 감추며, 정인을 도로 앉히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좀 화가 나더랬다. 일언반구 없이 떠났을 때도 이렇게 화나진 않았는데. 그거 형 손이잖아. 속이 상해서, 정인이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천천히 문질렀다. 거기에 승민은 또 미안하고 걱정하는 눈을 하는 거다. 그렇게 미련하게 내 생각만 하다가 형은 이렇게 망가져놓고, 또. 많이 바뀐 줄 알았건만, 왜 이런 건 그대로인지.

 

 

 

 "형 이래서,"

 "…."

 "이래서 내한테 기억하지 말라고 한 거가."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닌데, 형 손 그거…."

 

 

 

 분한 마음에 참지 못한 닭똥 같은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처음으로 화나고 분했다. 형한테도, 형이 가지고 태어난 운명한테도. 아무리 여유가 없어도 이 사람은 웃게 좀 해주지. 또 웃는 법 다 까먹었겠네.

 

 

 병원에서는 재활 치료를 한다 해도 오른손이 제 기능을 완전히 되찾기는 어려울 거라고 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이 어린 게 왜 말도 못하고 참았냐고. 결국 정인이 알게 되면 다 본인 탓이라고 할까 봐, 승민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 죄 없는 제 마음을 탓할까 봐. 정인이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에 그랬다. '정인아 나 기억하지 마.'

 

 떠나는 날 새벽, 겨우 그 아홉 자 써놓고 승민은 방에서 한참을 울었다. 사실 그게 승민의 모든 진심은 아니어서. 정인이가 정말 저 밉다고 기억 안 해줄까 봐. 그토록 알아줬으면 했던 제 마음까지 다 거짓이었다고 생각할까 봐. 무섭고 겁났다. 공포영화보다 몇 백 배는 더.

 

 그래서 야구공에 삐뚤삐뚤 서툴게 그렸다. 그냥 싸인이 아니라 저를 기억해줬으면 하는 이기적이고 솔직한 제 마음을. 한 줄 찍 긋고, 울고, 또 한 줄 찍 긋고, 울고. 정인은 제게 해준 게 많았는데, 이 싸인도 정인이가 만들어준 거였는데. 돌아보니 저는 웃게 해준 기억조차 몇 안 돼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싸인이 엉망이었다.

 

 

 

 "내 보고는 다 말하랬잖아."

 "…."

 "형은 힘들다고 아프다고 한 마디도 안 했으면서."

 "형은 진짜 괜찮았는데."

 "이게."

 "…."

 "이게 괜찮았다는 사람 얼굴이냐."

 

 

 

 대포 까면 누가 모를 줄 아나. 정인의 뜨끈한 손에 조심스레 잡힌 승민의 눈시울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순식간에 승민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정인의 손바닥 사이로 스며들었다. 한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앞서 흐른 눈물이 터놓은 길을 따라 뚝뚝 흘렀다. 정인에게 우는 걸 보이기 싫은지 자꾸만 고개를 떨구길래. 정인은 승민의 목을 감싸 안았다. 알았다, 내 안 본다. 그제야 승민이 정인의 어깨에 얼굴을 푹 묻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괜찮았다는 거 죄다 순 거짓말이다. 부모님이 네 목숨 살리신 거라는 주변 어른들의 말도, 낙인 같기만 하던 오른 손목의 통증도, 정인을 두고 올라온 서울도. 단 한 개도 괜찮지 않았다. 승민이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몸을 떨었다. 덩달아 먹먹해진 목소리도 떨려왔다.

 

 

 

 "손도 계속 아프고."

 "응."

 "정인이 너 얼굴 까먹을까 봐 무섭고."

 "응."

 "그래서 힘들었어. 미안해."

 

 

 

 예나 지금이나 미안할 것도 많다. 그릇에 덜은 국이 다 식을 때까지 울었다. 참 멀리도 돌아왔다 싶었다. 결국 맘 놓고 울 곳이 서로밖에 없는데. 겨우내 울음을 그치고 마주 앉은 정인이 승민의 오른손을 만지고 또 만졌다. 다시는 혼자 안 냅둔다. 형 혼자 절대 안 내비둘 거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길래 승민이 코를 훌쩍이며 설핏 웃었다.

 

 

 

 "정인아, 형 이제 진짜로 야구 못하는데."

 "…."

 "그래도 괜찮아?"

 "못해도 된다고 했잖어."

 

 

 

 김승미니. 왜 양정이니. 형 와 떠는데. 못할까 봐 그러지. 그거 좀 못해도 된다, 죽는 것도 아니고. 그런가.

 

 

 

 모든 기억은 저마다 수명이 있고, 언젠가는 사라진다.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기억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순적이게도 누군가를 평생 기억하고 싶어한다. 본인들조차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수많은 기억 속에서 '김승민'을 찾으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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