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2019. 11. 30. 23:30

 

 

 

 

아 쫌. 귀찮게 하지 마라.

 

 

좋아서 그런 건데. 바둥바둥 밀어내는 손이 영 진심 같아서 괜히 서운하다. 알겠어. 안 할게. 목소리 축 늘어지게 까니 정인이 또 눈을 흘긴다. 또 그런다 또. 형 자꾸 삐진 척하면. 어? 내가. 어? 아 왜. 너 싫대서 지금 내가 안 하잖아. 근데 신경쓰이게 하잖아. 과제하는데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것도 못 참냐? 삐죽삐죽 눈은 사나운데 몸은 가깝다. 아 쫌. 삐지지 좀 말라고. 승민의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알겠어. 귀찮게 안 할게. 안고만 있을게. 그건 괜찮지?

맘대로 해라. 나쁜 형아야.

 

결국 승민이 또 이겼다. 제 좋을 대로 와락 껴안고 싱글대는 걸 무시하고 과제에 열중했다. 아 정인아 그거 계산 잘못했는데. 아 훔쳐보지마. 내가 알아서 해. 쫌. 아니 형이 걱정해서 그러지. 아 쫌. 알아서 한다고. 쫌만 고칠게. 잠깐만 줘봐. 아. 진짜.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들 했다. 그럼 내가 더 좋아해서 맨날 지는 건가. 김승민은 져주는 척 하면서 맨날 이겨먹는다. 승민은 귀엽다 좋아한다 귀찮게나 굴지. 그렇게 생각하니 고백도 정인이 먼저 했다. 귀엽다 귀엽다 말만 하지. 사람 헷갈리게 다정하면서 도통 사귀자는 말은 안 해서. 형 나 갖고 장난하나? 왜 사귀자고 안 하는데. 협박하듯 멱살 잡고 물었더니 웃었다. 그쯤 생각하고 나니 궁금해지는 거다.

 

이 형 나 진짜 좋아하는 건 맞나?

 

멱살 잡고 따지는데도 웃길래. 정인아 우리 밥 먹으러 갈래? 너 파스타 먹고 싶다며. 자연스럽게 손을 잡길래. 형 그래서 우리 사귀는 거야 뭐야. 그러니까 뽀뽀하자고 입술을 들이밀길래. 사귀는 건가 싶었는데. 달라진 게 없다. 김승민은 그 전에도 다정했고 뽀뽀하길 좋아했고. 치대는 걸 좋아했고. 귀엽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하도 다정하게 굴기에. 저 좋아하는 줄 알고 사귀자고 했고. 알았다고 한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찝찝하지. 그런 마음에서 한마디 툭 던졌다. 형아. 어.

 

 

내 어디가 좋냐?

너?

 

 

눈을 꿈뻑꿈뻑. 뭐야.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나. 너 왜 그런 걸 묻냐는 눈초리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니 정인이는 귀엽지. 그랬다. 끝? 갑자기 왜 그런 게 궁금해졌는데? 예상 못 했던 대답은 아닌데. 저 대답이 한 템포 느리게 나오고. 괜히 눈을 크게 뜬 순한 얼굴이 거슬리는 거다. 됐다. 빈정이 상해서 저리 가라고 밀어내니 민다고 고대로 밀려난다. 웃겨. 평소엔 가래도 가지도 않으면서. 마음에… 안 들었다. 저 형 진짜 그냥 내가 귀엽기만 한가? 귀여우면 다. 사귀자고 해도 받아주고. 그런 거냐고. 영문도 모르는 김승민이 얄미웠다.

 

 

정인이 삐졌어? 형이 대답 늦게 해서?

됐거든. 저리 가. 못생긴 게.

야. 형이 너 사람 생긴 걸로 싫어하지 말랬지.

형 너는 지금 꼴랑 그게 중요하냐?

 

 

결국. 혼자 잠깐 꽁해있다 끝내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높아졌다. 놀란 김승민을 두고 일어났다. 정인이 가게? 어. 형 너랑 같이 있기 싫어서 간다. 과제는?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쓰지 마. 유치하다. 애가 따로 없다. 가방 챙겨 나오는데 붙잡지도 않는 김승민. 그대로 탁탁탁 발소리까지 세게 나게 걸어나와놓고. 김승민이 듣지도 못할 곳에서 아. 김승민 개짜증나. 바락바락 소리질렀다. 나쁜 김승민. 사람 마음도 모르는 김승민.

 

 

 

 

연락이 없다. 평소 같았으면 카톡이며 전화며 시도 때도 없이 귀찮게 굴던 승민이 조용하다. 하긴 성질내고 나온 건 정인이고, 먼저 사과를 해야 할 것도… 제3자가 보면 정인이라고 하겠지만. 사람 마음을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되는 거다. 왜 좋냐고 물었잖아. 그럼 어디가 좋은지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똑똑한 척은 혼자 있는 대로 다 하면서 왜 모를까. 진짜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닐까.

 

생각은 불안을 키운다. 당장 승민이 연락을 하냐 안 하냐를 신경쓰고 있다는 것도 그랬다. 웃기는 일이다. 마음 한 켠에선 니가 애 같이 굴고 있다고, 승민이 그 동안 얼마나 너한테 잘 했는지는 아냐고, 안경 치켜쓰고 정장 입은 선생님 정인이 튀어나와 혼내고, 다른 한 켠에선 진짜 승민이 별 마음 없는 거일수도 있다고, 귀여운 동생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그럼 마음이 더 커져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다시 원래대로 좋은 형 동생만 하는 게 맞다고 새까만 옷으로 무장을 한 악마 정인이 튀어나와 다그쳤다. 뭐야 내 편 들어주는 게 아무도 없잖아. 양쪽 주장이 다 싫었다. 머리를 휘휘 저어 두 자아를 뿌리친 정인이 벌렁 드러누워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여전히. 조용하기만 한 카톡… 이 아니고. 4분 전에 딱 하나 왔다. 정인아. 너 지갑 두고 갔어.

 

정인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럼 담에 주면 되지 이 인간은 이걸 왜 부끄럽게 이렇게 보냈담. 내가 방금 어쩌고 나갔는지는 기억하는 건가. 설마 신경도 안 썼나. 하긴 승민은 정인이 성질내곤 해도 맨날 하하 웃고 치대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진짜. 더 부끄럽다. 아 짜증나…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쇼파에 얼굴을 파묻는데 벨이 요란하게도 울렸다. 설마. 정인아. 들리는 목소리는 승민의 것이다. 아무리 승민의 집과 정인의 자취방이 가깝다지만 5분 만에 올 정도는 아닌데. 정인아아. 늘어지는 목소리가 애처로워서 결국 문을 열었다. 얼굴이 빨개진 김승민.

 

 

지갑 그거 담에 주면 되지. 그게 뭐라고 뛰어왔냐.

정인아.

 

 

옷도 아까 입고 있던 그대로다. 얇은 니트에 청바지 하나. 패딩은커녕 외투 한 장 없다. 이 인간 미쳤나. 찬기가 풀풀 나는 거에 기겁해서 집으로 들였다. 이 양반이 미쳤지. 감기걸리려고 작정했지 이 날씨에. 제정신이야? 안 추워? 얼굴 보면 마냥 부끄러워서 한 마디도 못할 것 같았는데 잔소리가 줄줄줄. 승민이 방긋방긋 웃다가 무너지듯 기댔다. 아 쫌.

 

 

정인이 따뜻하다.

형은 겁나 차가워. 미쳤지 진짜?

 

 

차가운 볼이며 귀를 만지작댔다. 피실피실 바람 빠지는 소리 내면서 웃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만져주다가 꼬집으니까 아아 하나도 안 아픈 말투로 아픈 시늉 했다. 진짜 밉다. 김승민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누가 이러래. 진짜 형이 제일 바보야. 못생겨가지곤.

정인아.

왜 못난아.

형 너 좋아해. 많이 좋아해. 서운하게 해서 미안. 형은 니가. 보고만 있어도 좋아서. 너 눈 뾰족한 것도 너무 귀엽고. 내 눈엔 귀엽기만 한데 사나워보인다고 맨날 웃고 다니는 것도 좋고. 툴툴대는 것 같아도 말 잘 들어줘서 기특하고. 그냥… 다 좋아서. 다 귀여운데, 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던데.

 

 

김승민은 정말 나쁘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어떡하라고. 입이 비죽 튀어나온 양정인이 됐다고 등을 퍽퍽 때렸다. 맞으면서도 좋단다. 얄미웠다. 너무너무 얄미웠다. 헷갈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김승민이 미워서. 때리던 손으로 등을 살살 문질렀다. 아팠냐? 조금? 괜찮은데.

 

 

형아.

어.

진짜 못생겼다.

아. 이건 좀 상처. 너무한데.

형이 준 책 하나도 안 읽었어. 나 원래 책 별로 안 좋아해.

너무한데. 내가 방금 너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난 왜 형이 좋지.

 

 

형은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고. 생일선물이라고 책이나 주고. 마음에 안 드는 짓만 골라하면서 귀찮게 굴던 승민이 언제부터 좋아졌는지. 정인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싶어서. 승민의 습관. 승민의 취향. 승민이 하던 행동. 그런 걸 돌이켜보니 싫은 것만 생각나는 거다. 나 이 형 왜 좋아하지. 웃음이 비져나왔다. 아까 승민은 좋은 게 너무 많아서 못 골랐다고 했는데. 정인은 싫은 게 너무 많다. 비싯비싯 웃다 승민의 멱살을 잡았다. 곱게 따라오는 게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미운 스무살.

 

 

내가 화내서 미안해.

멱살 잡고 할 얘긴가.

그래서 나 싫어?

좋지.

좋으면.

응. 좋으면.

 

 

몰라 시바. 잠깐 고민하던 정인이 입술을 갖다박았다. 차가웠다. 차가웠는데, 입술을 깨물고 비집고 들어오는 혀는 뜨거웠다. 이 인간은 매너도 없나. 키스하면서 눈도 안 감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도 뜨거웠다. 눈을 감아도 느껴져서 민망했는데. 승민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숨이 막혀 가슴을 퍽퍽 때리니 그제서야 떨어졌다. 숨을 고르는데 승민이 그랬다.

 

 

정인아. 사랑은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래.

그래서.

근데 난 너랑 이기고 지고 그런 거 싫어.

 

 

그니까 그냥. 좋아한다고. 난 너 다 좋아. 짜증내도 돼. 밀어도 돼. 싫어한다고 하는 건. 좀 싫은데. 그러면서 어깻죽지에 얼굴을 부볐다. 좀… 개 같았다. 강아지 귀랑 꼬리 단 승민 상상하곤 킥킥 웃었다. 형한테 할 말 없어? 슬쩍 고개 들어 쳐다보는데 별 수 없었다. 저 못생긴 얼굴 때문에 기분이 이렇게도 요동칠 수 있구나. 좋아서. 좋아해서. 괜히 심통부리게 되는 것도 그래서였나. 이런 생각 한 거 절대 안 말해줘야지. 다짐하면서. 미운 이마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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