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과 승민이 연애한다는 걸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비밀 연애를 하자고 약속했던 건 아니지만 아무에게나 쉽게 말하기는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부러 연애한다고 티를 내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근데 생각보다 사람들 우리한테 관심 없더라, 형. 그렇게 말하며 정인은 웃었다.
같이 밥을 먹자거나 술을 마시자고 할 때마다 선약이 있다며 철벽 치기 일쑤인 승민에게 또 퇴짜를 맞은 동기들이 대체 김승민은 누구랑 그렇게 만나는가에 대해 토론하며 과방을 나오던 찰나였다. 과방 문 앞에서 한 네 발짝은 떨어져 있으면서도 문 열리는 소리에 놀란 기색을 보이던, 타 학과 과잠을 입은 어려 보이는 낯선 얼굴에 누구 찾는 사람 있냐고 물으니. 혹시 승민이 형 안에 있어요? 연락이 안 돼서… 하며 안절부절 못하던. 과잠 왼팔 부근에 박혀 있는 19보다도 얼굴에서 새내기 티가 나던 웬 남자애 하나.
그 때 그 남자애 누구야? 묻는 동기들에 승민은 고등학교 후배라고 답했다. 그 후로 승민의 동기들은 그 후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승민과 수업이 겹치지도 않으면서 시간표는 어떻게 다 꿰고 있는지. 승민의 수업이 끝나기 십 분 전부터 승민이 있는 강의실 앞을 서성거리는, 앳되어 보이는 그 후배. 몇 번 봤다고 아는 체를 해오다가 어느 날은 장난스런 목소리로 니네 사귀냐, 짓궂은 농담 툭 던지는 승민의 동기 몇 있긴 했지만. 개의치 않는다는 듯 꾸벅 인사하고 마는 정인의 반응이 싱거워 동기들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김승민이랑 양정인이 진짜 그렇고 그런 사이일 거라고 생각을 못하고.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넘치는 편견이 지켜주는 커플이었다. 저 어린 티 흘리고 다니는 남자애가, 김승민 고등학교 후배가 맞긴 맞는데. 그 후배 고등학생일 때부터 만난 승민의 애인일 거라고는 승민의 동기 중 그 누구도, 상상을 못한 거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비밀 연애를 했던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주변에서 둘이 헤어졌네 어쩌네 하며 승민과 정인의 연애사를 공공연한 안줏거리 삼아 떠들고 다니며 정인의 마음을 들쑤시는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인은 의외로 자신이 무덤덤하다고 생각했다. 홀로 이별의 감정에 취해 일상 생활을 못 견디지도 않았다. 주인공이 이별하고 며칠동안 무기력하게 방에만 틀어박혀 울기만 하는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정인에게는 그런 일은 없었다. 이별의 슬픔을 핑계로 자체 휴강 때리지도 않고 학교도 꼬박꼬박 열심히 나갔다. 양정인, 네가 웬일이냐? 요새 늦지도 않고. 정인의 연애사를 알 턱이 없는 동기의 말은 가볍게 웃어 넘겼다.
아침에 학교 가기 귀찮다고 자체 휴강 하겠다고 칭얼대면 정인이 보고 싶은데 형 보러 학교 안 올 거냐며 전화하는 김승민. 기껏 전화로 깨워 주고 자취방까지 데리러 와 놓고 아침부터 쪽쪽거리느라 아슬아슬하게 지각할까 봐 쫄리게 만드는 김승민. 출튀 한 번쯤 괜찮지 않냐 하면 한두 번이냐며 팩폭 날리고, 입 삐죽거리면 그제서야 앉아만 있자고 어르고 달래가며 기어코 수업은 듣게 하는 김승민. 그런 김승민은 더는 없었지만. 보란 듯이, 멀쩡하게.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원래 딱히 술자리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있는 술자리마다 굳이 슬쩍 끼어든다는 것 정도? 애써 승민을 잊어 보려는 건 아니고.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일 줄 알았다, 양정인은. 오히려 김승민 생각나도 아무렇지 않으니까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자꾸 생각은 나는데. 곁이 허전한 것 같은 그 느낌은 지워지지가 않아서. 알 수 없는 낯선 고요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괜히 더 요란스럽게 굴 뿐이었다.
승민과 정인의 연애사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정인의 동기인 한지성이었다. 때문에 술자리 이후 정인의 귀가를 책임지는 건 자연스레 지성의 몫이 되었다. 지성은 말없이 술잔만 한참을 비우다 축 처진 정인에게 그랬다. 너 김승민이랑 언제 화해할 거니. 싸운 게 아니라 헤어진 거라니까. 그렇게 대꾸하려다 말았다.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 정인은 알딸딸한 기분을 느끼며 지성의 어깨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진짜… 짜증나는 김승민.
처음 승민을 만났던 때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정인의 윗윗집에 살던 가족이 이사 갔다더니, 그 집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마주한 얼굴. 염색이란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어둡고 차분한 머리색에, 보는 사람이 더 답답할 만큼 이마를 빼곡히 덮은 머리. 교문 앞 선도부한테 절대 걸릴 일 없어 보이는 단정한 교복 차림새에 동글뱅이 안경까지. 저렇게 똑똑할 것 같으면서도 바보 같아 보이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승민을 보며 종종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그 묘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가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엘리베이터 벽면에 붙은 거울로 흘끔 보곤 했다. 볼수록 신기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보면 전혀 세 보이는 구석 없이 순한 얼굴인데,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은근 차가워 보여서. 원체 살가운 성격도 아니었던 탓에 다가가서 말 한번 붙여보지 못했다. 그저 곁눈질해 보이는 명찰에 또렷이 적힌 김승민, 세 글자만 입 안에서 굴릴 뿐이었다.
승민과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건 승민의 졸업식 날이 처음이었다. 승민은 수능을 앞둔 바쁜 고삼이었던 데다가, 정인은 승민이 이사 온 지 몇 달만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던 바람에 꽤 오랜만에 얼굴을 본 날이었다. 정인은 문득, 머릿속에서 누군가 외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고. 오늘을 놓치면 후회한다고. 가끔 가다 아침에 마주치면 고개만 까딱하고 인사하는 게 전부였던 저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정인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기회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후회하기는 싫었다. 이제 등굣길 아침에 마주칠 일도, 학교 급식실에서 우연히 지나칠 일도 없는데. 그게 왠지 모르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졸업식 날의 어수선한 분위기, 그 속에 웃고 있는 승민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가. 곧장 학교 앞 꽃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급하게 조그만 튤립 꽃다발 하나를 사들고, 정인은 승민을 향해 냅다 달렸다. 승민의 뒤에 다다라서 승민의 코트 소매 끝자락을 살짝 쥐어 당겼다가, 인기척을 못 느끼는 것 같아 등을 톡톡 두드렸다. 추워서 빨개진 코를 하고서.
“저기… 형.”
저… 계속 형한테 말 걸어 보고 싶었거든요… 졸업, 축하해요. 승민의 어깨에 머무르는 시선. 눈도 못 마주치면서 빨갛게 언 손으로 꽃다발을 내민다. 고마워. 그걸 받아든 승민은 하얀 입김과 함께 가쁘게 숨을 내쉬는 정인을 빤히 쳐다보다 웃었다.
“루돌프 같다.”
네? 승민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인을 보다가. 귀도 빨갛고.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핫팩 하나를 쥐어주고서는, 교복에 달린 명찰을 힐긋 보다가 그랬다. 정인아.
“드디어 말 걸어줬네.”
정인아, 무슨 생각해? 형 앞에 두고 다른 생각 할 거야?
그냥… 형 졸업식 날 생각나서.
갑자기?
형 그때 나한테 루돌프 같다고 하고, 처음 본 사람한테. 기억나?
귀여워서 그랬지. 그리고 그날 처음 본 거 아니잖아.
아니, 얘기는 처음 했잖아. 어이없다, 진짜. 형 내가 맨날 쳐다보는 거 알고 있었어? 푸스스 웃던 승민이 입 삐쭉 내밀고 중얼거리는 정인의 볼에 짧게 입 맞췄다. 알고 있었지. 그럼 말 걸어주든가!
나도 너 좀 무섭고 그런 애인 줄 알았어. 성질 있고 막.
……
그래서 말 못 걸었는데.
내가 어디가 무서운데? 이렇게 귀여운데. 그치, 우리 정인이 귀엽지. 아 뽀뽀 그만하라고오. 그래도 그때 졸업식 날, 형이 너 번호 물어봤잖아. 웅. 그래서 지금 우리 이렇게 같이 있잖아. 맞아. 좋지? 웅. 나도.
그렇게 풋풋했던 때도 있었지.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이나 하는 제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래도 김승민은 진짜 나쁜놈이다. 안주로 시킨 오돌뼈 씹으면서 김승민도 같이 씹었다.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서는. 김승민 개새끼, 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킁. 잡지도 않고…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정인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지성은 인상을 쓰면서도 얌전히 정인을 달래 주었다. 형, 나 절대 슬퍼서 우는 거 아니야. 알지? 근데 형, 소주에서 눈물 맛 나는 거 가타.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가자 쫌. 나 더 마실 수 이써… 안 치해써… 그런 정인을 쳐다보다가, 너 분명 괜찮다고 하지 않았니, 하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렇게 말했다간 자기 안 괜찮은 거 아니라고 짜증이나 내다가 더 서럽게 울 것 같아서, 지성은 그저 정인의 등을 쓸어주며 한숨 쉬듯 그래 이놈아, 하고 말았다.
정인은 몽롱해진 정신을 부여잡고 온통 낙서로 가득 찬 술집 벽에 등을 기댔다. 여기 승민이 형이랑 자주 왔는데. 저 멀리 대각선 쪽 테이블 옆 벽면에 쓰인 ‘승민♥정인’이 보였다. 별로 크게 쓰지도 않았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눈에 띄는지. 누구 하트 누구라고 잔뜩 적힌 벽을 보다가 형 우리도 적을까 묻던 정인이, 아무데나 낙서하면 안 된다고 잔소리하는 승민의 옆에서 여기 어차피 낙서 많다고 꿋꿋이 펜을 들고 적어 내려간 그 이름. 속을 꼼꼼히 칠한 하트를 보다가 실실 웃는 김승민. 형 니 왜 웃는데. 그럴 거면 쓰지 말라고 왜 말렸는데. 그러면서 마주보며 웃었던. 정인은 이내 눈을 감았다.
승민은 정인에게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 화를 낼 법한 상황에서도. 무엇이든 간에 자신한테 다 맞춰 주는 승민이 좋은데, 그렇지만. 가끔은 좀 화를 내주었으면 좋겠다고, 정인은 생각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얘기를 해주지, 억지 부리면서 화내면 왜 그러냐고 다그치기라도 하지. 왜 그걸 다 받아주냐고. 비뚤어진 마음은 승민에게 화살을 돌렸다. 계속 져주고 봐주는 승민에 저 혼자만 벽에 대고 화를 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이어질수록 오히려 지치고 심술이 나서. 마음에도 없는 말과 행동을 하며 오기 부렸다. 괜히 미운 말을 내뱉고 승민의 속을 긁고 싶다는 못된 마음이 스물스물 피어올라 정인의 속을 간지럽혔다. 어디까지 받아줄 거야? 이래도 날 사랑할 수 있어? 자꾸만 어긋난 방식으로 사랑을 확인하려 들었다. 속으로 핑계를 대고 승민 탓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애써 제 탓 좀 덜어보려던 마음이 오히려 저를 더 갉아먹고 있다는 걸 모르고.
그러다 제 풀에 지쳐 떨어져 나간 것도 결국 정인이었다. 솔직히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김승민이 저를 사랑한다는 거. 모를 수가 없었다. 저를 바라보는 눈이 어떤 마음인지. 꾹꾹 눌러 담아 제 앞에 쏟아 놓는 승민의 그 마음을 모를 리가. 그저 혹시나, 이제 저에게 싫증난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
형, 나 사랑해?
그보다 깊은 내면엔 확인받고 싶은 마음.
형이 날 진짜 사랑하는지 이젠 모르겠어.
이런 말을 하면 상처가 될 걸 알면서도 꺼낸 말. 조금은 이기적인 마음. 사실 그거 다 진심 아니었는데. 못난 마음이 삐죽 새어 나와 입 밖으로 내뱉어진 순간, 눈물도 삐죽 새어 나오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왜 눈물이 날까. 정말이지 저를 한없이 유치해지고 찌질해지게 만들었다. 김승민의 사랑은.
그 말을 들은 승민은 한참이나, 상처받은 눈을 하고서는. 가만히 서있었다. 무슨 말을 한 거냐고 정인에게 되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정인의 볼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지도 않고.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그래, 알겠어. 한 마디 내려 놓고는, 돌아갔다. 정인을 자취방 앞에 홀로 남겨둔 채로.
그러고서 지금까지, 여태 연락이 없는 거였다. 직접적으로 헤어지자는 말은 없었지만 3주째 연락이 없으니. 제가 찬 건지 차인 건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홧김에 내뱉은 말, 제 실수라는 건 알았는데. 그래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왜 그냥 그렇게 가 버렸냐고. 형 그동안 나한테 사랑한다 한 거, 나한테 보여준 마음 그거 다 진심 아니었냐고. 멱살 쥐고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런 제 자신이 어처구니없고 양심도 없다는 생각이나 하며 소주 들이키다 어느새 취해 거의 잠에 빠졌던 정인은, 양정인 귀가 담당 한지성이 잡아준 택시를 타고 무사히 자취방에 도착했다. 정인은 저를 길바닥에 버리지 않고 자취방에 버려준 지성에게 고맙다는 카톡을 남기고는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무의식 중에 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술에 취한 날이면 항상 전화를 걸어 제가 잠에 들 때까지 절대 끊지 않던 승민과 통화하던 게, 습관이 되어서. 저도 모르게 초점 없는 눈으로 전화를 걸다가, 통화 연결음이 세 번째 이어질 때쯤 정신을 차리고는 다급히 끊었다. 부재중 전화 표시됐을 텐데. 알아서 무시하겠지… 내가 미쳤지 하고 침대에 머리를 퍽퍽 내려치다가. 다시 잠이나 자야지 싶어서 씻고 나온 정인의 폰에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집 앞이야]
[내려와]
뭐지 이게. 잘못 본 줄 알았는데, 다시 봐도 발신자는 ‘승민이형♥’이었다. 그 와중에 하트 붙여 저장한 이름은 바꾸지도 않았다는 걸, 아니 애초에 번호 지울 생각조차 못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닫고 헛웃음이 났다. 어떡하지. 이제 이런 전화 다시는 하지 말라고 끝장 내러 온 거면 어떡하지. 솔직히 겁이 났다. 지은 죄가 있어서. 피하고 싶었다. 그냥 못 본 척 씹고 잘까. 고민하던 차에 웅웅거리는 진동 소리 듣고 하는 수 없이 겉옷을 챙겨 나갔다. 뭐라 하든 이참에 다 털어버리자는 심정으로.
“이리 와 봐.”
쭈뼛 눈치를 보며 나오는 정인을 향해 양팔을 벌리고서는. 안아 보자. 3주만에 만나서 하는 소리가 그거였다. 그런 김승민을 보자마자, 어딘가 아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왈칵 눈물이 나서. 정인은 그냥 돌아섰다. 눈물 보이기 싫어서. 또 그때처럼, 우는 저를 달래주지 않고 지나쳐만 갈까 봐. 그게 겁나서, 정인은 차마 다시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김승민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믿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안 올 거야? 하고, 뒤에서 들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다정한 목소리가, 어느새 바로 옆에서 들리더니. 안 올 거냐구. 이미 자기가 와 놓고서는 그런다. 또 져준 거다, 김승민은.
“정인아, 형 안 볼 거야?”
승민은 뒤에서 정인을 끌어안고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을 그렇게 안아 주다가 슬쩍 정인의 몸을 돌려 세우는 승민의 행동에, 정인은 못 이기는 척 넘어갔다. 그리고는 승민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랬다.
“형은, 진짜…”
“……”
“착해 빠졌어.”
“……”
“그래서 싫어,”
형한테 못된 말을 하는 내가. 그거 다 받아주는 형도 싫고, 그런 형이 너무 좋아서 싫어... 정인이 승민의 품 안에서 웅얼거리면서 힘겹게 꺼낸 말을 듣고서, 승민은 한참 답이 없었다. 말없이 정인의 머리만 쓰다듬어 주다가 정인의 몸을 살짝 떼어 내고 말을 이었다.
“정인아.”
“……”
“형 네 생각만큼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니야.”
내가 굽히고 들어가는 사람 너밖에 없어. 알잖아, 내 모든 이유 너인 거. 정인은 여전히 시선은 바닥에 둔 채로, 나지막이 말하는 승민의 목소리를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정인아, 나 봐봐. 볼을 살살 문지르는 손길에 정인은 고개를 들어올려 승민과 눈을 마주치다가 울컥 말했다. 형 그럼 왜 나 버리고 갔어. 그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웃는 승민에 정인이 몸을 움찔했다. 너는 그럼 나한테 왜 그랬어 정인아.
“네가 나 못 떠날 거 알아서 보내준 거야.”
“……”
“아니었으면 나도 쉽게 못 놔줘.”
그땐 나도 진짜 속상해서. 그래서 그랬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 그러니까 이제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승민의 말 끝이 조금 떨리는 게 느껴져서, 정인은 승민의 품 안을 파고들어 허리를 꼭 껴안았다. 왜 또 먼저 사과하는데 형이…
…내가 더 미안해.
그러니까 형.
앞으로는 나한테 맨날 져주지도 말고.
싫은 건 싫다고, 미우면 밉다고 얘기해. 알겠지?
응. 대답은 잘해요. 정인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슬며시 깍지를 껴오는 승민의 손을 맞잡았다. 울다가 웃지도 말고. 정인아 너두. 근데 있잖아 정인아… 나 한 순간도 너한테 진심 아니었던 적 없어. 너 미워한 적도 없고. 미운 구석이 어딨다고. 우리 사랑스러운 정인이. 아 알겠다고… 승민이 볼을 꼬집으며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가 오랜만이라 그런지, 새삼 부끄러워 발갛게 귀가 익은 정인을 보고 승민이 웃으며 물었다. 뽀뽀해도 돼? 그 말에 정인은 대꾸 않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