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은 제목처럼 / 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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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30. 23:30

 

 

 

 

 

정인과 승민이 연애한다는 걸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비밀 연애를 하자고 약속했던 건 아니지만 아무에게나 쉽게 말하기는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부러 연애한다고 티를 내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근데 생각보다 사람들 우리한테 관심 없더라, 형. 그렇게 말하며 정인은 웃었다.

 

 

 

 

같이 밥을 먹자거나 술을 마시자고 할 때마다 선약이 있다며 철벽 치기 일쑤인 승민에게 또 퇴짜를 맞은 동기들이 대체 김승민은 누구랑 그렇게 만나는가에 대해 토론하며 과방을 나오던 찰나였다. 과방 문 앞에서 한 네 발짝은 떨어져 있으면서도 문 열리는 소리에 놀란 기색을 보이던, 타 학과 과잠을 입은 어려 보이는 낯선 얼굴에 누구 찾는 사람 있냐고 물으니. 혹시 승민이 형 안에 있어요? 연락이 안 돼서… 하며 안절부절 못하던. 과잠 왼팔 부근에 박혀 있는 19보다도 얼굴에서 새내기 티가 나던 웬 남자애 하나.

 

 

그 때 그 남자애 누구야? 묻는 동기들에 승민은 고등학교 후배라고 답했다. 그 후로 승민의 동기들은 그 후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승민과 수업이 겹치지도 않으면서 시간표는 어떻게 다 꿰고 있는지. 승민의 수업이 끝나기 십 분 전부터 승민이 있는 강의실 앞을 서성거리는, 앳되어 보이는 그 후배. 몇 번 봤다고 아는 체를 해오다가 어느 날은 장난스런 목소리로 니네 사귀냐, 짓궂은 농담 툭 던지는 승민의 동기 몇 있긴 했지만. 개의치 않는다는 듯 꾸벅 인사하고 마는 정인의 반응이 싱거워 동기들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김승민이랑 양정인이 진짜 그렇고 그런 사이일 거라고 생각을 못하고.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넘치는 편견이 지켜주는 커플이었다. 저 어린 티 흘리고 다니는 남자애가, 김승민 고등학교 후배가 맞긴 맞는데. 그 후배 고등학생일 때부터 만난 승민의 애인일 거라고는 승민의 동기 중 그 누구도, 상상을 못한 거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비밀 연애를 했던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주변에서 둘이 헤어졌네 어쩌네 하며 승민과 정인의 연애사를 공공연한 안줏거리 삼아 떠들고 다니며 정인의 마음을 들쑤시는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인은 의외로 자신이 무덤덤하다고 생각했다. 홀로 이별의 감정에 취해 일상 생활을 못 견디지도 않았다. 주인공이 이별하고 며칠동안 무기력하게 방에만 틀어박혀 울기만 하는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정인에게는 그런 일은 없었다. 이별의 슬픔을 핑계로 자체 휴강 때리지도 않고 학교도 꼬박꼬박 열심히 나갔다. 양정인, 네가 웬일이냐? 요새 늦지도 않고. 정인의 연애사를 알 턱이 없는 동기의 말은 가볍게 웃어 넘겼다.

 

 

아침에 학교 가기 귀찮다고 자체 휴강 하겠다고 칭얼대면 정인이 보고 싶은데 형 보러 학교 안 올 거냐며 전화하는 김승민. 기껏 전화로 깨워 주고 자취방까지 데리러 와 놓고 아침부터 쪽쪽거리느라 아슬아슬하게 지각할까 봐 쫄리게 만드는 김승민. 출튀 한 번쯤 괜찮지 않냐 하면 한두 번이냐며 팩폭 날리고, 입 삐죽거리면 그제서야 앉아만 있자고 어르고 달래가며 기어코 수업은 듣게 하는 김승민. 그런 김승민은 더는 없었지만. 보란 듯이, 멀쩡하게.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원래 딱히 술자리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있는 술자리마다 굳이 슬쩍 끼어든다는 것 정도? 애써 승민을 잊어 보려는 건 아니고.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일 줄 알았다, 양정인은. 오히려 김승민 생각나도 아무렇지 않으니까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자꾸 생각은 나는데. 곁이 허전한 것 같은 그 느낌은 지워지지가 않아서. 알 수 없는 낯선 고요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괜히 더 요란스럽게 굴 뿐이었다.

 

 

승민과 정인의 연애사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정인의 동기인 한지성이었다. 때문에 술자리 이후 정인의 귀가를 책임지는 건 자연스레 지성의 몫이 되었다. 지성은 말없이 술잔만 한참을 비우다 축 처진 정인에게 그랬다. 너 김승민이랑 언제 화해할 거니. 싸운 게 아니라 헤어진 거라니까. 그렇게 대꾸하려다 말았다.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 정인은 알딸딸한 기분을 느끼며 지성의 어깨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진짜… 짜증나는 김승민.

 

 

 

 

 

 

 

 

처음 승민을 만났던 때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정인의 윗윗집에 살던 가족이 이사 갔다더니, 그 집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마주한 얼굴. 염색이란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어둡고 차분한 머리색에, 보는 사람이 더 답답할 만큼 이마를 빼곡히 덮은 머리. 교문 앞 선도부한테 절대 걸릴 일 없어 보이는 단정한 교복 차림새에 동글뱅이 안경까지. 저렇게 똑똑할 것 같으면서도 바보 같아 보이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승민을 보며 종종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그 묘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가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엘리베이터 벽면에 붙은 거울로 흘끔 보곤 했다. 볼수록 신기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보면 전혀 세 보이는 구석 없이 순한 얼굴인데,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은근 차가워 보여서. 원체 살가운 성격도 아니었던 탓에 다가가서 말 한번 붙여보지 못했다. 그저 곁눈질해 보이는 명찰에 또렷이 적힌 김승민, 세 글자만 입 안에서 굴릴 뿐이었다.

 

 

승민과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건 승민의 졸업식 날이 처음이었다. 승민은 수능을 앞둔 바쁜 고삼이었던 데다가, 정인은 승민이 이사 온 지 몇 달만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던 바람에 꽤 오랜만에 얼굴을 본 날이었다. 정인은 문득, 머릿속에서 누군가 외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고. 오늘을 놓치면 후회한다고. 가끔 가다 아침에 마주치면 고개만 까딱하고 인사하는 게 전부였던 저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정인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기회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후회하기는 싫었다. 이제 등굣길 아침에 마주칠 일도, 학교 급식실에서 우연히 지나칠 일도 없는데. 그게 왠지 모르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졸업식 날의 어수선한 분위기, 그 속에 웃고 있는 승민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가. 곧장 학교 앞 꽃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급하게 조그만 튤립 꽃다발 하나를 사들고, 정인은 승민을 향해 냅다 달렸다. 승민의 뒤에 다다라서 승민의 코트 소매 끝자락을 살짝 쥐어 당겼다가, 인기척을 못 느끼는 것 같아 등을 톡톡 두드렸다. 추워서 빨개진 코를 하고서.

 

“저기… 형.”

 

저… 계속 형한테 말 걸어 보고 싶었거든요… 졸업, 축하해요. 승민의 어깨에 머무르는 시선. 눈도 못 마주치면서 빨갛게 언 손으로 꽃다발을 내민다. 고마워. 그걸 받아든 승민은 하얀 입김과 함께 가쁘게 숨을 내쉬는 정인을 빤히 쳐다보다 웃었다.

 

“루돌프 같다.”

 

네? 승민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인을 보다가. 귀도 빨갛고.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핫팩 하나를 쥐어주고서는, 교복에 달린 명찰을 힐긋 보다가 그랬다. 정인아.

 

“드디어 말 걸어줬네.”

 

 

 

 

 

 

 

 

정인아, 무슨 생각해? 형 앞에 두고 다른 생각 할 거야?

그냥… 형 졸업식 날 생각나서.

갑자기?

형 그때 나한테 루돌프 같다고 하고, 처음 본 사람한테. 기억나?

귀여워서 그랬지. 그리고 그날 처음 본 거 아니잖아.

 

아니, 얘기는 처음 했잖아. 어이없다, 진짜. 형 내가 맨날 쳐다보는 거 알고 있었어? 푸스스 웃던 승민이 입 삐쭉 내밀고 중얼거리는 정인의 볼에 짧게 입 맞췄다. 알고 있었지. 그럼 말 걸어주든가!

 

나도 너 좀 무섭고 그런 애인 줄 알았어. 성질 있고 막.

……

그래서 말 못 걸었는데.

 

내가 어디가 무서운데? 이렇게 귀여운데. 그치, 우리 정인이 귀엽지. 아 뽀뽀 그만하라고오. 그래도 그때 졸업식 날, 형이 너 번호 물어봤잖아. 웅. 그래서 지금 우리 이렇게 같이 있잖아. 맞아. 좋지? 웅. 나도.

 

 

 

 

 

 

 

 

 

 

그렇게 풋풋했던 때도 있었지.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이나 하는 제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래도 김승민은 진짜 나쁜놈이다. 안주로 시킨 오돌뼈 씹으면서 김승민도 같이 씹었다.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서는. 김승민 개새끼, 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킁. 잡지도 않고…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정인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지성은 인상을 쓰면서도 얌전히 정인을 달래 주었다. 형, 나 절대 슬퍼서 우는 거 아니야. 알지? 근데 형, 소주에서 눈물 맛 나는 거 가타.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가자 쫌. 나 더 마실 수 이써… 안 치해써… 그런 정인을 쳐다보다가, 너 분명 괜찮다고 하지 않았니, 하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렇게 말했다간 자기 안 괜찮은 거 아니라고 짜증이나 내다가 더 서럽게 울 것 같아서, 지성은 그저 정인의 등을 쓸어주며 한숨 쉬듯 그래 이놈아, 하고 말았다.

 

 

정인은 몽롱해진 정신을 부여잡고 온통 낙서로 가득 찬 술집 벽에 등을 기댔다. 여기 승민이 형이랑 자주 왔는데. 저 멀리 대각선 쪽 테이블 옆 벽면에 쓰인 ‘승민♥정인’이 보였다. 별로 크게 쓰지도 않았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눈에 띄는지. 누구 하트 누구라고 잔뜩 적힌 벽을 보다가 형 우리도 적을까 묻던 정인이, 아무데나 낙서하면 안 된다고 잔소리하는 승민의 옆에서 여기 어차피 낙서 많다고 꿋꿋이 펜을 들고 적어 내려간 그 이름. 속을 꼼꼼히 칠한 하트를 보다가 실실 웃는 김승민. 형 니 왜 웃는데. 그럴 거면 쓰지 말라고 왜 말렸는데. 그러면서 마주보며 웃었던. 정인은 이내 눈을 감았다.

 

 

 

 

 

 

 

 

승민은 정인에게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 화를 낼 법한 상황에서도. 무엇이든 간에 자신한테 다 맞춰 주는 승민이 좋은데, 그렇지만. 가끔은 좀 화를 내주었으면 좋겠다고, 정인은 생각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얘기를 해주지, 억지 부리면서 화내면 왜 그러냐고 다그치기라도 하지. 왜 그걸 다 받아주냐고. 비뚤어진 마음은 승민에게 화살을 돌렸다. 계속 져주고 봐주는 승민에 저 혼자만 벽에 대고 화를 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이어질수록 오히려 지치고 심술이 나서. 마음에도 없는 말과 행동을 하며 오기 부렸다. 괜히 미운 말을 내뱉고 승민의 속을 긁고 싶다는 못된 마음이 스물스물 피어올라 정인의 속을 간지럽혔다. 어디까지 받아줄 거야? 이래도 날 사랑할 수 있어? 자꾸만 어긋난 방식으로 사랑을 확인하려 들었다. 속으로 핑계를 대고 승민 탓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애써 제 탓 좀 덜어보려던 마음이 오히려 저를 더 갉아먹고 있다는 걸 모르고.

 

 

그러다 제 풀에 지쳐 떨어져 나간 것도 결국 정인이었다. 솔직히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김승민이 저를 사랑한다는 거. 모를 수가 없었다. 저를 바라보는 눈이 어떤 마음인지. 꾹꾹 눌러 담아 제 앞에 쏟아 놓는 승민의 그 마음을 모를 리가. 그저 혹시나, 이제 저에게 싫증난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

 

형, 나 사랑해?

 

그보다 깊은 내면엔 확인받고 싶은 마음.

 

형이 날 진짜 사랑하는지 이젠 모르겠어.

 

이런 말을 하면 상처가 될 걸 알면서도 꺼낸 말. 조금은 이기적인 마음. 사실 그거 다 진심 아니었는데. 못난 마음이 삐죽 새어 나와 입 밖으로 내뱉어진 순간, 눈물도 삐죽 새어 나오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왜 눈물이 날까. 정말이지 저를 한없이 유치해지고 찌질해지게 만들었다. 김승민의 사랑은.

 

그 말을 들은 승민은 한참이나, 상처받은 눈을 하고서는. 가만히 서있었다. 무슨 말을 한 거냐고 정인에게 되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정인의 볼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지도 않고.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그래, 알겠어. 한 마디 내려 놓고는, 돌아갔다. 정인을 자취방 앞에 홀로 남겨둔 채로.

 

 

 

 

 

 

 

 

 

 

그러고서 지금까지, 여태 연락이 없는 거였다. 직접적으로 헤어지자는 말은 없었지만 3주째 연락이 없으니. 제가 찬 건지 차인 건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홧김에 내뱉은 말, 제 실수라는 건 알았는데. 그래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왜 그냥 그렇게 가 버렸냐고. 형 그동안 나한테 사랑한다 한 거, 나한테 보여준 마음 그거 다 진심 아니었냐고. 멱살 쥐고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런 제 자신이 어처구니없고 양심도 없다는 생각이나 하며 소주 들이키다 어느새 취해 거의 잠에 빠졌던 정인은, 양정인 귀가 담당 한지성이 잡아준 택시를 타고 무사히 자취방에 도착했다. 정인은 저를 길바닥에 버리지 않고 자취방에 버려준 지성에게 고맙다는 카톡을 남기고는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무의식 중에 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술에 취한 날이면 항상 전화를 걸어 제가 잠에 들 때까지 절대 끊지 않던 승민과 통화하던 게, 습관이 되어서. 저도 모르게 초점 없는 눈으로 전화를 걸다가, 통화 연결음이 세 번째 이어질 때쯤 정신을 차리고는 다급히 끊었다. 부재중 전화 표시됐을 텐데. 알아서 무시하겠지… 내가 미쳤지 하고 침대에 머리를 퍽퍽 내려치다가. 다시 잠이나 자야지 싶어서 씻고 나온 정인의 폰에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집 앞이야]

[내려와]

 

 

뭐지 이게. 잘못 본 줄 알았는데, 다시 봐도 발신자는 ‘승민이형♥’이었다. 그 와중에 하트 붙여 저장한 이름은 바꾸지도 않았다는 걸, 아니 애초에 번호 지울 생각조차 못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닫고 헛웃음이 났다. 어떡하지. 이제 이런 전화 다시는 하지 말라고 끝장 내러 온 거면 어떡하지. 솔직히 겁이 났다. 지은 죄가 있어서. 피하고 싶었다. 그냥 못 본 척 씹고 잘까. 고민하던 차에 웅웅거리는 진동 소리 듣고 하는 수 없이 겉옷을 챙겨 나갔다. 뭐라 하든 이참에 다 털어버리자는 심정으로.

 

 

 

 

 

 

“이리 와 봐.”

 

쭈뼛 눈치를 보며 나오는 정인을 향해 양팔을 벌리고서는. 안아 보자. 3주만에 만나서 하는 소리가 그거였다. 그런 김승민을 보자마자, 어딘가 아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왈칵 눈물이 나서. 정인은 그냥 돌아섰다. 눈물 보이기 싫어서. 또 그때처럼, 우는 저를 달래주지 않고 지나쳐만 갈까 봐. 그게 겁나서, 정인은 차마 다시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김승민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믿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안 올 거야? 하고, 뒤에서 들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다정한 목소리가, 어느새 바로 옆에서 들리더니. 안 올 거냐구. 이미 자기가 와 놓고서는 그런다. 또 져준 거다, 김승민은.

 

“정인아, 형 안 볼 거야?”

 

승민은 뒤에서 정인을 끌어안고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을 그렇게 안아 주다가 슬쩍 정인의 몸을 돌려 세우는 승민의 행동에, 정인은 못 이기는 척 넘어갔다. 그리고는 승민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랬다.

 

“형은, 진짜…”

“……”

“착해 빠졌어.”

“……”

“그래서 싫어,”

 

형한테 못된 말을 하는 내가. 그거 다 받아주는 형도 싫고, 그런 형이 너무 좋아서 싫어... 정인이 승민의 품 안에서 웅얼거리면서 힘겹게 꺼낸 말을 듣고서, 승민은 한참 답이 없었다. 말없이 정인의 머리만 쓰다듬어 주다가 정인의 몸을 살짝 떼어 내고 말을 이었다.

 

“정인아.”

“……”

“형 네 생각만큼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니야.”

 

내가 굽히고 들어가는 사람 너밖에 없어. 알잖아, 내 모든 이유 너인 거. 정인은 여전히 시선은 바닥에 둔 채로, 나지막이 말하는 승민의 목소리를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정인아, 나 봐봐. 볼을 살살 문지르는 손길에 정인은 고개를 들어올려 승민과 눈을 마주치다가 울컥 말했다. 형 그럼 왜 나 버리고 갔어. 그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웃는 승민에 정인이 몸을 움찔했다. 너는 그럼 나한테 왜 그랬어 정인아.

 

“네가 나 못 떠날 거 알아서 보내준 거야.”

“……”

“아니었으면 나도 쉽게 못 놔줘.”

 

그땐 나도 진짜 속상해서. 그래서 그랬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 그러니까 이제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승민의 말 끝이 조금 떨리는 게 느껴져서, 정인은 승민의 품 안을 파고들어 허리를 꼭 껴안았다. 왜 또 먼저 사과하는데 형이…

 

…내가 더 미안해.

그러니까 형.

앞으로는 나한테 맨날 져주지도 말고.

싫은 건 싫다고, 미우면 밉다고 얘기해. 알겠지?

 

응. 대답은 잘해요. 정인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슬며시 깍지를 껴오는 승민의 손을 맞잡았다. 울다가 웃지도 말고. 정인아 너두. 근데 있잖아 정인아… 나 한 순간도 너한테 진심 아니었던 적 없어. 너 미워한 적도 없고. 미운 구석이 어딨다고. 우리 사랑스러운 정인이. 아 알겠다고… 승민이 볼을 꼬집으며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가 오랜만이라 그런지, 새삼 부끄러워 발갛게 귀가 익은 정인을 보고 승민이 웃으며 물었다. 뽀뽀해도 돼? 그 말에 정인은 대꾸 않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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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해져

2019. 11. 30. 23:30

 

 

 

1.

 

- 형, 오늘 8교시?

 

- 응. 국어 보충 수업하는 날.

 

- 나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양정인, 이상한 애.

 

 

양정인은 이상했다. 어머니에게 매번 등짝 반납하면서 겨우 성당 다니는 주제에 모태 신앙이고. 그 때문에 또 밥 먹기 전에 밥 먹고 난 후에 꼬박꼬박 눈 감고 손 모아 중얼중얼 기도하고. 검지 손가락엔 항상 묵주반지. 신앙심도 그닥이면서 행여나 샤워하고 그냥 화장실에 두고 온 날에는 불안하다고 종일을 징징거리고. 자기 친구들이랑도 있다가도 마주치면 손을 붕붕 흔들고. 하루는 단 걸 먹어야 머리가 핑핑 돌아간다면서 손바닥 내밀래서 내밀었더니 호박엿이나 쥐여주고. 한 학년 아래인 주제에 3학년 보충 수업 있는 날엔 흙바닥 박박 긁으면서 기다리는.

 

 

 

- 응. 수업 마치자마자 연락할게.

 

 

 

나도 이상하다.

 

흙바닥 박박 긁으면서 기다리는 애한테 한번도 먼저 가라는 말 하지 않고. 어쩌다 밥 같이 먹게 되는 주말엔 눈 내리깔고 기도하는 양정인 속눈썹 참 길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고. 흙먼지 가득한 운동장에서 벌겋게 익어서 빨빨 돌아다니는 애 보겠다고 짧은 점심시간에 그 주변을 빙빙 돌고. 바닥에 벌렁 배 깔고 누워 양발을 탁탁 쳐 성가시게 해도, 자기가 안 먹는 완두콩을 하나하나 골라내서 내 밥에 얹어줄 때도 싫은 표정 한번 안 짓고. 굳이굳이 공부에 별 뜻 없어보이는 애 독서실비까지 내면서 꾸역꾸역 출입 카드 쥐여주는.

 

 

우리는 그렇게 이상했다. 서로 감정을 정의할 수 없었다.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정의하고 난 후에는 단계별로 절차를 밟아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러면 꼭 탈이 났다. 멀리 갈 거 없이 야구가 그랬다. 배탈이 났다는 선발 선배를 대신해 출전한 대회는 우리가 결승으로 올라가냐 마냐를 좌우하는 중요한 경기였고, 잔뜩 긴장한 내가 던진 공은 형편없게 떨어지기도 전에 나는 내 어깨를 잡고 굴렀고, 이후 그라운드에 서기 어렵다는 말과 함께 배트와 글로브를 챙겨 락카를 뺐다.

 

후회는 딱히 없었다. 해볼만큼 했고, 프로까지 가긴 어려울 거라는 거 내가 가장 잘 알았으니까. 그래도 어쨌든 겉으로 보기엔 나는 나름 유망주 투수가 부상을 입고 야구를 관둔 스토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안쓰러워하거나 그럼 이제 뭘 할 거냐고 물었다. 처음 몇번은 괜찮다고 말하며 그냥 이제 공부에 충실해야겠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나를 더 딱하게 여겼다. 공부가 손에 잡히겠어. 어떡하니. 그래서 나도 그냥 말을 아꼈다.

 

 

웃기게도 양정인은 이런 내 작은 역사를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집에 놓인 많은 트로피를 보고 감탄하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꼭 자기가 다친 눈을 했다. 다쳤어? 많이 아팠겠다. 그렇게 딱 두 마디를 했다. 속상해겠다, 힘들었겠다 같은 군더더기 같은 말은 없이. 얇은 손으로 내 어깨를 작게 쓰다듬으면서. 마치 아이 달래듯이. 그래서 난 그냥 말 없이 까만 머리통을 손으로 한번 쓸어내렸다. 그때도 아주 조금 울렁거렸던 거 같다.

 

 

 

 

 

2.

 

양정인과 독서실을 같이 다닌지도 4개월째다. 아까 보충 수업도 한 날이니까 영화라도 보고 하루만 놀자는 말에 시험이 곧이라며 끌고 왔더니 양정인은 입술이 댓발로 나와서 삐딱한 자세로 볼펜 죽죽 긋는 소리만 냈다. 양정인은 야구하다 온 나보다 더 공부랑 벽을 쌓은듯 했다. 하루는 이마빡에 불만 두글자를 달고 와선 홍삼액 하나를 턱 내밀더니. 형 손에 이끌려서 나 독서실 다니는 거 고맙대, 엄마가. 하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툭. 옆칸에서 쪽지 하나가 날아왔다. 뭐냐는 표정으로 양정인을 쳐다보니까 열어보랜다. 나 마음에 안 들어요 나 반항하고 싶어요 를 몸으로 보여줘도 내가 아무 반응 않고 참고서만 들여다 보고 있으니까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시겠다, 이거지.

 

 

 

<폰 봐.>

 

 

 

 

비행기 모드로 걸어놨던 핸드폰에 양정인은 어지간히 심심했는지 시간차를 두고 메시지를 보냈다.

 

 

 

 

[형 언제 가?] 6:40PM

[나 집 가고싶다…..] 7:16PM

[오늘 공부 안돼 ㅡㅡ] 7:22PM

 

 

[항상 안되는 거 아니고?]

 

 

 

 

내 메시지에 웬 여우 하나가 발을 쿵쿵 구르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내길래 참 어디서 자기 같은 거만 골라 쓰네, 생각 잠시 하고.

 

 

 

 

[나 10시에 갈 건데]

 

 

 

 

1이 사라지고 옆에서 아예 풀썩 엎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칼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이리저리 헤집었더니 양정인은 뭐가 또 불만인지 후드집업 후드를 휙 둘러버리고 엎어진다.

 

 

 

 

 

잔뜩 심통난 양정인에게 그렇다고 먼저 집에 가라고 하긴 또 싫은 마음에 그냥 뒀더니 갈 시간이 다 되어서도 시간 무서운지 모르고 색색 숨소리까지 뱉으며 잔다. 톡톡 손끝으로 쳐봤지만 곤히 잠들었는지 부동을 하지 않아 결국엔 사이로 팔 넣어서 거의 질질 끌어오다싶이 해서 깨웠다.

 

 

 

 

- 집에 가자, 정인아.

 

 

 

팔 소매가 얼굴에 잔뜩 찍혀서 한쪽 볼만 발갛게 된 양정인은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더니 찹찹 자기 볼을 때렸다. 꼭 책가방을 또 내가 챙겨줘야 하지. 어제도 같은 페이지였던 수학문제집을 닫아 가방에 넣고 나니 졸린 와중에도 양정인은 눈은 제대로 뜨고 있는지 영어교과서도, 한다.

 

 

 

- 알았으니까 먼저 나가서 카드 찍어.

 

- 웅.

 

 

보지도 않은 영어 교과서는 또 어디 둬서. 온갖 문제집과 노트가 뒤죽박죽 섞여있어 책상 위 책들을 하나하나 뒤지던 와중에, 예쁘게 접어 긴 꼬다리가 붙은 쪽지 하나. 그리고 그 꼬다리엔 떡하니 내 이름이 쓰여있었다. 쪽지를 보고 고민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지. 양심과 호기심의 사이. 내 이름이라도 적어놓지 말던가. 이건 일부는 양정인의 책임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쪽지를 교복 주머니 안에 깊숙이 찔러넣고, 양정인이 꼭 가져가야 한다던 영어 교과서를 가방에 넣고 독서실 스탠드를 껐다.

 

 

 

 

 

 

2-1.

 

방으로 들어와 교복 마이를 걸어두고 편한 옷으로 바꿔 입으려는데 손에 잡힌 쪽지.

 

<왜 나 무시하냐 ㅡㅡ 나 집 가고 싶은데 ㅡㅡ 진짜 개짱나>

 

 

 

나는 돼지로 그려놓고, 지는 눈 찍찍 그은 여우로 그려놓은 거 봐. 그 쪽지를 다시 접어 서랍 속에 넣었다.

 

 

 

 

3.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글이 올라왔다. <3학년 김승민 선배 혹시 여자친구 있나요??? 익명으로 부탁드려요ㅠㅠ> 그리고 그 밑 댓글에 같이 과외를 하는 최진아가 @김승민 ㅋㅋ 하고. 페이스북 계정만 만들어놨을 뿐, 핸드폰에 어플리케이션 하나 깔리지 않은 나는 그 사실을 알 리가 전무했고. 최진아가 김승민이랑 사귀는데 익명으로 누가 여친 있냐고 물어서 최진아 화났다. 나는 최진아랑 김승민이랑 같이 어디 가는 거 봤다. 카더라의 카더라. 등교를 하는 길부터 친구들이 붙어서 왜 말 안 해줬냐며 질문 세례를 하는데, 나는 이게 무슨 헛소린가 했다.

 

 

 

 

- 야, 김승민! 여자친구 생겼다며. 언제부터 사겼냐?

 

 

그때 왜 양정인이 떠올랐는진 정말 모를 일이다.

 

 

 

 

- 뭐가.

 

- 야, 모르는 척 오지네. 이미 최진아가 니 태그 다 함. 선생님, 또 한명 재수테크 이렇게 갑니다.

 

- 아침부터 재수없는 소리 할래? 최진아가 뭘.

 

- 뭐야. 어제 페북 안 봄? 걔가 니 태그했던데.

 

 

 

 

그래서 주말이면 뺀질나게 웃긴 동영상 링크나 뭐 하냐고 어그로를 끌던 애 연락이 없었나. 양정인은 그대로 믿고 있을까. 아니면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내가 지 생각을 이렇게 한다는 걸 알기나 할까. 사귀고 자시고 그런 거 아니라고 해도 어미오리 따라다니는 새끼 오리들도 아니고 종일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애들을 안 보이는 척 무시했더니 기만한다며 뿔뿔이 자기 자리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자꾸 양정인의 얼굴을 지울 수가 없었다.

 

 

 

 

 

 

3-1.

 

 

 

- 왜 나한테는 말 안 해줬어? 이제 나랑 하교 안 해? 독서실도 안 가겠네. 그래놓고 맨날 나는 집에 먼저 못 가게 하고. 생각할 수록 쫌 화난다.

 

 

 

아니나 다를까 조용하던 애 몇번 찔러보니 입이 댓발은 나와서 한다는 질문이 한두개가 아니다. 진위 여부조차 가릴 생각 없이. 내 말보다 지금 상황을 더 믿는다는 거야, 뭐야. 하다가도 이런 건 썸 사이에나 하는 말들 아닌가 싶어 괜히 니가 뭔데 하는 마음 조금. 아니, 그러니까 니가 뭔데의 그 뭔데는 너는 나한테 뭐라도 되고 싶냐는 그런. 아무튼 감정이 복잡했다.

 

 

 

- 너 질투해?

 

 

 

그래서 다 축약하고 질문 하나에 감정을 조금 걸었다. 질투해, 정인아? 다시 한번 되묻자 양정인의 귓바퀴가 벌겋게 올랐다.

 

 

 

- 아니, 섭섭하잖아. 형 친구들만큼이나 내가 맨날 형이랑 다녔는데 왜 나한테는 말 안 해주는데.

 

 

 

 

귓바퀴는 손 닿으면 화상이라도 얻을듯 뜨겁게 올랐는데, 말은 또 섭섭하댄다. 그러니까 섭섭하기만 하냐고 정인아 하고 캐물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난 그냥 또 좋은 형인척.

 

 

 

- 나 여자친구 없어.

 

 

 

사나웠던 눈매가 금방 동글동글해지면. 내 말 하나에 바로 반응이 풀어지는 양정인을 보면.

 

 

 

-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이거 봐. 집도 맨날 너랑 가는데.

 

- 치.

 

- 치는 뭐가 치야.

 

- 나 때문에 여자친구 못 만들어?

 

 

 

 

혼자 왜 굴을 파고 들어가려고 해. 저 작은 머리통에서 대체 무슨 생각들이 오고가고 있을지. 지난 주말엔 왜 메시지 하나 없었는지, 지금은 왜 나한테 이렇게 확인 받고 싶어하는지. 자꾸만 왜 이 감정을 정의하고 싶게 만들어버리는 건지. 아, 더이상 손바닥으로 가린다고 가려질 감정이 아니었다. 웃음이 나올 거 같아서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옷 매무새를 다듬는 척 했더니 양정인 고개가 함께 딸려온다.

 

 

 

- 못 만드냐고.

 

- 아니, 필요없어. 너랑 맨날 이렇게 같이 다니는데 정인이 니가 내 여자친구지.

 

- 형 그러면 지옥 가거든?

 

 

 

장난스럽게 웃어오는 양정인의 말에 양정인 검지 손가락에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묵주반지를 괜히 한번 쳐다봤다.

 

 

 

- 말이 그렇다는 거지.

 

 

 

- 아무튼 만들면 안 돼. 그럼 형은 나랑 따로 다닐 거고. 나 혼자는 독서실 안 갈 게 분명하고. 맨날 집에만 있을 거고. 난 또 그럼 시험 망칠 거고. 엄마는 그런 나 보면서 또 자율학습 신청하라고 할 게 뻔하고.

 

- 알았다니까.

 

 

 

 

툴툴거리면서도 쫑알쫑알 말도 안 되는 앞뒤를 어거지로 끼워맞추더니 알았다는 한 마디에 못 미더운 표정을 짓는다. 근데 정인아, 진짜 그 이유들뿐이야? 묻고 싶어졌다. 알고 싶어졌다. 그냥 궁금해서.

 

 

 

 

 

 

4.

 

독서실 공사기간이 시작되었다. 아귀가 맞지 않는 문 때문에 한두번 사람들이 프론트에서 컴플레인을 거는 걸 봤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참에 리모델링을 한다고 했다.

 

 

 

 

- 아, 왜 공사를 시험기간에 해.

 

- 어차피 공부 안 하면서.

 

- 이번 시험부터는 할 거거든?

 

 

 

정곡을 찌른 말에 파르르 올라오는 모습이 웃겼다. 위협을 하겠다는 건지 나를 향해 두른 가방을 붕 휘두르는 모습조차.

 

 

 

- 너 시험 성적표 받아보는 날에 맨날 그 소리 했잖아.

 

- 시끄러. 아무튼.

 

 

 

 

 

 

4-1.

 

 

 그래서 우리집에 데리고 왔다. 가지런한 내 신발에 비해 엉망으로 꺾어신은 신발이 현관 앞에 놓였다. 간식이라도 줄까 냉장고를 서성이니 됐다며 양정인은 이번엔 정말 빈말은 아니었는지 교복 앞은 다 풀어헤친 상태로 배 깔고 문제집에 몇번 끄적이더니 탁 덮고 또 다른 문제집을 꺼낸다.

 

 

 

- 허리 다쳐. 앉아서 해.

 

- 싫어.

 

 

 

말은 지지리도 안 듣고. 한번 더 입을 뗄려다가 그냥 소파에 있는 쿠션을 가져다 양정인에게 줬다. 쿠션에 아주 머리를 대고 누워 하늘 위로 책을 들어 올려보더니 다시 자세를 고쳐 책에 고개를 파묻는다. 조용한 거실에 양정인이 가끔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펜을 끄적이는 소리, 이따금 웅 하고 공기청정기가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시계 소리.

 

 

 

 

- 아오, 허리 아파.

 

 

 

 

한참 지나고 나서야 책을 탁자 위로 탁 올리더니 무슨 어른마냥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까만 머리통이 위로 올라왔다. 노트 한 쪽이 필기로 가득 채워져 새카맸다. 손목을 빙빙 돌리더니 다시 구부정하게 탁자 앞에 앉아 필기하려는 양정인 손날이 검게 엉망이었다. 샤프심을 손에 대고 굴린 것도 아닌데. 그래서 그냥 물티슈를 들어 손 붙잡고 벅벅 닦아주니까 대뜸.

 

 

 

 

- 형, 진짜 내가 여자였으면 반해서 사겼어.

 

 

 

 

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 말 하나에 줄 없이 수직하강하는 느낌. 그럼 나는 물티슈를 접어 휴지통에 넣은 후 대수롭지 않은 척 또.

 

 

 

- 왜 지금은 안돼?

 

 

 

했다. 양정인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진다. 대뜸 던진 말에 고백 아닌 고백으로 받아쳤더니 입꼬리는 무작정 올리고 보는데 눈은 울 거 같다. 시원하게 올라간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숨긴다고 숨기는데 이 정적이 더 이상한 걸 왜 몰라, 정인아. 감정을 인정하고 나니, 그 이후는 길이 뚫린 원웨이였다. 더이상 물러설 수도, 물러서고 싶지도 않다는 걸 내가 제일 잘 알았다. 프로야구에선 항상 최하위 팀은 선수 영입으로 승부수를 띄우기 마련이다. 가진 것으론 좋은 수를 만들어낼 수 없을 때. 분위기를 바꿔 새로운 플레이 전략을 만들기 위한 밑밥을 깔기 위해서. 진을 치고 감정의 끝머리에 서있는 나에게도 앞으로 나아가기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 난 지금 너랑도 사귈 수 있어.

 

 

 

 

승부수를 띄웠다.

 

 

 

 

- 아, 뭔 소리야.

 

- 진짠데.

 

- ..형 그러면 지옥 가.

 

 

 

 

나이롱 신자 주제에 저런 말은 척척 뱉는다. 그러곤 양정인은 서둘러 자기 노트와 책을 챙기더니 가방에 대강 구겨넣고 집을 나섰다. 교복 앞도 다 풀어헤친 채로. 회피는 예상 답안에 없었기에 나는 양정인을 불러 세우지도 못하고 그걸 다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심판이 거지 같아도, 상대 팀이 견제해도 하물며 다들 벤치 밖으로 뛰쳐나가도 승패가 갈리는 야구와 달랐다. 오히려 카드게임 같았다. 패 하나만 깠을 뿐인데, 양정인은 판을 엎고 나가버렸다. 지 카드가 뭔지, 내 카드가 뭔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양정인은 직면하길 부정했고, 난 감정의 끝에 매달려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고 샤프를 꾹 눌러 노트에 찍었다. 양정인 성격에 한동안 죽어라 자취를 감출 것이었다. 거절도 아니고 승락은 더더욱 아닌 애매모호한 잠적.

 

양정인이 뛰쳐나간 공간. 거기 혼자 앉아있는 나. 양정인이 깔고 있던 쇼파 쿠션. 트로피. 옆에 놓여있는 글러브와 야구볼. 그래도 굳이 같은 점이 있다면 9회 말까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게임과 같이, 발끝으로 간신히 버티는 중이라도 떨어져보기 전까진 모르는 거라고. 판 엎고 나갔더라도 다시 잡아 승패를 뒤집어보면 될 일이라고.

 

 

한손으론 양정인에게 전화를 걸면서 무작정 신발을 꺾어 신고 나갔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는 공항 시퀀스처럼 허허벌판에서 양정인을 찾겠다고 했으면 나았겠것만.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고 현관 문 앞에 쭈그려 앉아 핸드폰만 손에 들고 있는 양정인을 보게 될 건 또 뭔지.

 

쭈그려 앉아있는 양정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입을 겹쳤다.  

 

 

쿠당탕탕. 현관문이 요란하게 닫히자마자 서로의 입술이 다시 겹쳤다. 순식간에 혀가 얽히고 내뱉는 숨은 뜨거웠다. 맞닿는 살들은 죄다 여려서 꼭 한번씩 씹어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떨어지면 사라질 새라 찰싹 붙어 감쳐물은 입술 새로 옅은 숨이 샜다. 자기 가방 끈만 겨우 잡고 응하던 양정인이 입술이 떨어지기도 전에 내 어깨를 잡았다.

 

 

 

- 형, 우리 이러다…

 

- 싫어?

 

 

 

 

대답이 없었다.

 

 

 

- 형이 니 몫까지 다 갈게, 지옥.

 

 

 

 

그렇게 해서 니 마음 하나 편해진다면.

 

이번엔 양정인이 먼저 내 입술 위에 자기 입술을 포개온다. 내 교복 끝을 겨우 잡은 채로. 자기 눈은 꼭 감고.

 

 

 

9회말, 그리고 감정 정의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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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쫌. 귀찮게 하지 마라.

 

 

좋아서 그런 건데. 바둥바둥 밀어내는 손이 영 진심 같아서 괜히 서운하다. 알겠어. 안 할게. 목소리 축 늘어지게 까니 정인이 또 눈을 흘긴다. 또 그런다 또. 형 자꾸 삐진 척하면. 어? 내가. 어? 아 왜. 너 싫대서 지금 내가 안 하잖아. 근데 신경쓰이게 하잖아. 과제하는데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것도 못 참냐? 삐죽삐죽 눈은 사나운데 몸은 가깝다. 아 쫌. 삐지지 좀 말라고. 승민의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알겠어. 귀찮게 안 할게. 안고만 있을게. 그건 괜찮지?

맘대로 해라. 나쁜 형아야.

 

결국 승민이 또 이겼다. 제 좋을 대로 와락 껴안고 싱글대는 걸 무시하고 과제에 열중했다. 아 정인아 그거 계산 잘못했는데. 아 훔쳐보지마. 내가 알아서 해. 쫌. 아니 형이 걱정해서 그러지. 아 쫌. 알아서 한다고. 쫌만 고칠게. 잠깐만 줘봐. 아. 진짜.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들 했다. 그럼 내가 더 좋아해서 맨날 지는 건가. 김승민은 져주는 척 하면서 맨날 이겨먹는다. 승민은 귀엽다 좋아한다 귀찮게나 굴지. 그렇게 생각하니 고백도 정인이 먼저 했다. 귀엽다 귀엽다 말만 하지. 사람 헷갈리게 다정하면서 도통 사귀자는 말은 안 해서. 형 나 갖고 장난하나? 왜 사귀자고 안 하는데. 협박하듯 멱살 잡고 물었더니 웃었다. 그쯤 생각하고 나니 궁금해지는 거다.

 

이 형 나 진짜 좋아하는 건 맞나?

 

멱살 잡고 따지는데도 웃길래. 정인아 우리 밥 먹으러 갈래? 너 파스타 먹고 싶다며. 자연스럽게 손을 잡길래. 형 그래서 우리 사귀는 거야 뭐야. 그러니까 뽀뽀하자고 입술을 들이밀길래. 사귀는 건가 싶었는데. 달라진 게 없다. 김승민은 그 전에도 다정했고 뽀뽀하길 좋아했고. 치대는 걸 좋아했고. 귀엽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하도 다정하게 굴기에. 저 좋아하는 줄 알고 사귀자고 했고. 알았다고 한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찝찝하지. 그런 마음에서 한마디 툭 던졌다. 형아. 어.

 

 

내 어디가 좋냐?

너?

 

 

눈을 꿈뻑꿈뻑. 뭐야.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나. 너 왜 그런 걸 묻냐는 눈초리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니 정인이는 귀엽지. 그랬다. 끝? 갑자기 왜 그런 게 궁금해졌는데? 예상 못 했던 대답은 아닌데. 저 대답이 한 템포 느리게 나오고. 괜히 눈을 크게 뜬 순한 얼굴이 거슬리는 거다. 됐다. 빈정이 상해서 저리 가라고 밀어내니 민다고 고대로 밀려난다. 웃겨. 평소엔 가래도 가지도 않으면서. 마음에… 안 들었다. 저 형 진짜 그냥 내가 귀엽기만 한가? 귀여우면 다. 사귀자고 해도 받아주고. 그런 거냐고. 영문도 모르는 김승민이 얄미웠다.

 

 

정인이 삐졌어? 형이 대답 늦게 해서?

됐거든. 저리 가. 못생긴 게.

야. 형이 너 사람 생긴 걸로 싫어하지 말랬지.

형 너는 지금 꼴랑 그게 중요하냐?

 

 

결국. 혼자 잠깐 꽁해있다 끝내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높아졌다. 놀란 김승민을 두고 일어났다. 정인이 가게? 어. 형 너랑 같이 있기 싫어서 간다. 과제는?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쓰지 마. 유치하다. 애가 따로 없다. 가방 챙겨 나오는데 붙잡지도 않는 김승민. 그대로 탁탁탁 발소리까지 세게 나게 걸어나와놓고. 김승민이 듣지도 못할 곳에서 아. 김승민 개짜증나. 바락바락 소리질렀다. 나쁜 김승민. 사람 마음도 모르는 김승민.

 

 

 

 

연락이 없다. 평소 같았으면 카톡이며 전화며 시도 때도 없이 귀찮게 굴던 승민이 조용하다. 하긴 성질내고 나온 건 정인이고, 먼저 사과를 해야 할 것도… 제3자가 보면 정인이라고 하겠지만. 사람 마음을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되는 거다. 왜 좋냐고 물었잖아. 그럼 어디가 좋은지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똑똑한 척은 혼자 있는 대로 다 하면서 왜 모를까. 진짜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닐까.

 

생각은 불안을 키운다. 당장 승민이 연락을 하냐 안 하냐를 신경쓰고 있다는 것도 그랬다. 웃기는 일이다. 마음 한 켠에선 니가 애 같이 굴고 있다고, 승민이 그 동안 얼마나 너한테 잘 했는지는 아냐고, 안경 치켜쓰고 정장 입은 선생님 정인이 튀어나와 혼내고, 다른 한 켠에선 진짜 승민이 별 마음 없는 거일수도 있다고, 귀여운 동생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그럼 마음이 더 커져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다시 원래대로 좋은 형 동생만 하는 게 맞다고 새까만 옷으로 무장을 한 악마 정인이 튀어나와 다그쳤다. 뭐야 내 편 들어주는 게 아무도 없잖아. 양쪽 주장이 다 싫었다. 머리를 휘휘 저어 두 자아를 뿌리친 정인이 벌렁 드러누워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여전히. 조용하기만 한 카톡… 이 아니고. 4분 전에 딱 하나 왔다. 정인아. 너 지갑 두고 갔어.

 

정인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럼 담에 주면 되지 이 인간은 이걸 왜 부끄럽게 이렇게 보냈담. 내가 방금 어쩌고 나갔는지는 기억하는 건가. 설마 신경도 안 썼나. 하긴 승민은 정인이 성질내곤 해도 맨날 하하 웃고 치대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진짜. 더 부끄럽다. 아 짜증나…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쇼파에 얼굴을 파묻는데 벨이 요란하게도 울렸다. 설마. 정인아. 들리는 목소리는 승민의 것이다. 아무리 승민의 집과 정인의 자취방이 가깝다지만 5분 만에 올 정도는 아닌데. 정인아아. 늘어지는 목소리가 애처로워서 결국 문을 열었다. 얼굴이 빨개진 김승민.

 

 

지갑 그거 담에 주면 되지. 그게 뭐라고 뛰어왔냐.

정인아.

 

 

옷도 아까 입고 있던 그대로다. 얇은 니트에 청바지 하나. 패딩은커녕 외투 한 장 없다. 이 인간 미쳤나. 찬기가 풀풀 나는 거에 기겁해서 집으로 들였다. 이 양반이 미쳤지. 감기걸리려고 작정했지 이 날씨에. 제정신이야? 안 추워? 얼굴 보면 마냥 부끄러워서 한 마디도 못할 것 같았는데 잔소리가 줄줄줄. 승민이 방긋방긋 웃다가 무너지듯 기댔다. 아 쫌.

 

 

정인이 따뜻하다.

형은 겁나 차가워. 미쳤지 진짜?

 

 

차가운 볼이며 귀를 만지작댔다. 피실피실 바람 빠지는 소리 내면서 웃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만져주다가 꼬집으니까 아아 하나도 안 아픈 말투로 아픈 시늉 했다. 진짜 밉다. 김승민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누가 이러래. 진짜 형이 제일 바보야. 못생겨가지곤.

정인아.

왜 못난아.

형 너 좋아해. 많이 좋아해. 서운하게 해서 미안. 형은 니가. 보고만 있어도 좋아서. 너 눈 뾰족한 것도 너무 귀엽고. 내 눈엔 귀엽기만 한데 사나워보인다고 맨날 웃고 다니는 것도 좋고. 툴툴대는 것 같아도 말 잘 들어줘서 기특하고. 그냥… 다 좋아서. 다 귀여운데, 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던데.

 

 

김승민은 정말 나쁘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어떡하라고. 입이 비죽 튀어나온 양정인이 됐다고 등을 퍽퍽 때렸다. 맞으면서도 좋단다. 얄미웠다. 너무너무 얄미웠다. 헷갈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김승민이 미워서. 때리던 손으로 등을 살살 문질렀다. 아팠냐? 조금? 괜찮은데.

 

 

형아.

어.

진짜 못생겼다.

아. 이건 좀 상처. 너무한데.

형이 준 책 하나도 안 읽었어. 나 원래 책 별로 안 좋아해.

너무한데. 내가 방금 너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난 왜 형이 좋지.

 

 

형은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고. 생일선물이라고 책이나 주고. 마음에 안 드는 짓만 골라하면서 귀찮게 굴던 승민이 언제부터 좋아졌는지. 정인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싶어서. 승민의 습관. 승민의 취향. 승민이 하던 행동. 그런 걸 돌이켜보니 싫은 것만 생각나는 거다. 나 이 형 왜 좋아하지. 웃음이 비져나왔다. 아까 승민은 좋은 게 너무 많아서 못 골랐다고 했는데. 정인은 싫은 게 너무 많다. 비싯비싯 웃다 승민의 멱살을 잡았다. 곱게 따라오는 게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미운 스무살.

 

 

내가 화내서 미안해.

멱살 잡고 할 얘긴가.

그래서 나 싫어?

좋지.

좋으면.

응. 좋으면.

 

 

몰라 시바. 잠깐 고민하던 정인이 입술을 갖다박았다. 차가웠다. 차가웠는데, 입술을 깨물고 비집고 들어오는 혀는 뜨거웠다. 이 인간은 매너도 없나. 키스하면서 눈도 안 감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도 뜨거웠다. 눈을 감아도 느껴져서 민망했는데. 승민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숨이 막혀 가슴을 퍽퍽 때리니 그제서야 떨어졌다. 숨을 고르는데 승민이 그랬다.

 

 

정인아. 사랑은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래.

그래서.

근데 난 너랑 이기고 지고 그런 거 싫어.

 

 

그니까 그냥. 좋아한다고. 난 너 다 좋아. 짜증내도 돼. 밀어도 돼. 싫어한다고 하는 건. 좀 싫은데. 그러면서 어깻죽지에 얼굴을 부볐다. 좀… 개 같았다. 강아지 귀랑 꼬리 단 승민 상상하곤 킥킥 웃었다. 형한테 할 말 없어? 슬쩍 고개 들어 쳐다보는데 별 수 없었다. 저 못생긴 얼굴 때문에 기분이 이렇게도 요동칠 수 있구나. 좋아서. 좋아해서. 괜히 심통부리게 되는 것도 그래서였나. 이런 생각 한 거 절대 안 말해줘야지. 다짐하면서. 미운 이마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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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quence of Love

2019. 11. 30. 23:30

 

 

 

 

 

누구에게나 신입생의 봄은 설렘과 기대에 부풀어있다.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딱히 가고 싶은 과와 대학이 있던 건 아니지만 매일같이 귀에 딱지가 얹도록 엄마는 말해댔다. 사람은 상경해야 한다, 서울에 있는 대핵교 그 세 손가락에 드는 곳에 내 자슥이 들가면 을매나 좋겠나? 그래서 정인은 나름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다.

 

세 형제 중 중간에 있는 둘째는 큰 관심을 못 받기 마련이다. 첫째는 장남이다, 셋째는 막내다, 명분이라는 게 있지만 어중간한 둘째는 없었다. 정인은 항상 모호한 위치였다. 그래서 공부라도 열심히 하고자 했다. 대학 발표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고 마우스 클릭을 헛손질했는지 모른다. 옆에 있던 형은 그런 정인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뭐, 조회 버튼이라도 대신 눌러주까? 선심 쓰듯 묻기에 마 됐다고 마우스를 빼려 했는데 실수로 확인 버튼을 눌러버렸었다. 그 날은 다시 생각해도 코미디였다. 곧 화면에는 합격을 축하한다는 파란 글자가 떴고, 합격 창을 보고 넋이 나간 정인 대신 형인 정원이 호들갑을 떨며 방을 나가 소리쳤다. 엄마!! 인이 합격해따!!!! 합격!! 머라꼬?! 합격?! 그게 참말이고?! 하이고, 우리 인이!!!! 그라믄 서울 올라가는기가?! 주방에서 방까지 달려온 엄마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정인을 껴안았다. 인아, 욕봤데이. 이제 열심히 대학만 다니면 된다이가. 신이 난 나머지 떡이라도 돌려야겠다며 엄마는 바로 핸드폰을 들어 떡집에 전화를 걸었다. 성아 엄마? 나 원이 엄마. 우리 시루떡 두 박스만 만들어도. 와긴! 우리 인이 대학 합격했다! 그것도 서울에 있는 대학이라 안카나! 시끄럽게 핸드폰을 들고 호들갑을 떠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인은 다시 화면에 시선을 뒀다. 합격을 축하한다는 문구 위로는 저의 이름 생년월일, 수험번호, 지원과가 다 적혀있었다. 몰려있던 긴장이 단번에 풀려버렸다. 거짓말 조금 보태 위경련처럼 심장이 떨렸다. 거의 쓰러지다시피 침대 위로 쓰러진 정인이 방 천장을 의미 없이 올려다보며 두 눈을 끔벅였다.

 

12년간 열심히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던 노고의 결실이었다. 코피까지 흘리며 공부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근데 그게 이상하게 기쁘기는커녕 공허했다. 열아홉까지가 인생 1회차였다면 스물부터는 다시 인생 2회차 시작 같았다.

 

고작 수능 한 번으로 새 인생의 지표를 찍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기분에 입안이 씁쓸했다. 난생처음 홀로 겪어야 하는 타지생활에 걱정 반 설렘 반이었다. 정자세로 누워있던 몸을 옆으로 굴려 핸드폰을 만지작댔다. 기왕이면 기숙사보단 자취하고 싶은데. 엄마가 쉬이 허락할지 모르겠다. 그 보다 우선 서울살이에 적응을 잘 할 수 있을지도 고민이 됐다. 나고 자란 곳이 부산이다 보니 정인은 서울에 대해 무지했다.

 

언젠가 엄마가 말했다. 사람은 어디에 놓여있어도 어떻게든 적응해 살게 된다고. 설사 그게 무인도라 한들 차츰 익숙해질 거라고. 느이 형도 군대 갈 때만 해도 질질 짜더니 봐라. 짐 말뚝 박고 일하지 안나. 그러고 보니 입대 전 가고 싶지 않다고 형은 궁상맞게 울어댔었다. 지금은 군부대 소위로 말뚝을 박는 중이었고 이제 FM 생활의 군인이 되었다. 그래 그렇게 헬이라는 군대도 적응하는데 서울살이라고 못할까. 조용히 생각을 곱씹던 정인은 마음을 다잡았다. 기왕 새로운 곳에서 새로 시작하는 대학 생활 저도 새 마음가짐으로 다녀보겠노라고. 번잡스러운 만남의 지속도 청산하고 이번엔 기필코. 기필코 제대로 된 남자친구 하나 만들어 남 부러운 연애 한번 해보고 마리라.

 

그렇게 부푼 다짐을 안고 이민 가방 버금가는 캐리어를 끌고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를 타고 올라와 입학했는데. 새로이 수년간 함께할 동기들과 선배들 얼굴도 좀 익힐 겸 OT에 참여했는데.

 

 

“...정인이?”

 

 

그러니까 형이 왜 거기서 나와?

 

 

 

 

Sequence of Love

 

 

 

 

정인은 게이였다. 클로짓은 아니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이상 게이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교복 아니면 생활복만 줄곧 입고 다니는 허여멀건 한 고등학생이 여타 남학생들과 똑같으니 못 알아볼 만도 했다. 판도 좁은 데다 어리다 보니 어디 쉽게 누군가를 만날 짬밥도 되질 못 했다. 연애하고 싶었지만, 상대를 찾기도 어려웠다. 종종 들어가는 게이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연애 글들만을 대리 위안 삼으며 부러워할 뿐이었다. 종종 어플로 만났다는 글을 볼 때면 어플을 다운 받아볼까 싶다가도 어플로 호되게 당한 사람들의 후기도 만만치 않게 올라와 또 그 맘이 쏙 들어가 버리는 거다. 어플은 원나잇 하려고 등록하는 놈들도 개 많아요. 가능하면 거르세요. 먹튀나 어장관리, 똥차 경험 썰들을 보면 전부 다 어플 만남이었다. 원체 모든 것들을 조심스레 생각하는 정인으로서는 그런 글을 접할 때마다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연애란 것이 해보고 싶었다. 머리털 나고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니까. 어떻게 보면 로망이었다. ‘연애’를 글이나 말, 영상으로만 보고 배우기만 했으니 실전을 접하고 싶었다. 이따금 속에 있던 연애 세포들이 줏대 없이 날뛰어 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연애가 고팠다. 남들 보면 여느 커플처럼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손도 잡고 공원도 거니는 그런 연애 말이다. 그게 가을이면 유난히 심해졌는데 가을 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정인은 생각했다.

 

그날도 하필 딱 가을인 추석이었다. 외로운 정도가 배는 심했던 때다. 언제까지고 혼자서 궁상맞게 방안에 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늘어지게 누워있던 몸을 일으킨 정인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때의 저는 다시 생각해봐도 미쳤던 게 분명하다. 무슨 배짱인지 홧김에 어플을 깔고, 제일 잘 나온 사진으로 프사를 등록하고. 듣기만 해봤지 직접 써보는 건 처음인 앱의 UI를 살펴보다 차례로 나열된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식과 노식을 먹이기 바쁘던 그때, 메시지가 날라왔다.

 

 

-안녕. 학생이에요?

 

 

메시지 옆에 보이는 프사가 잘 안 보여 눈을 게슴츠레 뜨고 쳐다보던 정인이 프사를 눌러 그 사람의 프로필로 들어갔다. 고화질로 본 남자의 프사는 KTX에서 타고 봐도 강아지상이었다. 눈매가 선했다. 나쁜 짓이라곤 한 번도 저질러 보지 않았을 것 같은 생김새였다. 흰 티셔츠 위에 베이지색 랄프로렌 와이셔츠를 걸쳐 입은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정인이 자기소개 란을 봤다. 177/슬림 탑/20. 어려 보이게 생겼다 싶더니 저랑 딱 한 살 차이였다. 만남이든 뭐든 같은 성향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처음이었다. 겁은 나긴 하지만 저런 인상의 형이라면 그래도 안면 정도는 터도 괜찮을 것 같아서. 다시 몸을 침대 위로 누운 정인은 본격적으로 키패드를 쳤다.

 

 

-안녕하세요ㅋㅋ 네 고등학생이에요. 열아홉.

 

 

보낸 제 메시지를 육성으로 한번 읊다가 실소를 터뜨렸다. 와 진짜. 나 개 찐따 같다. 평소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땐 맞춤법도 다 무시하고 보내고 ㅋㅎㅎ,ㅗ를 난사하던 저가 게이 친구 한번 만나보겠다고 격식을 차리고 앉아있다. 제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남자에게서는 금방 답장이 왔다.

 

 

-열아홉이면 애기네요 ㅎㅎㅎ 

 

 

애기? 애기??? 누가 누구 보고 애기래. 00년생이 01년생 보고 할 소리는 아니지 싶었다. 나도 따지고 보면 01년 2월생인데. 빠른으로 학교 들어갔으면 똑같이 대학생이었다고, 이 사람아. 그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말들을 정인은 연이어 고시랑댔다. 친형처럼 서너 살 차이면 몰라. 고작 한 살 가지고 저를 어린애 취급을 하는데 살짝 기분 나빴지만, 정인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사실 아까 대강 훑었던 사람들보다는 메시지를 주고받는 이 형의 얼굴이 제일 식이었기 때문에. 정인이 채 뭐라 답장을 하기도 전에 연이어 메시지가 날아왔다.

 

 

-부산 살죠? 무슨 동? 나도 지금 부산인데 ㅎㅎ 

 

 

그러고 보니 아까 전 프로필을 봤을 때 나와의 거리가 9km였다. 만나자고 밑밥을 까는 건가. 제법 심각해진 얼굴로 정인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수정동이요. 형은요?

-저는 광안리 쪽이요. 할 거 없으면 만날래요? 나 심심한데.

 

 

예상은 했지만, 막상 실제로 만나고 하니 겁이 좀 났다. 하지만 아까 무어라 했는가. 열아홉의 그것도 외로움에 극이 달한 청소년은 연애가 고팠다. 아직 제대로 된 앞길의 분간도 모르는 어린 양은 저 질문에 풀 뜯어 먹듯 쉬이 OK,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광안리에 있다길래 서로 걸리는 시간대가 비슷한 중간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멋 좀 낸답시고 평소엔 잘 입지도 않는 스키니 블랙진에 목폴라, 흰색 셔츠까지 꿰입은 정인은 만나기로 한 장소 앞에서 상대를 기다렸다. 메시지로 주고받는 거 귀찮으니까 그냥 카톡 교환할래요? 그 제안과 함께 남자는 쉬이 자신의 번호를 넘겼고, 그냥 받을 수만은 없어 정인도 제 번호를 알려줬다. 흘러가는 대화의 무드가 유연한 것을 보아하니 한두 번 만남 어플을 써본 솜씨가 아닌듯했다. 커뮤에서 이런 사람들은 조심하라 했어. 근데 그렇다 하기엔 사람이 너무 순하게 생겼는데. 코를 훌쩍이며 대화창을 들어갔다. 다다음 정류소면 내린다는 남자의 대화가 5분 전이었다. 카톡 프사는 또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야구 배트 하나씩 들고 돔구장 같은 곳에서 찍은듯했다. 운동하는 형인가. 운동 전혀 안 하는 것처럼 생겼는데. 의외인 면에 이전 프로필 사진들을 염탐하며 홀로 상대방에 대한 추측이 머릿속으로 난무하던 그때. 등을 두드리는 손에 소스라치게 놀란 정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팩하니 돌렸다.

 

 

"정인이?"

 

 

그때도 똑같이 제 이름만 불렀다. 적당히 찢어진 스키니 청바지에, 벙벙한 폴로셔츠를 입은 남자의 얼굴은 조금 전 자신이 몰래 구경하던 프사의 주인공이었다. 진짜 강아지처럼 생겼네. 정인이 처음 느낀 그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리고 탈선을 저질렀냐, 하면 아니오. 바로 모텔이라도 직행할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그 형은 정인의 팔을 잡고 근방에 있는 패스트푸드 점으로 들어갔다. 뭐 먹을래. 사줄게요. 존대를 할거면 존대를 하고 반말을 할 거면 반말을 하지, 어중간한 반 존대를 쓴다. 그게 제 딴에도 불편했다. 그래서 사주겠다는 말에 거절하지 않고 키오스크 앞에서 메뉴를 골라 담던 정인은 덤덤히 말했다. 형이니까 그냥 말 놓으세요. 그래도 돼? 아까만 해도 말 놓고 싶어 하는 눈치를 그렇게 봤으면서 저런 소릴 한다. 무어라 쏘아붙이려다 금세 포기하고 입맛만 다신 정인이 고갤 끄덕였다. 네. 걍 하세요. 형은 뭐 드실 거에요? 나는 빅맥 세트. 요청대로 정인은 빅맥 세트까지 담고 결제창이 뜨고 나서야 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이것도 다 한때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한 짬밥이었다. 결제가 끝나자마자 종이로 나오는 영수증과 번호표를 들고 적당한 자리에 앉고 난 뒤로는 소소한 질의응답들이 오갔다.

 

고3이면 수능 준비 중이겠네. 그쵸, 뭐. 형은 대학생이죠? 응, 근데 아직 1학년이라 모르는 게 더 많지, 뭐. 정인이는 가고 싶은 대학 있어? 붙임성이 참 좋다. 그새 저를 보고 정인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그냥 목표는 없구. 등급 보고 맞는 곳에 적당한 대학 집어넣게요. 어릴 땐 유치원 교사, 신부님 등 별 꿈들이 많았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딱히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번호가 적혀있는 영수증을 만지작거리는 정인을 쳐다보며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승민이 웃었다. 등급 맞춰서 과 안보고 대학 들어갔다가 나중에 후회한다? 헹, 그러는 형은 가고 싶은 대학 갔어요? 갔지. 무슨대 무슨과 인데요. 질문보다 전광판에 뜬 대기 번호가 한 발 더 빨랐다. 검은 화면에 깜박이는 새하얀 숫자를 쳐다보던 정인은 뱉으려던 말을 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픽업대로 갔다.

 

햄버거를 먹고,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고, 카페에 가서 빙수까지 먹으니 해가 다 져버렸다. 그야말로 건전하디 건전한 만남이었다. 여느 고딩 친구들하고도 충분히 놀 수 있는 그 루트였다. 정인은 솔직히, 조금 실망했다. 평상시와 별다를 게 없었다. 그나마 친구들과 하지 않는 짓이라면 이따금 손을 잡아 오거나, 차가 오면 어깨를 당겨오는 것뿐이었다. 승민이 손을 잡아 올 때마다 정인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긍정적인 의미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쓴 돈은 전부 승민의 지갑에서 빠져 나왔다. 한 살 위의 대학생이어도 크게 버는 돈도 없을 텐데 계속 승민이 저가 내겠다며 나선 거긴 하지만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밤 9시를 찍고 둘은 버스 정류장에서 인사를 나눴다. 그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 정인은 승민에게 헤어지기 전에 말했다. 다음번엔 제가 쏠게요. 온종일 얻어먹은 게 많으니 밥 한 끼라도 사줘야겠다 싶었다. 처진 눈을 깜박이며 그런 정인을 쳐다보던 승민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좋아. 근데 정인이 너 다음에 나 보려면 반년은 기다려야 할걸.”

 

 

순간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정인은 승민이 보는 앞에서 체면이고 뭐고 제 귀를 팔 뻔했다. 뭐요? 반년?

 

 

“사실 나 추석이라 지금은 할아버지 댁 내려온 거고. 집은 서울이거든.”

 

 

오, 마이, 갓.

 

사는 곳이 서울이라는 말에 장거리라 이 이상 만나는 건 무리다, 그만하자. 란 소리가 쉽게 나올 리 없었다. 그랬다면 지금 정인이 피 같은 용돈으로 왕복으로 끊은 KTX를 타고 올라갈 일도 없을 터였다. 그것도 이번이 서울로 올라가는 게 세 번째였다. 둘은 서로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한 달에 두 번씩은 만났다. 이번이 여섯 번째 만남이었다. 성정이 매정하질 못했다. 한번 빚을 갚으면 무조건 갚아야 직성이 풀렸고, 무엇보다 그 날 처음 만났던 승민은 사진보다 실물이 더 제 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똥차, 폐차 만나 망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보기만 해 걱정이 앞섰던 것과는 달리 처음 만난 사람이 생각보다 괜찮은 형인 것 같아서.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 높은 건물과 빌딩들을 쳐다보던 정인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창에 머리를 기댔다.

 

아직 제대로 된 관계 정립을 하지는 않았지만 세 번째 만남에 둘은 키스했다. 딱히 할 게 없어 DVD방에 가서 영화나 보자고 한 게 시발점이었다. 난생 겪어본 첫 키스는 생각보다 기분 좋았다. 초반엔 뜨겁고 말캉한 게 입안을 들어와 헤집는 게 퍽 익숙지 않아 혀가 빳빳하게 굳었지만 금방 익숙하게 뒷목을 잡고 느릿하게 주무르는 승민의 손에 힘이 풀렸고, 입안을 여기저기 헤집어대는 혀에 몽롱해졌다. 종국엔 저도 승민의 볼을 잡고 열심히 혀를 움직였으니 말 다 했다. 러닝 타임 3시간 중 한 시간 반을 날려 먹었다. 키스를 하느라.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즈음이 되어서야 둘은 아쉽게 떨어졌다. 퉁퉁 부은 입술로 DVD방에서 나오자마자 승민은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쭈쭈바 두 개를 사 들고 왔다. 웬 아이스크림인가 싶었는데 손수 봉지를 까 꼬다리를 떼주면서 말하는 거다. 입술 뜨겁지. 땡땡 부었어. 식혀야 돼. 손수 입에 쭈쭈바까지 물려준 김승민은 과하게도 배려심이 넘쳤다. 그 날 내려가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둘은 역 화장실 칸에 들어가 또 한 번 키스했다.

 

이제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자연스레 마주치는 눈빛이 조금 짙어졌다 싶으면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몇 번 해봤다고 이제는 꽤 혀를 쓰는 것에 익숙해진 정인은 반사적으로 눈도 잘 감고 승민의 목도 넙죽 넙죽 끌어안았다.

 

사귄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미 혀도 섞고, 모텔도 대실 해서 헐 벗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자던 날, 정인은 내내 울었다. 8할이 아파서이긴 했지만 세심하게 신경 써주고, 기분 좋게 해주려 애쓰는 승민이 좋았다. 아프면 말해. 싫어도 말해. 바로 그만둘 테니까. 조근조근 다독여주는 목소리에 꾸역꾸역 참다가도 기어이 눈물을 흘리는 저를 내려다보며 승민은 수도 없이 눈물을 닦아줬다. 울지 말라고 눈가고 볼이고 입가고 여기저기 입을 맞춰주는 다정함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것들뿐인지라. 열아홉 정인은 그저 스무 살 승민이 좋았다. 마음에도 없었다면 애초부터 거금을 써가며 서울을 오가지도 않았을 테다.

 

부산으로 돌아갈 때, 곧 종강하면 부산에 내려갈 여유가 있을 거란 그의 말과는 달리 12월 초 기점으로 승민에게서 연락이 뜸해졌다. 1은 사라졌지만, 답이 없어 방치된 카톡방을 며칠 동안 노려봤는지 모른다. 우리 다음엔 언제 만나느냐 톡을 했더니 5시간 후 답장이 왔다.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동기들끼리 봉사활동을 다녀야 해서 만나기 힘들 것 같다는 답변이었다. 그리고 의심은 의심을 낳았다. 근데 만약 봉사가 아니라 거짓말이라면?

 

페북 친구는 아니지만 이름을 검색하는 것쯤이야 쉬웠다. 10분 만에 찾아 들어간 그의 페북은 20분 전에 올라온 사진이 마지막이었다. 술집에서 친구들과 다 같이 모여 찍은 사진. 그 아래로는 어제 다른 친구의 페북이 태그된 사진이 보였다. 스크롤 바를 내리며 발을 달달 떤 정인이 코웃음을 쳤다. 바쁘다고 한 게 친구들이랑 노느라 바쁘다 하신 거였어? 스크롤을 내려도 내려도 줄창 술집에서 찍은 사진들에 태깅된 승민뿐이다. 계속 보고 있으면 울화가 치밀 것 같아 정인은 신경질적으로 페북 앱을 껐다. 왜 사람들이 이런 걸 판도라의 상자라 하는지 알겠다. 물론 서치 해 들어가 확인한 저가 제일 멍청이지만 사진을 보고 확인사살을 당하니 이쯤 되면 승민이 저를 가지고 노는 건가 싶었다.

 

10대는 그 누구보다 치기 어렸다. 기다 아니다 확실한 게 필요했고, 저한텐 바쁘다 해놓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김승민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결국, 짜증이 한발 앞선 정인은 한동안 침대에 누워 뒤치락거리다, 2시간 전 승민이 대답한 채팅방에 들어가 꾹꾹, 한껏 짜증을 담아 키패드를 눌렀다.

 

 

[형은 저랑 자려고 만나죠?]

 

 

순전히 홧김이었다. 10분 뒤면 제정신으로 돌아와 양정인 미쳤어, 등신, 천치라고 욕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을지 모르지만, 인간은 순간에 충실한 동물이라, 지금 막 카톡을 보낸 순간 정인은 후회되질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모 아니면 도였다. 채팅장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노라니 1은 금방 사라졌다. 20분 전이 술집이었으니 아직도 술집일 터였다. 잠시 술 마시다 쉬는 타임이기라도 한가보다. 세우고 있는 한쪽 다리 무릎 위에 남은 다리를 올린 정인은 또다시 발을 달달 떨었다. 할머니가 본다면 복 달아난다고 발등을 때렸겠지만 불안하면 반사적으로 나오는 버릇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형 너는 뭐라 대답할래. 1은 사라졌으니 이제 남은 건 승민의 대답뿐이었다. 내심 정인은 승민이 아니라고 해주길 바랐다. 내가 왜 너랑 자려고 만나, 정인아.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그런 소릴 해. 주말에 형이 내려갈까? 원하는 시뮬레이션의 대답은 그랬다. 그런 대답이 와 주길 내심 바랐다. 적어도 승민이 저처럼 진심이었으면 했으니까.

 

노려보기만 하던 화면이 이내 자동으로 꺼져 컴컴해졌다가, 가벼운 진동과 함께 대기화면에 답장이 떴다. 차마 보지 못하겠는 마음에 정인은 두 눈을 꾹 하니 감아버렸다. 가슴이 제 맘대로 뜀박질을 쳐댔다. 전처럼 똑같이 다섯 시간 후에나 보낼 것이지 왜 이렇게 일찍 보냈대. 한껏 맴도는 긴장감 속에서 방 안은 적막했다. 제발, 제발, 하나님. 모태신앙이지만 잘 찾지 않던 하나님을 절실하게 불렀다. 기도문까지 중얼중얼 외다 꾹 감고 있던 눈을 차츰 뜬 정인은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승민에게서 온 카톡을 확인했다.

 

 

[승민이형♥ : 너도 그런 거 아니야?]

 

 

시뮬레이션이 울고 갈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예상은 했어도 저런 식의 대답이 올 줄은 몰랐다. 배신감에 달달 입술이 떨렸다. 잠시간 승민의 카톡을 말 없이 쳐다보던 정인은 그대로 전화번호부에서 승민의 번호를 삭제했다. 카톡도 차단을 먹였다. 만남 어플도 미련 없이 삭제했다. 그 와중에도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 베갯잇을 적셔댔다. 진짜. 개 짜증나. 존나 짜증나. 씨발. 개새끼. 재수 없는 새끼!!!!! 기어이 정인은 악을 지르며 엉엉 눈물을 터뜨렸다. 비록 짧은 시간이긴 했으나 여태껏 제 마음이 단번에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그럴 거면 다정하지나 말던가. 실연이 이렇게 슬픈 거였으면 애초에 만남 어플을 깔지도, 승민과 만나려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내가 다신 저딴 새끼랑 만나나 봐. 이를 바득바득 갈며 정인은 눈물을 훔쳤다. 그게 열아홉 겨울이었다.

 

그리고 스무살 봄. 대학에 들어갔다. 여느 대학교 앞 원룸촌이 그랬듯 싱크대, 가스렌지, 전자레인지, 화장실 필요한 건 다 구비 되어 있었지만 집이 좁았다. 그나마 제일 맘에 들었던 넓은 신식 투룸 건물은 한 달 80을 부르길래 식겁하며 단번에 포기했다. 80은 저에게 사치였다. 운 좋게 서울에 사는 엄마 친구 아들이 고3이라 과외 선생을 구한다기에 한다고 했다. 엄마에게 손을 벌릴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는 제 선에서 생활비라도 충당해야만 했다. 짐을 다 정리하고 침대에 시트까지 갈아 끼운 정인이 쓰러지듯 침대 위로 누웠다. 내가 상경이라니. 아직도 주변에서 서울말씨를 쓰는 사람들의 말만 들려도 귀가 간지러웠다.

 

그렇게 승민을 차단 먹이고 남은 3개월 동안 놀랍게도 정인은 이 남자 저 남자 만났다. 비록 단순 만남에 대실 해서 유사로 끝내는 게 다긴 했다. 올곧이 김승민에 대한 경험만 가진 채로 서울로 올라가기는 싫었다. 정말 꼴 같지 않은 자존심이었다. 이제는 대학도 들어갔겠다, 교내 퀴어 동아리든, 밖이든 제정신 박힌 남자 하나 만나 제대로 된 연애를 해봐야겠다 싶었다. 인생 스무 살부터 시작인데, 암. 괜찮은 남자야 깔리고 널렸을 거라고. 그렇게 부푼 맘을 안고 정인은 OT 준비를 했다. 나름 아끼는 후드티랑 바지를 챙겨 입고, 집합하라던 장소에 모여 처음 보는 동기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참석이 자유여서인지 모인 사람들은 많지는 않았다. 이미 다 줄을 세운 타과와는 달리 생판 모르는 신입생들만 있는 정인의 과는 인솔자를 찾으라 두리번대기 바빴다.

 

머지않아 인파를 뚫고 학회장으로 보이는 선배가 나타나 안경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여기 사복과 맞죠? 네에. 늦어서 미안해요. 봉활 하고 오느라 시간이 좀 늦어졌어요. 저 따라오세요. 앞서 걷기 시작하는 선배를 따라 뭉쳐있던 무리 들이 줄을 맞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학교를 빠져 나와 근처 술집에 들어서자 드문드문 테이블에 선배로 보이는 이들이 앉아있었다. 학회장은 줄을 지어 선 채 긴장한 신입생들을 보며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다들 편하게 앉아요. 어차피 오늘은 얼굴들 익히고 궁금한 거 물어보고 대답해주는 그런 자리니까. 우리는 뭐 크게 대면식이다 뭐다 그런 것도 없거든요. 사회복지과답게 군기 같은 것도 없나 보다. 눈치를 보다 하나둘 앉는 동기들을 보며 정인도 대강 보이는 빈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엔 아까 들어오기 전부터 앉아있던 선배로 추정되는 이가 있었다. 과와는 어울리지 않게 벙벙한 힙합 맨투맨과 테크웨어 바지 차림에 귀까지 뚫고 있어 겉모습만 보면 날 티 나게 생겼다. 인상까지 제법 매서워 테이블에 앉은 셋이 일제히 눈치를 보자, 당사자는 금방 이럴 줄 알았다며 조금은 억울 하단 듯이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와, 진짜. 내가 생긴 건 이렇게 생겨 먹었어도 성격 좋다는 소리는 많이 듣거든요, 무섭다고 눈치 보지 말아요들.”

 

 

이미 음식은 세팅한 지 오래였고, 버너의 불을 켠 선배는 조잘조잘 입을 열었다. 여기 골뱅이 소면이랑 오삼새 진짜 맛있거든요? 이따가 끓으면 덜어줄 테니까 한입씩들 맛봐봐요. 친구들. 배고프죠. 아, 그러고 보니 통성명을 안 했구나. 나는 18학번 황현진이고, 스물하나. 현역 2학년이에용. 현진의 입에선 생김새와 달리 애살스러운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것저것 챙겨주는 현진의 모습에 바짝 세우고 있던 긴장이 풀렸다. 같은 테이블의 동기들이 돌아가며 가볍게 이름과 나이를 이야기했다. 각자 테이블마다 다르겠지만 정인의 테이블은 전부 다 현역이었다. 술잔 좀 채워달라는 학회장의 말에 맥주 뚜껑을 딴 현진이 빈 잔에 술들을 따라줬다. 다들 술들은 좀 해요? 우리가 군기는 안 잡아도 술은 진짜 잘 맥이는데.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현진의 뒤로 일어선 학회장의 건배사가 이어졌다. 아, 그렇다구 해서 겁먹지 않아두 돼요. 못 마시겠다고 하면 억지로 먹이지는 않으니까. 얼마 안 가 잔 네 개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물기가 맺힌 잔을 들며 어색하게 웃어 보인 정인은 머리를 굴렸다. 어떡하면 많이 안 마시고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그렇게 술 한 잔을 들이켜는데 뒤에서 등을 두드리는 손이 있었다. 아는 얼굴도 없어서 부를 사람도 없을 텐데. 반 정도 마시고 있던 잔을 뗀 정인이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보이는 건 초중고 동창도, 가벼운 만남으로 만났던 사람들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 이곳에는 없어야만 할. 3개월 전, 근 몇 달 동안 절 쥐락펴락하다 울게 만든.

 

 

“정인이?”

 

 

김승민이었다.

 

 

**

 

 

부스럭부스럭 대는 소리에 정인은 잠에서 깼다. 상체를 일으키려 하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다시 도로 누워버렸다.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떠 주변을 살폈다. 배경은 제집이 아니었다. 집을 고를 때 저가 제일 탐냈었던, 월 80짜리 큰 투룸이었다. 탁상 위 디퓨져하며 미니 전등에 나란히 세워진 책들까지 정돈이 착실하게 된 방을 보며 정인은 속으로 기함했다. 도대체 얼마나 깔끔을 떨어서 집이 이렇게까지 깨끗해? 잘은 모르겠지만 집주인이 결벽으로 유난 하나는 엄청 부릴 듯 했다. 어젯밤 적게 마시겠다던 의지와 달리 정인은 술을 들이부었다. 그도 그럴 게 눈앞에 예상도 못 한 김승민이 있었으니까. 만나도 어떻게 같은 대학 그것도 같은 과 선후배로 만나나 싶었다. 정말 지독한 인연이여. 얼굴을 보자마자 드는 생각은 그저 좆됐다, 였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원룸에 있는 짐을 도로 싸서 부산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직 입학 무를 수 있나. 아님 자퇴를 해야 하나. 자퇴를 하자니 이 대학 합격하자마자 아파트에 현수막 걸고 같은 둥 온 호수에 떡을 돌리며 자랑을 해대던 엄마가 생각나 눈물이 났다. 백퍼 이 학교 안 다니겠다 하면 엄마는 뒷목 잡고 쓰러지겠지. 그렇다고 계속 이 학교에 다니자니 저가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선택의 기로에 선 정인의 도피처는 술뿐이었고, 그래서 코가 비뚤어져라 마셨다. 여기저기서 건네오는 술 마다하지 않고 다 마셔댔다. 그러니 필름이 끊길 수밖에 없었고, 꽐라가 된 저를 부축해 먼저 들어가 보겠다 하던 이의 옷에 거하게 토를 한 것까지. 기억이 났다.

 

머리를 쥐어뜯던 정인은 순간 제 몸이 허전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맨몸에 브리프 차림으로 이불만 덮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신이 말끔하게 돌아오니 허리도 찡한 것이 느껴졌다.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만약 이걸 엄마에게 들킨다면 뒷목에서 끝나지 않고 제 머리털이 죄다 뽑히고도 남았다. 진짜, 미쳤어. 돌았어.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사고를 쳐도 단단히 쳤나 보다. 이불을 만지작대며 잠시 고민하다 정인은 몸을 일으켰다. 우선 저를 들쳐 안고 온 이에게 사과해야 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저를 데리고 오느라 얼마나 욕을 봤을지 안 봐도 뻔했다. 열어진 방문에선 직방으로 부엌이 보였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뒷모습은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북엇국 냄새다. 저 때문에 만드는 해장국인 것 같아 머쓱함에 큼큼, 목소리를 다듬자 기척을 느낀 건지 국자를 젓던 뒷모습의 이가 몸을 틀어 제 쪽을 쳐다봤다.

 

 

“정인이 일어났어? 머리 아프지.”

 

 

그러니까, 형이 왜 또 여기에 있는 건데요.

 

금방 눈앞에 물이든 컵이 들이밀어 졌다. 꿀 탔어. 어제 많이 마셨잖아. 시발, 설마. 설마…? 아닐 거야. 형이랑 그럴 리가 없지 내가. 그렇게 이를 바득바득 갈아댔는데. 목이 타서 받아든 꿀물을 어쩔 수 없이 들이켰다. 두 눈은 자연스럽게 김승민의 목덜미를 훑었다. 없기를 바랐던 검붉은 울혈이 여기저기 자기주장들을 펼쳐댔다. 버릇이었다. 흥분하면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물고 빨아버리는 버릇. 그래서 초반에 승민이 무척 진을 빼며 다음날 대일밴드를 사와 목에 붙이던 일까지 있었더랬다. 아연실색한 저를 알면서도 그러는 건지 승민은 눈치 없는 척 말을 이어 갔다. 오랜만에 하는 거라고 너 엄청 엄살 부리더라. 금방 비워진 컵을 부드럽게 뺏어든 승민은 밥 다 됐으니 기다리라며 다시 방을 빠져나갔다.

 

승민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는 척을 해오는 걸 애써 모른 체하며 술을 들이켰고, 기어이 고주망태가 되어버린 저를 일으켜 먼저 가보겠다고 하던 김승민. 정인아, 똑바로 좀 걸어봐, 응? 취한 와중에도 그런 다정한 말투가 짜증이나 시비도 걸어댔다. 형은 그렇게 아무한테나 다정해여? 우리 이미 쫑난 사이인데 왤케 매너남처럼 굶? 재섭써. 뭐가 웃긴지 금방 부축하는 김승민의 입에선 김빠지는 헛웃음이 들려왔지만, 정인은 나름 진지했다. 인정하기 싫어도 순정이었다. 어플로 만난 건 조금 모양 빠지긴 하다. 그래도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형이었고, 승민의 다정함에 반했다가, 그 다정에 상처를 받았다. 근데 진짜 생각해 보니 웃기잖아. 자려고 만난 거였으면. 왜 그렇게 맛난 건 많이 사준 건데. 배려는 왜 그렇게 잘해준 건데. 그날만 생각하면 속이 화병 나듯 열이 올랐고, 눈물이 핑 돌았다. 나쁜 놈. 승민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욕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저를 끌고 걷는 당사자는 답이 없었다.

 

놔요, 혼자 걸을래. 되지도 않는 고집도 부려댔다. 알코올에 머리가 절여진 것처럼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눈앞이 드문드문 페이드아웃 되듯 새카매졌다 돌아왔다 하는데 혼자 걷겠다고 뻘 소리를 하는 저가 웃겼다. 승민은 생 떼 쓰는 걸 제일 싫어했다. 되도 않는 떼를 쓰는 저 때문에 그의 입에서 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어깨를 끌어안은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놓으면 금방 쓰러질 애가 그런 소릴 잘한다. 얼른 들어가자. 혼 내는 말투지만 목소리는 여적 다정하다. 아직 쌀쌀한 이른 봄의 밤공기에 머리가 아팠다. 희미한 담배 냄새와 익숙한 향수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러대니 안 좋은 속이 더 울렁댔다. 무슨 패기로움인지는 몰라도 정인은 승민을 한번 밀쳐 냈다. 안 밀려날 것처럼 굴던 승민도 차츰 성질이 난 건지 떠밀린 힘에 보란 듯이 정인에게서 몸을 뗐다. 지탱해 주던 승민이 한 발짝 떨어지자 또 한 번 취한 몸이 크게 휘청였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정인이 그런 승민을 향해 골이 난 얼굴로 고개를 팩 들었다. 진짜 떨어지란다고 떨어지냐!!! 맨정신이라면 절대 못 할 소리를 원룸촌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양정인. 지금 새벽 한 시야. 조용히 해. 형 너라면 조용하게 생겼어?! 진짜 이 나쁜 놈아!! 사람 실컷 데리고 놀다 버리니까 재밌…!!! 우욱. 그 언젠가 만나면 실컷 욕 해주고 돌아서야지. 했던 말들은 처참히도 마무리되질 못했다. 치밀어 오는 토기 때문에.

 

욕이라도 퍼부을 법도 한데 토를 하는 정인의 등까지 두드려줬다. 이쯤 되면 성자나 다름없었다. 다 토했냐는 물음에 끄덕이는 정인을 다시 부축한 승민의 입에선 큰 한숨이 흘렀다. 세 번째였다. 참을성 하나만큼은 끝내주지만 깔끔하지 못한 것은 죽어도 용납 못 하는 승민이었다. 그래서 집에 정인을 데리고 오자마자 바로 욕실로 직행했다. 아까 전 오바이트를 하느라 드문드문 튄 흔적을 놓치지 않고 봤기 때문에 바로 빨아야만 했다. 정인아. 만세 해봐. 만세. 제정신도 아닌 데다 힘이 없는 애가 자의적으로 만세를 할 리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승민을 그리 말을 하며 후드티 손으로 손을 집어넣어 정인의 소매에서 팔부터 뺐다. 다행히 안에 반소매 티를 받쳐입고 있어 새로 옷을 따로 입히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됐다. 손님용 칫솔 하나를 까 대강 이를 닦이고, 바지마저 벗기고 화장실 앞으로 내쫓듯 밀어냈다. 방에 들어가서 자고 있어. 형도 씻고 나갈게. 다시 닫히는 문과 물줄기 소리에 입술을 삐죽댄 정인은 승민의 방으로 거의 기어가듯 걸어갔다. 추웠다 따듯한 곳으로 들어오니 취기가 더 빠르게 온몸에 퍼지는 기분이었다.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워있으니 온몸이 노곤했다. 두 눈을 느릿느릿하게 감았다 뜨기를 몇 번을 반복하는 사이, 곧 젖은 머리를 털며 승민이 방을 들어왔다. 짧은 추리닝 반바지에 반팔티 차림새였다. 정인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런 승민을 훑었다. 그런 저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시선을 승민이 모를 리 없었다. 몇 번 자본 경험상 정인의 눈빛이 담고 있는 의도 또한 모를 리 없었고. 둘 사이에 먼저 섹스텐션을 부추긴 건 승민이 아니라 정인 본인이었다. 어지러울 텐데, 자자. 정인아. 침대 위로 올라와 이불을 정리하려는 승민을 그대로 눕혀버린 정인이 위에 올라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머리에 얹어져 있던 수건은 떨어졌고, 당황한 승민이 무어라 입을 떼는 것보다 셔츠 속으로 들어간 정인의 머리가 더 빨랐다. 아랫배에 닿아오는 뜨거운 입김에 허벅지 안쪽에 힘이 들어갔다. 뒤이어 배를 이로 깨물어왔다. 저릿함에 승민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졌다. 형, 남자친구 생겼어요? 아님 여자친구? 구질구질한 질문을 던져대며 정인은 셔츠 속에서 열심히 얼굴을 움직였다. 입술이 타고 올라오면 올라올수록 셔츠가 위로 젖혀져 맨살이 드러났다. 가만히 그런 정인의 행동들을 받아주던 승민은 가슴에서 뗀 입술이 옷에서 빠져 나와 목을 깨물려 들 때 그대로 몸을 반 바퀴 굴러 정인을 눕혀버렸다. 전만 해도 이러면 부끄러워하던 애가 이제는 제법 대담하게 바지 속으로 손까지 집어넣는다. 만지는 손놀림도 늘었다. 느릿하게 위아래로 쓸다 살살 엄지로 귀두를 비비는 자극에 승민이 거친 숨을 뱉었다. 정인의 브리프 속으로 집어넣은 승민의 손도 그에 맞춰 진득하게 움직였다. 색색 대는 정인의 입술 너머로는 알콜 섞인 민트 냄새가 났다. 몽롱한지 눈에 바짝 힘을 주려 하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가만히 그 얼굴을 내려다보다 코끝을 맞대 부비자 끙끙대던 입술이 승민의 윗입술을 물었다. 어라, 이거 봐라. 전엔 부끄러워서 먼저 키스도 못 했던 앤데. 이제는 먼저 능숙하게 입안으로 혀도 집어넣을 줄 알고, 입천장도 간질일 줄도 알았다. 어이가 없어 키스를 하다말고 혀를 밀어내 고개를 뗀 승민이 웃었다.

 

 

“너 형 없을 때 다른 애랑 했어?”

“…그걸 알아서 뭐하게?”

 

 

어쩜 이렇게 얄미운 소리만 잘도 골라 묻는지 모르겠다. 버린 건 지면서 추궁하는 질문에 날카롭게 반응한 정인이 부러 쥐고 있는 것을 더 꽉 쥐어버렸다. 때리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하니 소심한 복수였다. 아아. 아퍼. 엄살을 피우는 승민도 지지 않듯 정인의 것을 빠르게 손으로 훑었다. 이미 프리컴까지 흘리는 제 것과 달리 정인의 것은 아직 반밖에 서질 못했다. 형아, 내 짐 취해서 잘 안 서나 보다. 언제 고양이처럼 굴었냐는 듯 그새 눈썹을 내리고 사투리까지 써대며 찡찡댄다. 그런 정인을 내려다보며 승민은 성급히 허벅지에 걸쳐져 있던 브리프를 다 벗겨 버렸다. 안 서면 어때, 정인아. 넣는 건 형인데. 이미 형 껀 다 섰으니까 괜찮아. 협탁 서랍에 손을 뻗어 젤과 콘돔을 꺼내 드는 승민을 본 정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챙김받고 귀염받는 게 좋았다. 그걸 승민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집 안에선 삼 형제 중 둘째인 저를 얼러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 초반엔 오글거렸다가도, 종종 승민이 저에게 귀엽다, 착하다, 예쁘다 소릴 하며 앞머리를 넘겨주고, 귓바퀴를 만지고, 볼에 뽀뽀해줄 때면 기분이 좋았다. 한동안 넣질 않아 뻑뻑한 길을 트는 데엔 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도 승민은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손가락을 늘려가며 정인을 살폈다. 괜찮아? 안 이상해? 아프면 바로 말해. 알겠지. 아프다고 하면 바로 빼지도 않을 거면서, 그래도 다 저를 위해주는 말 들이라 정인은 또다시 눈물이 핑 돌 뻔했다.

 

손가락으로 공을 들인 탓인지 삽입은 제법 수월했다. 끝까지 다 밀어 넣은 승민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자 끙끙대던 정인의 입에서 얼마 안 가 앓는 소리가 흘렀다. 비록 몇 번 해보지는 않았으나 그게 좋아서 나오는 소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좁혀진 미간 새로 잘게 주름이 잡혔다. 그새 이마에 땀이 맺힌 얼굴을 훑어보며 느끼는 곳을 찾아 승민이 여기저기 찔러보던 찰나 깊숙하게 찔러넣은 한 지점에서 정인이 입을 벌렸다. 아, 아아. 거기. 여기? 여기 좋아? 응, 으응. 흐으. 좋아하는 곳만 자극받자 그새 인상을 푼 정인의 두 눈이 거의 감기다시피 했다. 정인아. 형 봐야지. 그러면 괜한 고집이 생겨 승민은 정인이 저를 봐주기를 종용했다. 보일러를 튼 따듯한 방 안에 더운 숨이 부유했다. 형, 혀엉. 애처럼 저를 부르며 매달려오는 정인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끼운 승민이 저보다 조금 더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눈이며 귀며 코며 입술이고 안 붉은 곳이 없다. 마음 같아선 다 잘근잘근 깨물어 삼켜 버리고 싶었다. 애써 그 욕구를 참아내며 승민은 아쉽게나마 눈에 보이는 정인의 귓불을 깨물었다.

 

 

“그래서, 형. 아까, 으응. 내 질문, 왜, 대답. 안 해, 줘.”

 

 

대답이고 뭐고 눈앞에 보이는 너랑 뒹굴고 있는데 대답이 나오겠냐고. 열심히 귀를 빠느라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 대신 승민은 혀를 내밀어 귓바퀴를 핥았다. 그게 자극적인지 박을 때마다 점점 오므려지는 두 무릎을 가볍게 무릎을 세워 저지한 승민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정인아 다리 조금만 더 벌려보자. 제 말에 대답은커녕 눈치 없는 척 다리나 좀 더 벌려보라 하는 승민이 짜증이 날 만도 했다. 반항하듯 벌리기는커녕 두 다리가 허공을 바동댔다. 아, 형 쪼옴! 왜, 왜. 뭐. 뭐. 성질을 부리자 그제야 귀에서 얼굴을 뗀 승민이 움직임을 멈추고 땀에 젖은 정인의 앞머리를 넘겨 주며 얼렀다.

 

 

“애인 생겼냐고오….”

 

 

구차하게 느껴져도 좋다. 찌질하다 생각해도 좋다. 근데 애인 있다고 하면 눈물 좀 날 거 같은데. 저 얼굴 저 성격에 애인이 그새 안 생겼을 리가 없겠지만. 저랑 연락이 끊긴 뒤 어떻게 지냈는지도 궁금했다. 한동안 말없이 승민은 정인을 내려다 봤다. 오랜만에 본 정인은 이전과 꽤 달라졌다. 고집스레 앙다문 입술 하며 이따금 무시하거나 흘겨보는 눈이 낯설었다. 그리고 지금 김승민의 시점에서 양정인은 아직도 알코올에 취해 해롱해롱한 상태였다. 안 그래도 교정을 하느라 그닥 좋지 않은 발음이 취해서 거의 뭉개지다시피 한 것만 봐도 그랬다. 어차피 지금 말해 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지만 고집을 부려대니 말해 줄 수밖에. 정인의 두 다리를 잡아 들어 어깨에 걸쳤다. 한층 더 깊어진 삽입에 정인이 헉, 밭은 숨을 뱉었다. 그와 반사적으로 내벽이 조여왔다. 단번에 몰려든 자극에 눈살을 잠시 찌푸리던 승민이 정인의 눈가를 문지르며 입을 뗐다.

 

 

“내가 애인이 있으면 지금 너랑 이런 짓 하고 있겠니, 정인아.”

 

 

그리고 곧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제아무리 부정해 보려 해 봐도, 조작 좀 해보려 해도, 불가능했다. 어젯밤 섹스 도중 제 입에서 나온 소리는 듣지도 못할 민망한 신음과 엉엉 울며 좋다는 말뿐이었다. 자꾸 좋다는 소릴 해대서, 종국엔 승민이 웃으며 그렇게 좋냐 물었고. 고개를 끄덕대며 더 세게 해달라 겁도 없이 뱉은 것도. 그리고 그 말에 자극받은 승민이 꽤 거칠게 움직이다, 몰려오는 사정감에 빠르게 움직이던 허리를 빼 빳빳이 선 성기에 씌워진 콘돔을 벗기고 몇 번 흔들다 제 배 위로 사정을 하는 것까지. 또렷이 다 기억났다. 게다가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저가 더 하자고 졸라 두 번 더 했던 것도. 미쳤다. 진짜, 미쳤어. 몇 주 금욕했더니 몸 정에 미쳤구나, 정인아. 속으로 욕을 삼킨 정인은 할 수 있다면 제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밖에서 밥 먹자는 소리가 발랄하다. 네. 마지못해 대답하던 정인은 제 목소리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얼마나 소릴 지른 건지 듣기 흉하게 갈라져 있었다.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둘은 밥을 먹었다. 식사 내내 말을 먼저 꺼내는 건 승민 쪽이었다.

 

 

“난 네가 우리 대학 올 줄 꿈에도 몰랐어.”

“저도요.”

 

 

알았으면 원서를 넣지도 않았겠죠.

 

 

“어떻게 와도 같은 과를 와? 형이 말해 준 적 없잖아.”

“네, 그랬죠.”

 

 

과라도 다르게 넣었으면 적어도 이런 식으로 만날 일은 없었을 텐데.

 

 

“어제는 그렇게 반말 찍찍 까더니 오늘은 또 제정신 돌아왔다고 깍듯하게 존댓말 써, 정인이?”

“아, 그건. 잊어 주세요.”

 

 

잠시 발끈하다 문득 떠오르는 어제 일에 급 민망해져 정인은 고개를 숙이고 밥만 퍼먹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승민이 웃는 게 느껴졌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는데 승민은 넉살 좋게 잘도 먹었다. 내가 요리실력이 그렇게 좋지는 못해서. 레토르트에 파랑 콩나물만 더 넣었는데, 맛있다, 그치. 네, 네. 자퇴하면 정말 호적에서 제 이름이 파일지도 모르니 정인은 제 나름의 루트를 짰다. 얼른 눈앞에 있는 밥을 해치우고, 옷을 챙겨 입고, 어제는 대단히 죄송했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나오기. 그리고 최대한 김승민을 피해 다니는 것. 근데 생각해 보니 짜증나네. 마음에도 없는 동생이 유혹 한번 했다고 그새 또 같이 자 주는 게 사람인가. 괜한 자존심이 상해 입안에 미어지라 집어넣은 밥을 꼭꼭 씹던 그 와중이었다.

 

 

“근데 정인아.”

“네?”

“왜 그때 이후로 연락 안 했어?”

 

 

왜 않긴요, 인간아. 네가 나랑 자려고 만난 거라면서요. 저 형이 진짜 어제부터 사람 서럽게 만드네. 하고 싶은 말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미 다 지난 이야기를 이제 와 꺼낸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래서 귀찮은 얼굴로 정인은 목만 긁적였다. 아니, 뭐. 형이 제 질문에 너도 그런 거 아니냐고 해서. 별달리 할 말도 없고, 그냥. 그냥 차단 먹이고? …어떻게 아셨어요? 그럼 내가 모르겠니. 시도 때도 없이 카톡을 보냈는데 1은 안 사라지지, 네 프사도 안보이지. 명백히 차단 아니냐고. 명백한 제 쪼잔함이 고스란히 승민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정인은 쪽팔려서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 나가고 싶었다. 아니, 그래도 너무 하네. 마치 저가 잘못했다는 것처럼 구는 승민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잘못한 건 본인 아닌가. 아까만 해도 구차하니 말하지 말자 했던 마음이 금방 뒤바뀌었다. 원래 사람 맘은 갈대 같은 것 아니겠냐고.

 

 

“근데 말은 바로 하세요. 나쁜 건 형이죠.”

“나? …나 왜?”

“제가 틈만 나면 언제 또 만나요, 언제 볼 수 있어요, 보냈는데. 그럴 때마다 자꾸 나중에 보자 하고, 시간 없다 하고. 당연히 나한테 질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아요?”

“…그리고?”

 

 

되묻는 질문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정인은 고개를 들어 승민을 쳐다봤다. 당황할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차분한 얼굴이 더 말해보란 듯이 고갯짓을 했다. 어느새 수저까지 내려놓고 내려놓은 두 엄지손가락을 맞댄 채 만지작거리던 정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다 봤어요. 형 페북.”

 

 

나한테 시간 없다고 하고, 대답도 다섯 시간이나 늦게 했을 때. 친구들하고 술 마시고 있던데요. 태그된 거 다 봤어요. 쪽팔림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냥 이렇게 벌려진 판 다 털어놓자 싶었다. 난 나름 형이랑 잘해보려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챙겨주는 형이 좋고, 얼굴도 내 취향이었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형이 카톡 대답도 늦고, 맨날 일 생겨서 바쁘다 하고. 속상하고 의심 갈 수밖에 없죠. 페북 염탐한 건 미안해요.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어요. 그날 술집에서 찍힌 사진 보고 욱해서 형한테 무작정 질문한 거예요. 형은 나랑 자려고 만나는 거냐고. 나는 진짜 형이랑 말만 않았지, 연애 비슷한 걸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형은 단지 나랑 자려고 만나는 거 같아서. 불안했어요. 아니길 바랐고요.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형이 너도 그런 거 아니냐면서요. 그 소리에 누가 상처를 안 받겠냐고요. 형은 아니었겠지만 전, 진짜 형 좋아했어요. 뜻하지 않는 고해성사가 되어버렸다. 다시는 승민을 못 볼줄 알았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언젠가 해도 승민의 앞에서 털어놓는 날이 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제 고백에도 승민은 표정을 굳힌 채 덤덤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에 또 서러워져 흐르던 눈물이 봇물 터졌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었던 말도 다 했고,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이라면 다신 마주쳐도 인사 안 하겠지. 빠르게 눈물을 훔쳐내며 정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 고개를 든 승민의 눈을 쳐다보지도 않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옷만 챙겨입고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날, 그렇게 정인은 제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래,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기왕 같은 과 선배인데 나중에 MT나 학술제에서 같은 조가 될 수도 있으니 차단은 너무했나 싶어 차단 해제했다. 차단이 해제되었습니다. 지금 친구로 추가하시겠습니까? 취소와 친구 추가 버튼 중 잠시 고민을 하다 친구 추가 버튼을 눌렀다. 금방 새로운 친구에 뜬 승민이 제일 상단으로 올라왔다. 프사는 이전 만남 어플에서 봤던 베이지색 셔츠를 입은 프사였다. 그래, 이런 얼굴로 열아홉을 꼬셨지. 참나. 내가 무슨 부귀를 누리자고 저거에 홀랑 넘어갔냐. 회상에 잠기듯 중얼대며 침대 위를 뒹굴었다. 21학점을 듣지만 운이 좋게 9시 아침 수업 공강이 주 2회나 있었다. 일찍 일어나는 타입이라 큰 이득은 없긴 했지만, 자취방에서 두 시간 뒹굴뒹굴하는 건 나름 꿀이었다. 할 것도 없는데 어젯밤 보다 켜놓고 잠든 넷플릭스 영화를 이어서 볼까. 중얼댄 정인이 앱을 켜기가 무섭게 연속으로 카톡이 왔다. 카톡! 카톡! 카톡! 아, 진짜 누구야. 보낼 거면 한꺼번에 다 쳐 보내던가. 심드렁하니 정인은 상단 바를 내렸다.

 

 

[김승민 : 프사 보인다~ 차단 풀었나 보네ㅎㅎ]

[김승민 : 정인아. 너 우리 집에 두고 간 거 있어.]

[김승민 : 사진]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그날 난 내 옷 다 바르게 챙겨 입고 갔는데. 뭔 말도 안 되는 이야길 하고 앉아있냐며 정인이 귀찮은 손짓으로 카톡창을 열었다. 급 나한테 미련이 생겼나. 그렇다 한들 미련도 참 유치하게 떠는구나 싶었다.

 

 

“…….”

 

 

만날 건수를 잡으려고 부러 저에게 말을 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거만함을 비웃듯 김승민이 찍어 보낸 사진을 확인하자마자 정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승민이 보낸 사진 속 저가 두고 간 팬티는 분명 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군대에 말뚝 박고 있는 친형이 팬티 몇 장에 제 이름 자수를 아주 요란하게 수놨기 때문이다. 자취하거나 애들끼리 있으면 팬티가 뒤섞이는 게 다 반수라고 제 형은 필요 없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런 거 내동 필요 없다, 필요 없다, 했지만 군바리 형은 완고했다. 밴딩 쪽에 작은 궁서체로 양정인, 빼도 박도 못하게 제 이름이 박혀 있어 제 팬티가 아니라 할 수도 없었다.

 

 

[ㅋㅋ;; 그게 왜 거기 있지;]

[김승민 : 그 날 끝나고 정리하다가 네 팬티 더러워져서 빨고 내가 가진 여분 새 팬티로 입혔거든. ㅎㅎ]

 

 

미친, 어쩐지. 손빨래할 때 내가 이런 고급팬티를 가지고 있었나 싶었다. 아오. 등신. 작게 탄식을 한 정인은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한 대 쳤다.

 

 

[가지러 갈게요ㅋㅋ; 수업 중이세요?]

[김승민 : 응ㅎㅎ 안 그래도 챙겨 왔어. 3교시 수업 있지? 2교시 끝나고 쉬는 타임에 볼까?^^]

 

 

저 웃음이 마치 제 목숨을 잡고 있는 웃음 같았다. 내가 이래도 너 나랑 안 만날래?^^같은 악마의 웃음. 이런 민망한 비밀은 승민 혼자만 알고 있는 것으로 족했다. 그래서 정인은 그 제안을 넙죽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네 ㅋㅋ 갈게요. 연희관으로 가면 되죠? 차마 ㅗ를 붙이지 못한 건 승민에게 붙잡힌 인질이 너무나도 제 치부여서 그랬다.

 

강의실에서 우르르 빠져나오는 사람들 속에서 승민이 보였다. 먼발치에서 서 있던 정인이 손을 들어 보이자 동기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그가 제 앞으로 달려왔다. 많이 기다렸어? 아뇨, 5분 전쯤 도착했어요. 혹여 저가 보이지 않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까 노심초사하며 달려왔다는 소리는 집어넣었다. 승민이 들고 있던 쇼핑백 봉투를 내밀었다. 이 형 이럴 땐 참 센스 있단 말이야. 다른 애라면 검은 봉지에 대강 집어넣어서 줬을 텐데. 번거롭게 만들어 죄송하다며 쇼핑백을 받아 들려고 했는데, 쇼핑백이 정인의 손을 피해 위로 올라갔다. 이게 도대체 뭐 하자는 시츄에이션? 슬밋 인상을 쓰자 승민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장난스레 웃어 보인다.

 

 

“장난하지 말고요, 선배.”

“와, 이젠 선배라고 부르네.”

“선배를 선배라 부르지 뭐라 불러요, 그럼.”

“형 좀 섭섭해 지려 한다. 정인아.”

“아, 얼른 주기나 하세요.”

 

 

짜증스레 말한 정인이 승민의 앞에 손을 까딱였다. 잔말 말고 빨리 달라는 뜻이다. 장난치는 거 재미없다 했는데도 고집부리듯 승민은 여전히 손 하나 꿈쩍도 하질 않았다. 그저 두 눈만 깜빡여댈 뿐이었다. 슬슬 인내심에 한계에 다다랐다. 진짜, 팬티 하나 가지고 사람 불러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차츰 얼굴이 굳어가는 저의 안색을 캐치한 승민이 제 이름을 불렀다.

 

 

“정인아.”

“왜요. 갑자기 주기가 싫어졌어요?”

“너 나랑 한 번 제대로 만나볼래?”

 

 

뻘 소리로 만날 구실을 만들더니 기어이 이 형이 미쳐버린 건가 싶었다. 뭐요? 누가 누굴 만나? 되묻는 양정인의 표정은 험악한데 김승민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롭다. 저번엔 네가 네 말만 다 쏟고 갔잖아. 형 입장도 들어 봐 줘야 하는 거 아냐? 이성적인 반론이었다. 저 형은 왜 이런 때에도 차분한 거야. 어른스러운 행동에 괜히 지는 기분이 들었다. 입술을 씰룩이며 잠시 승민과 눈싸움을 벌이듯 하던 정인이 한숨을 쉬며 승민을 흘겼다. 그럼 어디 말해보든가요, 선배 입장. 잠자코 들어주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승민은 위로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려 정인의 손에 쥐여줬다.

 

 

“답장 늦고 약속 못 잡은 건 미안해. 근데 진짜 그때는 바빴어. 너도 이 학교 들어와서 곧 알겠지만, 동기들끼리 봉사활동도 하고, 지방 농촌 봉사도 다니느라 바빠질 때가 있거든. 그럴 땐 답장할 시간도 없고, 지쳐서 자느라 뭘 할 시간도 없어. 맨날 우리 봉활 하면 뒤풀이도 하거든. 페북에 올라온 사진들도 다 뒤풀이 사진들이야. 나도 진짜 너랑 그렇게 연락 끊길 맘은 없었어. 내가 그날 너한테 그렇게 대답한 건. 그래, 솔직히 애 같지만 인정할게. 그날 피곤한 데다 술도 들어가서 조금 감정적이었고, 네가 그렇게 물어봐서 조금 기분 나빴어. 얘는 내가 그냥 자는 게 좋아서 만나는 건 줄 아나? 나는 그런 게 아닌데. 아니면 얘가 날 그런 마음으로 만나고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나더라.”

“…….”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했어. 그렇게 보내고 정신 차리자마자 바로 사과라도 한 통 보내야지 싶었는데, 취한 애들 챙기고 집 보내고 하느라 보낼 타이밍을 놓쳤어. 이미 다시 카톡 들어갔을 땐 너한테 차단당한 상태더라. 더 이상 네가 나한테 마음 없는 줄 알고 나도 그냥 포기했지. 근데 OT때 널 본 거고, 취한 너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내 집 데려가서 재우려 데리고 나온 거야. 그리고 네가 자자해서 같이 잤고. 아, 오해하면 안 돼. 형은 당연히 아직 마음 있어서 너랑 잔 거야. 그때든 전이든 난 너랑 잔 거 후회 안 해, 정인아.”

“…….”

“대답이 이 정도면 될까?”

 

 

쓸데없이 진솔한 고백이다. 저가 어렸다. 제 입장이 있으면 상대방의 입장 또한 있는 건데. 저 혼자 단정 짓고, 저 혼자 정리하고, 혼자서 끝을 맺었다. 승민의 생각 따윈 제대로 물어볼 생각 따윈 하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김승민은 치사하다.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왜 인제 와서 꺼내고 난리야. 어제는 서러움에 눈물이 났었다면 오늘은 짜증과 안도에 눈물이 났다. 형은, 그걸 왜 지금 말해요? 나 나쁜 새끼 되라고? 말은 그렇게 뱉으면서 속으로는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날 승민의 메시지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이었다. 우는 저를 가만히 쳐다보던 승민이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손을 내밀어 볼을 감쌌다. 울지 말어. 속상해하지도 말고. 반듯하게 손톱이 잘 깎여있는 그의 엄지가 연신 정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줬다.

 

 

“그날 너 돌아가고 나서 많이 생각했어. 형도 정인이 맘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해. 이제는 매일 틈만 나면 연락도 하고, 바빠도 시간 내서 카톡 할게. 공강 겹치면 우리 만나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쉬는 날엔 놀러도 가자. 예전처럼.”

 

 

형 너랑 다시 잘 해보고 싶어. 따지고 보면 승민은 변한 게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저를 보고도 반가워했고, 취한 저를 구태여 챙겨 집에 데려가기도 했고, 한없이 다정했다. 그런 승민이 다시 만나보자 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만 울어, 정인아. 너 곧 수업인데 눈 띵띵 붓겠다.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 뽑아줄까? 그거 눈에 대고 있을래? 이 와중에 제 눈이 부을까 걱정하는 이 사람을 도대체 누가 싫어할 수 있겠냐고. 그 언젠가 형이 마지막으로 서울에 올라가던 날, 부산역 플랫폼에서 잠시 껴안았던 그 날이 생각났다. 흰 입김을 폴폴 뿜으며 승민은 말했었다. 정인이 보고 싶어서 2주 또 어떻게 참지. 무드라곤 느껴지지 않는 솔직한 표현이었지만 나름 로맨틱했다. 입바른 소리일 줄 알았던 게 다 진심이었다.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를 표현할 길이 없어 정인은 그대로 승민을 껴안았다. 잠시 당황한 듯 몸을 굳히던 승민도 곧 팔을 움직여 정인의 등을 끌어안았다. 날이 춥지만 품은 따듯했다. 익숙한 품과 향수 냄새에 또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코를 크게 훌쩍인 정인이 승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회색이라 눈물 콧물 자국 다 묻을 테지만 아무런들 좋았다. 이런 분위기도 나름 로맨틱하니까. 그래서 정인은 용기 내 입을 열었다. 만나요. 우리. 질리도록 연애해요, 형. 전처럼.

 

아무래도 포기하기엔 아직 많이 좋았다. 승민의 모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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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melody

2019. 11. 30. 23:30

 

 

 

 

 

My melody

김이박푸딩

 

 

 

 

 

 

 똑똑. 똑똑똑. 똑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크진 않았지만, 끊임없이 이어져 승민도 더 이상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오래된 아파트엔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잡상인이며, 각종 종교인이며 드나드는 외부인들이 잦았다. 승민은 어른들이 안 계신 집에 혼자 있을 때 그런 사람들이 찾아오면 집이 빈 척 조용히 가길 기다렸다. 그럼 10에 9은 포기하고 가는 게 보통이다. 오늘 찾아온 사람은 꽤나 끈질겼다. 읽던 책을 탁 하고 덮고 일어났다. 엄마에게 세뇌 수준으로 교육받았지만, 실제로 해본적은 별로 없는 대사들을 시험삼아 읇어본다. 집에 어른이 안 계셔서요. 다음에 찾아 오세요. 안 사요. 다니는 교회 있어요. 일부러 잠금장치의 쇳소리를 더 크게 해서 문을 열었다. 12살의 작은 화풀이였다. 물론 보조열쇠는 풀지 않은 채였다. 15센티정도 되는 작은 틈으로 빼꼼 위를 쳐다보았다. 누군가의 얼굴이 있을 법한 위치의 시야가 훤했다. 시선을 한참 내리니, 그제야 제 키만한 아이가 서 있는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승민은 다시 문을 닫고, 보조키를 푼 뒤에 문을 열었다. 사투리의 흔적을 지우려고 꽤나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오묘한 높낮이의 말투로 아이는 승민에게 인사했다.

 

 

 

-오늘 옆집으로 이사 왔는데 엄마가 갖다 드리라고 해서요.

 

 

 

 따끈한 시루떡을 받아들며 승민은 아이와 눈을 맞췄다. 장난기가 가득한 동그랗고 커다란 눈이 승민을 응시했다. 진짜 귀엽게 생겼다. 현진이네 까미만큼 귀여운 것 같다. 고마워, 잘 먹을게. 고맙다는 핑계로 바가지모양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민들레 홀씨처럼 가느다랗고 결좋은 머릿카락이 승민의 조그만 손가락을 사락사락 빠져나갔다. 동글동글한 머리통이 손에 착착 감겼다. 몇 번이나 쓰다듬다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준다는 핑계로 두어번 더 매만져주고 나서야 안 떨어지는 손을 억지로 내렸다.

 

 

 

-몇 살이야?

 

-11살인데요.

 

-난 12살이야. 형이라고 불러.

 

-그래. 형.

 

 

 

 몇 달간이나 비어 있던 옆집에 또래가 이사 왔다! 승민과 같은 초등학교에 다닐 수도 있겠다. 나이차이가 꽤 많이 나는 승민의 누나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고, 같은 반 친구인 지성은 승민의 집과 먼 곳에서 학교를 다닌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같은 학교 친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신이 났다. 승민은 볼일도 끝났겠다 집으로 가려는 듯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는 아이의 팔을 당겼다.

 

 

 

-어?

 

-들어와.

 

 

 

 

 

 아이는 갑작스러운 초대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정리하고 현관 앞에 가만히 섰다. 들어오라니깐. 승민은 정인의 팔을 잡아 끌고 제 방으로 갔다. 얌전히 승민을 따라 갔다. 이름이 뭐야? 양정인. 양정인이구나. 정이나. 정이낭. 야앙저엉이이이인. 응. 응응. 으응. 그래. 정인은 꼬박꼬박 잘도 대답해 줬다. 승민은 아무하고도 공유하지 않은 공룡 컬렉션들이며, 책이 가득한 책꽂이를 정인에게 보여주었고 정인은 보여준 보람이 충분히 느껴질 만큼 감탄했다. 마치 에레보르의 유일한 초대자라도 된 것처럼. 이거 다 형거야? 응. 다 내꺼야. 승민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인은 공룡 모양 피규어를 덥석 집어 들려다 승민을 한번 쳐다봤다.

 

 

 

-이거 만져봐도 돼?

 

-엉. 책도 봐.

 

 

 

 승민은 정인이 받을 때까지 손을 거두지 않을 모양인지 책을 내밀고 재촉 한마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정인은 쥐고 있던 피규어를 바닥에 잠시 내려놓고 승민의 손에서 책을 건네 받았다. 알록달록한 하드커버를 펼치니 평화로운 책장에 평화로운 모습으로 박제된 브라키오 사우루스, 트리케라톱스, 티라노 사우르스. 그제서야 승민의 흰 티셔츠에 그려져 있는 이름모를 공룡 한 마리에도 시선이 갔다. 풉.

 

 

 

-왜 웃어?

 

-공룡 진짜 좋아하나 보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서 빳빳한 책의 낱장을 팔랑팔랑 넘겼다. 승민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일어나서 베란다로 갔다. 베란다는 꼼꼼하게 닫혀 걸쇠까지 잠겨 있었다. 이상하네.

 

 

 

-왜?

 

-아무것도 아냐.

 

 

 

분명 바람이 분 것 같았는데.

 

 

 

 

 

 

 

 

 

 

 

 

 

 

 

 

 

 ‘그 바람’ 의 출처가 정인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왜냐면 이번에야말로 문단속을 철저히 했으니까. 휴대용 선풍기도 아니고 입으로 분 것도 아니고 정말로 정인이었다. 정인에게서는 바람이 불었다. 차갑고 시크한 사람에게 비유적으로 흔히 하는 그런식의 표현법이 아니고 정말로 바람이 분다니까! 그 바람은 항상 부는 건 아니었고, 정인의 기분에 따라서 강도가 달랐으며 어설프지만 조절도 가능했다(이건 추측이다). 대부분은 포근하고 잔잔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정인의 심기가 불편할 때가 있었다. 대부분은 승민의 과한 장난이 원인이었는데 그럴때면 평소보다 강력한 바람이 불었다. 강력하다고 해봤자 태풍이나 허리케인이 몰려와서 창문을 깨뜨리고 건물이 흔들릴... 정도까진 절대 아니고 둘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휘날리고 입고 있는 티셔츠자락이 펄럭거리는 정도? 하지만 평소의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비하면 그건 승민이 느끼기엔 태풍 수준이었다. 그럴때면 승민은 잽싸게 정인을 품에 껴안고 등을 위아래로 쓸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그럼 정인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승민의 등을 마주 안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바람의 주인이 정인이었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 승민은 혹시 정인이 아무도 모르게 우주의 임무를 수행하러 온 외계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 한적 없는 승민만의 비밀이었다. 혹시 부모님이나 누나한테 말했다가 걔 이상한 애 아니냐고 못 놀게 할까봐, 혹은 이상한 비밀조직같은 곳에서 정인을 잡아갈까봐 입을 꾹 다물었다. 사귄 지 얼마 안된 동생을 생각하는 의리가 정말 눈물겨웠다.

 

 아니면 혹시 정인의 부모님이 어디, 우주선이 추락했거나 혹은 유성이 떨어진 곳에서 정인이를 줏어오신 건 아닐까? 어린이탐정단(단원 : 승민 혼자)의 일원으로서 정인의 정체가 너무도 궁금했다. 호기심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드디어 정체가 밝혀질 결전의 날이 왔다. 승민은 정인의 집에 초대받아 놀러 가던 날, 어린 정인의 더 어릴때의 사진들을 모조리 훑어 보았다. 빨갛고 주름투성이인 정인을 안고 병원 침대에 누워 계시는 정인의 어머니 사진과, 육아수첩에 날짜별로 적힌 예방접종표까지 보고 나서야 승민은 의심을 슬며시 거뒀으나 석연치 않은 느낌은 마음 한켠에 항상 존재했다.

 

 

 

 

 

 

 

 

 

 

 

 

 

 

 

 

 

-너 몰래 집에 보물이라도 숨겨놨냐?

 

-그.. 그런거 없거든.

 

 

 

 승민이 요즘 저와 잘 놀아주지도 않고 바로 집에만 가는 걸 눈치챈 지성이 승민을 졸졸 따라갔다. 너 아무래도 진짜 의심스럽다. 오늘만큼은 절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승민은 마음이 급해져서 느린 다리로 열심히 뛰었다.

 

 

 

-아 따라 오지말라고!

 

-싫은데? 싫은데?

 

 

 

 지성은 승민을 쫓아 열심히 뛰었다. 심지어 승민보다 더 빨랐다. 승민보다 가벼운 몸과 가느다란 두 다리로 승민의 두 걸음을 한 걸음만에 좁혀 나갔다. 지성은 여유로웠다. 두 개의 심장과 두개의 다리를 가진 저 비쩍 마른 자식. 지성은 한참 앞서 나가서 아파트 단지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승민을 기다렸다. 그렇게 느려서 어따 써? 승민이 헉헉대며 아파트 단지를 들어서는데 하필 아파트 입구 계단에 정인이 앉아 승민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망했다.

 

 

 

-날 버린 이유가 바로 쟤구나.

 

-아, 안녕하세요.

 

 

 

 정인이 슬슬 녹아내리는 중인 양 손의 메로나와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인은 제 몫을 쿨하게 포기하고 승민과 지성에게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지성은 손을 내저었다.

 

 

 

-너 먹어. 난 메론맛 싫어해.

 

-승민이형 친구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맞아. 쟤 친구 나밖에 없어.

 

-그럼 이제 둘이네.

 

 

 

 지성은 오래 알던 친구라도 된 것처럼 서스럼없이 정인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한지성이야. 우리 학교 다녀? 왜 얼굴 처음보지? 전학온지 얼마 안 됐다고? 몇 학년이야? 4학년? 한살차이밖에 안나네? 더 어린 줄 알았는데. 정인에게 묻지도 않은 자기소개와 질문폭격을 줄줄이 날리는데 승민은 괜히 배알이 꼴려서 지성의 허리를 주먹으로 쳤다. 메로나는 벌써 승민의 손을 타고 녹아내리고 있었다.

 

 

 

 

 

 

 

 

 

 

 

 

 

 

 

 지성과 정인은 꽤나 잘맞았다. 읽는 책의 취향이라거나, 개그코드라거나. 지성이 씨리얼을 퍼먹다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이상하네.

 

 

 

-나 여름감기 걸렸나봐. 어디서 바람 부는 거 같애.

 

-내가 한 거야.

 

-어엉?

 

 

 

 정인이 손을 허공에 한번 흔들자 지성의 앞머리가 휘날렸다. 지성은 씨리얼을 씹다 말고 그대로 굳어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너..너.. 혹시...

 

 

 

-외계인이야?

 

 

 

 승민은 씹던 씨리얼을 뱉었고, 정인은 입을 쩍 벌렸다가 곧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항상 생각만 하던 걸 저렇게 대놓고 물어보다니. 외계인이라고 해도 나 외계인이야, 말하는 외계인이 세상에 어딨냐. 저거 바보 아니야?

 

 

 

-외계인은 아닌데 그냥 할 수 있어.

 

-너 진짜 멋있다.

 

 

 

 지성은 양손으로 엄지 척을 하고 박수까지 짝짝 쳤다. 진짜 대단하다. 승민만 안절부절했다. 평생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못했지만, 정인의 비밀을 가능한 한 오래 지켜주려고 노력했는데 저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정인아, 그거 말해도 괜찮은 거야?

 

-상관없어.

 

 

 

 정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반 애들도 다 아는 걸. 혼자만의 비밀 외계인 친구라는 건 어느 곳에도 없었다.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누가 정인을 잡아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며,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것 영화에서, 사람이 풍선처럼 둥둥 떠오르거든. 너도 그렇게 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럴까?

 

-나중에 날게 되면 나도 태워 줘.

 

 

 

 한번 연습이라도 해볼까? 진짜 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지성은 정인이 하겠다고 말만 하면 당장이라도 어미사자처럼 절벽에서 정인의 등을 떠밀 기세였다. 정인은 높은 곳은 절대 싫다며 진저리를 쳤다. 둘이서 그런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는데 승민은 가만히 듣고 있자니 괜히 심란해져서 설거지를 하러 간다는 핑계로 아직 우유가 반이나 남은 씨리얼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그날 이후로 승민은 정인의 바람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승민은 정인의 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손도 보고, 배도 보고, 머리도 보고. 만약 바람이 나오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든 마개를 구해서 틀어막을 생각이었다. 정인이 정말로 날게 될까봐, 정확히 말하면 날아가 버릴까봐 무서웠다. 정작 한지성은 말했다는 사실도 다 까먹었을지도 모르는데 승민은 매일 그 생각뿐이었다. 임시 방편으로 정인과 함께 다닐때면 무슨 일이 있어도 손을 꼭 잡았다. 정인의 손을 깍지를 껴서 꼭 잡고 있으면 안심이 됐다. 기분 탓이겠지만 바람도 좀 덜 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손에 땀찬다고 귀찮아하던 정인도 바람으로 말리면 되잖아, 하며 애처로운 눈을 하는 승민에게 싫고 귀찮은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느니 그냥 손을 잡고 마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듯 했다. 계속 잡고 또 잡다보니 이젠 정인도 습관이 됐는지 승민을 만나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돌아다닐때 뿐만이 아니라 침대에 뉘일때도 꼭꼭 이불로 정인을 싸매고 그 주변에 마법진처럼 공룡 인형을 잔뜩 놓았다.

 

 

 

-꼭 이렇게 자야 돼? 답답해.

 

-혹시라도 감기 걸리면 큰일 나니까.

 

-형은 어디서 자려고?

 

 

 

 승민은 커다란 인형을 하나 빼고 그 틈으로 몸을 집어 넣고 정인과 몸을 붙여 나란히 누웠다.

 

 

 

-형 근데 나 감기 걸린 적 한번도 없어.

 

-거짓말하지마. 그런 사람이 어딨어?

 

-진짜야. 나 완전 튼튼해.

 

 

 

  날이 갈수록 정인의 바람 컨트롤 능력은 일취월장하여 나중엔 승민이 더워하면 시원하게 해주기도 하고, 물장난하며 놀다가 물에 젖은 생쥐꼴이 되면 말려주기도 했다. 젖은 옷은 금새 방금 건조대에서 걷은 것처럼 뽀송뽀송해졌다.

 

 

 

-초능력이 있을거면 순간이동이나 먹을거 생기는 능력이면 얼마나 좋아.

 

-너 이렇게 막 ... 어? 써도 괜찮은 거야?

 

-응.

 

 

 

 정인은 승민의 앞머리를 바람으로 날리며 장난을 쳤다. 에잇! 승민도 지지 않고 정인의 앞머리를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형, 손으로 하는 건 반칙이지!

 

 

 

 

 

 

 

 

 

 

 

 

 

 

 

 

 

 

 

 

 

*

 

 

 

 2학년 양정인 센티넬 판정받았대. 센티넬이면 막 훈련 받고 가이드랑 섹스도 하고 그러는거 아냐. 변태냐? 섹스안해도 가이딩 할 수 있거든. 어쨌든 접촉은 해야 되잖아?

 

 센티넬과 가이드의 존재는 뉴스와 인터넷에서 종종 본 적이 있다. 보통 사람보다 신체 능력도 월등하며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센티넬과 그런 센티넬을 치유해주는 가이드. 폭주한 센티넬이 건물을 부수고, 불을 지르고 작은 무인도 하나를 통째로 없애버리고, 결국엔 고통을 못 이겨 자살했다는 그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들. 센티넬들의 능력은 천차만별이었다.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했고, 건물 사이를 뛰어 다니기도 했으며, 손에서 불을 뿜어내어 누군가를 다치게 하기도 했다. 유튜브에 뜬 영상을 봤을때도 조작같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조금 더 튼튼해서 감기에 걸린 적도 없고, 남들보다 조금 더 성장속도가 빨라서 이제 승민의 키를 넘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이젠 바람의 흔적도 잘 숨겨서 날아가버릴 걱정은 한결 덜었지만, 아직도 같이 있을때는 정인의 손을 잡고 있어야 안심이 되는데. 쉬는시간이 되기만 기다렸다가 정인의 반에 찾아갔지만 오전에 조퇴했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자율학습도 빼먹고 정인의 집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정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여름의 해는 길어서 7시가 되어도 계속 시야에 걸려 있었다. 슬슬 주황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뒤늦게 얼마 안남은 수능이 생각나서 가방에서 오답노트를 꺼냈다. 같은 부분을 보고 또 봤지만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하나도 없었다. 승민은 짬을 내어 공부하기를 포기하고 가방에 노트를 다시 집어넣었다. 정인은 해가 완전히 져서 깜깜해진 뒤에야 부모님과 함께 나타났다. 승민은 엉거주춤 일어나서 엉덩이를 털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형 오늘 땡땡이 쳤어? 목소리는 평소의 정인과 다를 게 없었다.

 

 정인의 부모님이 들어가시고 승민은 정인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승민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낮에 들은 이야기를 남얘기라도 하는것처럼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정인은 맞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다가 흠칫 놀랐다.

 

 

 

-B급이래. 근데 소문이 그렇게 빨라?

 

-B급이 뭐야?

 

-모르겠어. 근데 월급도 많이 준대.

 

-너 괜찮은 거야?

 

-안 괜찮을 이유가 있어?

 

 

 

 승민은 정인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머릿속에 센티넬, 가이드, 섹스, 접촉, 폭주, 여러 단어들이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그 단어들은 점점 증식하여 날카로운 모서리로 머릿속을 쿡쿡 찔렀다.

 

 

 

 

 

 

 

 

 

 

 

 

 

 B급 센티넬이 필요할 때 < 라는 순간은 생각보다 잦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풍력발전소가 멈춰서일 때도 있었고, 화재 현장의 뒷처리를 하기도 했다. 매일같이 만나던 둘은 얼굴보기도 힘들어 졌다. 감기 한번 걸린적 없이 튼튼했던 정인은 가끔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결국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됐다. 오랜만의 만남이 병원에서라니. 지하철로 두시간 가까이 떨어진 서울의 외곽에 위치한 병원은 어떠한 이물질의 침범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경비가 삼엄했다. 교복을 입은 채 자동문으로 들어 가려는 승민을 입구에서 가로 막았다.

 

 

 

-아는 동생이 입원했는데요.

 

-가족분이 아니시면 출입 불가능합니다.

 

 

 

 마음이 급했다. 저장만 해 두었지, 단 한번도 연락해본적은 없는 정인의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승민이에요. 옆집 사는 그 승민이요. 지금 병원 앞인데 정인이 보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정인의 형이 1층으로 내려와서 승민을 데리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승민은 유리창 너머로 침대에 누워 있는 정인을 쳐다 보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정인의 양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에요?

 

-협회에서 나온 가이드.

 

-아.

 

-각인을 안 해서 아픈거래.

 

 

 

 정인의 가족과 이런 이야기를 하기엔 얼굴이 화끈거렸다. 각인. 성관계로 이루어지며 결혼과 다름없는 결합. 승민은 입술을 꾹꾹 씹었다.

 

 

 

-저렇게 계속 아프면 어쩔 수 없지.

 

-......

 

 

 

 저녁 면회시간이 되기까지를 기다렸다가, 승민은 문 옆에 놓인 소독제로 손을 뽀득뽀득 씻고 병실로 들어갔다. 정인이 혼자 쓰는 병실은 아주 넓고 쾌적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회장님들이 쓰는 병실 같다. 색깔이며 크기도 가지각색인 수액팩이 잔뜩 걸려서 팔뚝에 연결된 카테터로 들어가고 있었다. 승민은 가이드의 흔적을 지우기라도 할 것처럼 침대 위에 얌전히 놓여진 정인의 손을 양 손으로 꼭 잡고 문질렀다. 넌 입술에 대체 뭘 바르길래 그렇게 예쁜 분홍색이냐, 했던 입술이었는데 지금은 색을 잃고 창백했다. 차라리 눈 뜨지말고 계속 감고 있어줬으면. 입을 열면 자기도 모르게 헛소리를 할까봐 두려웠다. 각인이라는거 꼭 해야되는 거야?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정인의 손을 꼭 붙잡고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았다.

 

 정인은 가끔 승민의 말을 안듣고 제멋대로 굴었다. 지금도 승민의 시그널을 무시하고 눈을 반짝 떴다. 정인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흰 시트에 폭 감싸진 몸과, 찢어질 거 같은 건조한 공기속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는 자그마한 가습기, 앙상한 팔에 꽂힌 링거 바늘로 병원임을 눈치챈 모양이다. 정인이 시트를 바짝 끌어 올려서 눈만 내놓고 얼굴을 푹 숨긴 채로 말했다.

 

 

 

-나 얼굴 꼴이 말이 아니겠네.

 

-지금 그게 문제야? 몸은 좀 어때?

 

-완전 괜찮지.

 

 

 

 그러면서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승민은 정인의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눌렀다.

 

 

 

-됐어. 퇴원해봤자 또 불려가기만 하지. 필요할 때만 부른다더니 사기당한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사람을 막...

 

-필릭스 형이 아파서 그래. 나으면 괜찮아질거야.

 

-그 사람은 언제 낫는데?

 

-모르겠어. 근데 형 여기 있어도 돼? 학교는?

 

-학교가 문제야?

 

 

 

꼬르륵.

 

 

 

-형, 미안한데 나 배고픈가봐.

 

-괜찮다더니 진짠가보네.

 

-아, 진짜 괜찮다니깐?

 

 

 

 승민은 호출벨을 눌러 무언가를 먹어도 괜찮은 상태인지를 물었고, 잠시 후 간단한 식사가 도착했다. 정인은 허여멀건한 죽을 정신없이 퍼 먹으며 고기먹고싶다를 중얼거렸다.

 

 

 

-퇴원하면 먹으러 가자.

 

-신난다!

 

-정인아, 그 각인이라는 거 있잖아.

 

-그 말 하러 온거면 그냥 가라.

 

 

 

 숟가락을 탁 내려놓더니 정색을 한다. 정인은 승민의 말문을 막히게 하더니 그만 먹을래, 하며 도로 누우려고 했다.

 

 

 

-아 알았어! 그 얘기 안 할테니까 밥은 마저 먹어.

 

-벌써 입맛 다 떨어졌거든?

 

-아 해봐. 아.

 

 

 

 승민은 죽이 담긴 숟가락을 정인의 입 바로 앞에 갖다 대고 먹기 전까진 안 치울 기세로 버텼다. 결국 정인이 졌다. 죽 한 그릇을 다 비우는 걸 지켜보고, 바로 눕지 말라고 신신당부도 했다. 저놈의 잔소리. 정인이 질린 표정을 했다.

 

 

 

-내일 또 올거니까 밥 잘 먹고 있어.

 

-고3이 공부도 안 하냐?

 

 

 

 그러면서도 오지 말라는 말은 안한다. 승민은 정인의 머리를 양 손으로 헝클어트렸다. 아 손으로 하는 거 반칙이라고!

 

 

 

 

 

 

 

 

 

 

 

 

 

 

 

 

 

 이 센티넬 전문 병원은 정인의 퇴원 이후로는 두번째 방문이다. XX대학교 의과대학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센티넬 여부가 반드시 포함된 건강검진 결과서를 제출해 주세요. 형식적인 과정이라지만 검진하러 온 게 첫번째였다.  승민은 단순히 학교에서 매년 하던 신체검사 정도를 예상했으나, 검사는 생각보다 본격적이고 종류가 다양했다. 검사실에 들어가자마자 문항이 400개도 넘는 문진표를 작성하고 키, 몸무게같은 기본적인 신체 계측부터 시작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MRI 촬영까지 했다. 승민은 드럼세탁기속의 빨래가 된 기분으로 폐소공포증에 걸리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색맹 검사지같은 책을 주며 무슨 글씨인지 읽어보라고 하질 않나, 새까만 방에 집어넣고 혹시 뭐가 보이거나 들리진 않냐고 하질 않나. 승민은 낯선 검사에 최선을 다해 임했다. 병원의 건조하고 메마른 분위기는 몇번씩이나 와도 적응이 안 됐다. 임상 병리사가 채혈을 위해 승민의 팔에 토니켓을 채우는 사이, 승민은 궁금하던 걸 드디어 물어볼 수 있었다.

 

 

 

-만약 센티넬이라고 판정되면 합격이 취소 되나요?

 

-센티넬은 의대 지원 자체가 불가하니까요.

 

-그럼 가이드면요?

 

-가이드는 협회 소속이 아니어도 상관 없어요.

 

 

 

 아직 결과도 안 나왔는데 억울해졌다. 남 일이라고 말을 참 쉽게 한다 싶어 기분이 나빠져서 표정을 굳혔다. 한 뼘 크기정도 되는 실린더에 가득 찰 만큼이나 피를 뽑더니 승민의 팔에 동그란 밴드를 붙여 주었다. 문지르면 멍드니까 꾹 누르세요. 병원의 분위기와 안 어울리는 뽀로로 모양의 밴드. 밴드에 그려진 여우 캐릭터를 보는데 정인의 째진 눈이 생각 나서 웃음이 나왔다.

 

 

 

 정인은 특이케이스였고 10대 후반에 센티넬로 뒤늦게 각성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긴장이 됐다. 정인에게 괜찮다고 허세를 부리며 혼자서 병원에 온 게 갑자기 후회가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가줄까 물었을 때 모른 척 그러자고 할 걸. 아니지. 그래도 인간적으로 두 번은 물어봐야지. 괜찮다고 하자마자 알겠다고 하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느냔 말이야. 피 뽑은 자리는 무의식적으로 문지르다가 엄청나게 큰 멍이 들었다.

 

 

 

-검진 결과서 찾으러 왔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김승민이요.

 

-잠깐 진료실로 들어 오시겠어요?

 

 

 

 혹시 머리에 혹이라도 발견된건가? 승민이 마른 침을 삼키며 진료실을 똑똑 노크했다.

 

 

 

 

 

 

 

 

 

 

 

 

 

 

 

 결과서를 받아 들고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금은방에 가서 반지를 샀다. 정인처럼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처지는 아니라서 금 함량은 적었지만. 승민은 세상에서 정인의 손가락 두께를 가장 잘 알 사람이었다. 정인의 부모님보다, 어쩌면 본인보다 더. 집까지 오는 길이 병문안 갔다가 올 때보다 세배쯤 길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시간은 천년처럼 느껴졌다. 정인아, 빨리 나와봐. 승민은 정인의 집 문을 쾅쾅 두드렸다. 병원 벌써 갔다왔어? 정인이 목이 다 늘어진 티셔츠 차림으로 나왔다.

 

 

 

-너 내일 뭐해?

 

-내일? 별 일 없는데. 왜?

 

-혼인신고 하러 가야 돼서.

 

-혼인신고? 누나 결혼하셔?

 

-아니. 너랑 나.

 

 

 

 지성에게 외계인이냐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후로 정인의 저런 어이없는 표정은 처음 봤다.

 

 

 

-재밌다. 형이 여태까지 한 말장난중에 제일 재밌네.

 

-나 태어나서 이만큼 진지한 적이 없는데.

 

 

 

 정인은 승민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하품을 했다. 정인아 우리 완전 바빠. 나 입학식 하기전에 결혼식하고, 신혼여행갔다가, 각인도 해야돼. 승민이 손을 가져가서 반지를 끼우든가 말든가 멍하니 있던 정인이 눈을 번쩍 떴다. 정인은 어느 틈에 또 커버린 건지 사이즈를 확신하며 구입한 반지가 약간 작았다.

 

 

 

-형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아무래도 혼인신고보다는 사귀는 게 먼저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

 

-혹시 싫어?

 

 

 

 태연하게 싫으냐는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혹여나 정인이 수긍해 버릴까봐 심장이 요동을 쳤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무릎이라도 꿇을 걸 그랬나. B급 센티넬과 S급 가이드의 상성 맞추기, 떨어질지 안 떨어질지 모르지만 승민에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할 센터의 허가같은 것들.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정인의 대답을 승민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정인이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형은 내가 불쌍해?

 

 

 

 승민이 대답을 망설였다. 아주 잠깐이었다. 하지만 그 잠깐의 공백만으로도 정인이라면 승민의 입에서 나올 말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불쌍해. 근데 그게 다는 아니야.

 

 

 

 덧붙인 말이 변명으로 들리지 않기만 바랐다. 정인이 눈을 감고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왜 우냐? 승민은 놀리면서도 옷 소매로 정인의 눈가를 살살 문질렀다.

 

 

 

-누가 누굴 불쌍해 해? 난 개꿀이지. 형이 더 불쌍해. 코 꿰인 건데.

 

-개꿀? 코가 꿰여? 너는 말을 해도.

 

-나중에 없던 일로 하자고 해도 안 물러줘. 형은 20살 되자마자 이혼남 되는거야.

 

 

 

 정인이 약간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혼은 나혼자 해? 너도 나랑 같이 이혼남 되는 건 마찬가지거든? 승민이 정인의 어깨를 잡아당겨 흔들었다. 끄어어어- 정인이 흔들리는대로 흔들리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승민이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렸다.

 

 

 

-근데 우리 손밖에 안 잡았는데 각인하면 그거...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해봐.

 

 

 

 정인의 얼굴과 귀로 순식간에 뜨끈뜨끈하게 피가 몰렸다. 승민은 두 다리가 풍선처럼 허공에 뜨는 경험을 놀이공원에서 탄 바이킹 이후로 처음 해 봤다. 심지어 이건 안전장치조차 없다. 나 아직 끝까지 말 안했다? 승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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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부탁해

2019. 11. 30. 23:30

 

 

 

 

 

 4 to 20. 말도 안 되는 일과를 이어 온 지가 벌써 2주 째였다. 한창 바쁠 때였다. 더위가 한 풀 꺾이니 춘 3월 만큼이나 빽빽하게 예약이 들어 찼다. 하루 종일 남의 머리를 지지고 볶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인이 하는 일은 보잘 것 없어 보여도, 비면 비는 대로 티가 났다. 잘린 머리카락을 쓸고 다 쓴 수건을 개고 음료수를 내오고 전화를 받고 … 어째 각 잡고 머리를 만지는 디자이너들 보다 더 바빴다. 종일 이곳 저곳에서 열심히도 불러 댔다. 어쨌든 호칭은 쌤이었으나 시키는 태도는 하인 부리듯 했다. 이엔 쌤, 여기 좀 치워 줘요. 그럼 정인은 꾸벅 꾸벅 인사 하며 군 말 없이 빗자루를 들고 왔다.

 

 이러려고 손 끝 다 헤지도록 롯드를 말아 온 게 아닌데. 정인은 탕비실에서 아아메를 열 잔 째 내가며 생각 했다. 취직만 하면 금세 이것 저것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다 못 해 잘 나가는 디자이너 어깨 너머로 뭐라도 배울 줄 알았다. 그래서 벼르고 별러 서울 청담의 커다란 샵에 취직 한 거고, 쥐꼬리 만한 월급에도 군 말 없이 모든 노동력을 바치고 있는 거고. 그런데 어째 생각 한 거랑은 좀 달랐다. 종일 허드렛일만 하니 딱 죽을 맛이었다. 밥도 잘 못 먹고, 내내 서 있으니 다리가 퉁퉁 부었다. 하루 내도록 제일 많이 하는 말은 “ 음료는 뭐로 준비 해 드릴까요? ” 였다. 나 염색도 잘 하는데. 컷트도 실기 시험 1등으로 졸업 했는데. 그딴 것들은 다 소용이 없었다.

 

 출 퇴근 전후로 짬짬이 마네킹을 붙들고 연습도 착실히 했다. 고졸 후에 곧장 인턴으로 들어 온 게 저 혼자인 게 마음에 걸렸다. 진즉 다른 샵에서 일을 하다 왔거나 전문대를 졸업 한 동기도 있었다. 정인은 제일 어린데다 쌩초짜였다. 미용고 1등 졸업생 타이틀은 별 힘을 못 썼다. 정인도 그걸 알기에 자꾸 감기려는 눈꺼풀을 붙들고 더 싹싹하게 굴었다.

 

 컷트 연습을 끝내고 떨어진 머리칼을 주운 정인이 이만 앞치마를 풀렀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퇴근이었다. 탕비실 쓰레기통을 비우곤 꾸벅 꾸벅 홀에다 인사를 했다. 다들 자리를 떠 사람도 몇 없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리고는 잽싸게 샵을 빠져 나왔다.

 

 

 승민과 약속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승민과 그 친구들까지. 오랜만에 멀쩡한 정신으로 보는 거였다. 사실 지금도 피곤해서 몸이 말이 아니지만, 내일은 간만에 주어진 휴일이었다. 2주가 넘는 주말 출근이 겨우 끊겼다. 예약이 세 개도 넘게 펑크 난 덕이었다. 샵 입장에서는 눈물 나겠으나 정인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오전 4시에 집을 나섰으니 승민과 제대로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 역시 대학생의 삶에 적응 하느라 바빴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시험 기간에는 거의 좀비나 다름 없이 걸어 다녔다. 그는 정인이 현관에서 신발을 꿰어 신고 있으면 반 쯤 잠 든 채로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벌써 나가? 엉망이 된 까치집에, 웬 할아버지 같은 파자마를 주워 입은 꼴이었다. 승민은 그러고서도 집을 나서려는 남자 친구를 붙잡았다. 뺨에 쪽 뽀뽀를 하고서야 겨우 출근을 허락 했다. 어우, 빨리 가서 더 자. 정인은 그러면서 승민을 밀어 냈지만 종종 그 뽀뽀 하나로 하루를 버텼다.

 

 정인의 취직 소식에 가장 기뻐한 것은 승민이었다. 여태 시험이니 실습이니 하며 몇 번이고 승민의 머리를 조져 놓은 게 영 헛짓은 아니었다. 소식을 알리는 전화에 승민은 전공 수업을 제끼고 곧장 집으로 뛰어 왔다. 어디서 산 건지 모를 아주아주 커다란 꽃다발과 함께. 너 학교는? 놀란 눈으로 묻는 정인을 대뜸 끌어 안는 바람에 둘 사이에서 꽃다발이 짜부가 됐다.

 

 정인이 청담의 유명 샵에 취직 했다는 것. 연예인들이 제 집 처럼 드나들고 전국의 신랑 신부가 찾아 오는 대단한 곳에, 정인이 한 자리를 꿰차게 됐다는 사실. 승민은 틈만 나면 그 얘기를 하려 들었다. 친구인 현진이 너무 많이 들어 입만 열면 녹음기 처럼 따라 할 지경이었다. 대단하고 멋진 정인이. 승민은 제 남자친구가 자랑스러워 안달이 났다. 그럴 때 마다 한 턱 내라는 말들을 흔쾌히 받아 들일 만큼. 오늘의 만남도 자랑을 들어 주다 못 한 현진이 니 남친 취업 턱을 내라는 소리에 만들어진 자리였다.

 

 연기가 자욱한 술집 끄트머리에 승민이 보였다. 정인이 히 웃으며 테이블로 다가 갔다. 김승민! 어깨를 붙잡으니 모두가 올려다 봤다. 승민과 현진, 그리고 … 처음 보는 얼굴. 정인이 어색하게 웃자 승민이 가리키며 말 했다.

 

 “ 동기야. 현진이랑도 친구래. ”

 “ 아 … 안녕하세요. ”

 

 밍숭맹숭한 웃음에도 뉴페이스는 살갑게 마주 인사 했다. 한지성. 승민의 대학 동기. 현진이야 전부터 다 같이 알다 같은 대학에 간 거지만, 이렇게 그의 대학 친구를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종종 동기들 얘기 하는 것만 들었지 막상 실물로 마주 보니 퍽 어색 했다. 새삼 승민이 대학생이 됐다는 게 실감 났다. 정인은 승민이 제 앞에 놔 주는 수저를 받들며 힐끔 그를 바라 봤다. 입은 옷이 좀 … 요상하다는 것만 빼면 귀여운 인상의 사람이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질 못 했더니 허기가 졌다. 정인은 맨 속에 술을 마시면 안된다며 열심히 안주를 집어 먹었다. 승민은 구워진 삼겹살을 수북하게 정인의 앞에 쌓아 놨다. 야, 나는 뭐 먹어. 현진이 입술을 삐쭉이며 투덜댔다.

 

 “ 너 계란찜 좋아 하잖아. ”

 “ 누가 고기 먹으러 와서 계란찜만 먹어. 김승민 진짜 … ”

 

 태연한 대꾸에 말을 말자며 현진이 고개를 저었다. 지성은 승민이 열심히 주장 하는 정인이 고기를 먹어야 되는 이유를 군 말 없이 듣고 있었다. 오 그래. 와 정말. 살짝 진심이 부족한 맞장구도 함께였다.

 

 “ 근데 너 왜 이렇게 살 빠졌어? ”

 

 현진이 사이다를 시키곤 문득 물었다. 그러더니 밥을 퍼먹던 정인이 손목을 잡아 채 탈탈 흔들었다. 뼈 밖에 없네. 김승민이 니 밥 다 뺏어먹냐. 퍽 걱정 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 말에 승민이 어디 보자며 정인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 … 그러게. ”

 

 승민이 양 볼 가득 빵빵히 고기를 씹어 먹는 중인 남자 친구를 보며 말 했다. 확실히 하루 종일 바쁘게 일 하다 보면 밥 먹을 시간이 없긴 했다. 일찍 부터 예약이 몰려 있는 터라 그걸 다 상대 하고 나면 금세 점심이었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점심 시간이 주어 지는 것도 아니라 대충 탕비실에서 삼각 김밥이나 과자 나부랭이로 떼우는 게 전부였다. 퇴근 후엔 피곤해서 밥 보다는 잠이 우선이었다. 출근 한 지도 벌써 석 달이 넘어 가고 있으니 한창 살이 내릴 참이었다.

 

 “ 진짜 살 빠졌네. ”

 

 별 일 아니라며 허허 웃던 정인이 움찔 했다. 승민의 손이 쑥 내려와 허벅지를 쥔 탓이었다. 이 사람이 미쳤나. 짐짓 굳은 얼굴로 째려 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고 쪼물쪼물 허벅지를 만지며 제가 더 심각한 표정을 했다. 정인은 행여나 남자 친구의 변태 같은 행태를 누군가 볼까 싶어 다리를 바짝 오므렸다.

 

 “ 승민이가 진짜 자랑 많이 하던데. 엄청 좋은 샵 다닌다고 … ”

 

 새로 나온 갈비를 굽던 지성이 문득 말 했다. 정인이 여즉 제 허벅지를 쥔 승민의 손을 찰싹 때리며 하하 웃었다.

 

 “ 나는 그냥 … 아직 신입인데. ”

 “ 트와이스도 여기 다닌대. 그치 정인아. ”

 

 철 모르고 걸그룹 소리나 하는 남자친구의 주둥이를 꼬집어 주고 싶었으나 정인은 웃기만 했다. 제가 하루 종일 허드렛일이나 하는 걸 알면 아주 기절을 할 터였다. 승민의 머릿 속에 정인은 거의 전국구 헤어 디자이너나 다름 없었다. 아직 월급도 적고, 그 만큼 대단하지 않대도 홀로 환상 속에 살았다. 몇 번이고 샵으로 쫓아 온다는 걸 겨우 겨우 막았다. 아주 축 취직 화환을 보낼 기세였다. 정인은 굳이 그의 뿌듯함을 꺾어 버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냥 두기로 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현진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 나 머리 하러 가면 꽁짜로 해 주나? 지인 찬스. ”

 “ … 그건 안 돼. ”

 

 단호한 대답에 현진이 삐진 척을 했다. 지성이 양심도 없다며 거기다 불을 지폈다. 정인은 둘이 투닥대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제 앞으로 밀려 드는 고기를 열심히 집어 먹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라 그런지, 셋이 열심히 뭐라 떠들든 그저 웃음만 나왔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제법 알딸딸 했다. 스텝이 엉망으로 꼬였다. 역 앞에서 헤어져 현진은 집으로, 지성은 기숙사로 향했다. 승민은 술도 깰 겸 집까지 걸어가자며 혼자 게처럼 걷는 정인을 부축 했다.

 

 매달리다시피 해 집으로 향하는 와중에 야무지게 내일 먹을 식빵까지 샀다. 찬 바람을 맞으며 왔더니 정말 정신이 좀 돌아 오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엘레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 걸음은 열심히 비틀거렸지만. 정인이 겉옷을 벗고 소파에 누웠다. 일사천리라 말릴 틈도 없었다.

 

 “ 씻어야지. 정인아. ”

 

 승민이 금세 잠 들려는 정인의 양 볼을 쥐어 땡기며 말 했다. 정인이 겨우 눈을 떴다. 잠이 쏟아졌다. 안 그래도 이 시간만 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졸렸는데, 술까지 마셔서 그런지 더더욱 피곤했다. 내일 출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긴장이 다 풀렸다. 잘래 … 웅얼댔더니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 했다.

 

 “ 나 잘래 … ”

 

 승민은 아랑곳 않고 지난 밤 세탁 해 놓은 잠옷까지 가져 와 야무지게 갈아 입혔다. 그러고 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꾸벅꾸벅 졸았다. 승민이 앉아서 자다시피 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 봤다. 아까 현진이 말 한 대로, 정말 살이 제법 내린 듯 했다. 안 그래도 홀쭉한 얼굴이 부쩍 말랐다. 가만가만 쥔 뺨을 쓸어 보던 승민이 나지막히 이름을 불렀다. 정인아. 그러자 겨우 실눈을 떴다.

 

 “ 많이 피곤해? ”

 

 새벽 같이 나가는 정인을 붙잡고 물으면 별 말이 없었다. 그냥 씩 웃으며 다녀 온다는 인사만 남기고는 쌩 출근 해 버렸다. 눈 뜨기도 힘든 이른 시간에 직장으로 걸음 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힘든 게 당연할 텐데, 정인은 신기할 만큼 티를 안 냈다. 어쩌다 주말에 밥상에 마주 앉으면 숟갈을 뜨다가도 깜빡 졸면서 그랬다. 피곤하냐는 말에 정인은 또 고개를 저었다. 느리게 가로 저어진 머리통을 승민에게 기대곤 웅얼댔다.

 

 “ 그냥 졸려 … ”

 

 승민이 고요히 제게 기댄 남자 친구를 조심스레 바로 앉혔다. 졸음에 고꾸라지려는 몸을 세우고 어깨를 쥐었다. 안마 해 줄게. 정인이 간지럽다며 힘 없이 웃었다.

 

 “ 가만히 있어 봐. ”

 “ 뭔 … 안마야. ”

 “ 이러면 덜 피곤해. ”

 

 나 안마 짱 잘해. 승민이 마른 손으로 정인의 어깨를 조물조물 주물렀다. 정인이 잔뜩 뭉친 곳을 꾹꾹 누를 때 마다 몸을 움츠렸다. 아파아. 앓는 소리를 하다가도 시원하다며 아저씨처럼 굴었다. 승민은 말 없이 열심히도 주물러댔다. 정인의 목덜미가 빨개졌다.

 

 “ 좀 어때? ”

 

 한참을 안마에만 집중 하던 승민이 갑자기 귓가에 대고 물어 오는 탓에 정인이 화들짝 놀랐다. 시원함에 젖히고 있던 고개를 바로 했다. 대답이 없자 승민이 뺨에 쪽 입술을 찍었다. 어떠냐니까. 반응을 기대 하는 눈에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 영 … ”

 “ 영? ”

 “ 영 … 별론데. ”

 

 미적지근한 대답에 돌아 오는 건 승민의 숨 막히는 포옹이었다. 정인이 그 품에 꼭 갇힌 채 크게 웃었다. 안마 보다는 이 쪽이 더 피로 회복에 효과가 좋았다.

 

 

 정인이 나가는 소리에 깨지 않은 게 참 오랜만이었다. 승민이 제 코 앞에서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남자 친구를 보며 느리게 눈을 꿈뻑였다. 주말 오전. 간만에 주어진 정인의 휴일. 새벽 네시에 부리나케 집을 나서지 않아도 되는 날. 거기까지 로딩이 끝나니 잠이 확 깼다.

 

 승민이 열심히 손 꼽던 날이었다. 미뤄 놨던 데이트를 열심히 하리라 다짐 하고 또 다짐 했다. 정인이 출근 하는 날은 아무래도 그게 힘들었다. 기껏 해야 승민이 열심히 조른 끝에 심야 영화나 보는 게 전부였다. 물론 그 마저도 백 퍼센트 확률로 정인은 중간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 했지만.

 

 “ … ”

 

 그래서 분명 오늘은 아침부터 밤까지 실컷 데리고 놀겠다 다짐 했건만. 승민이 손을 뻗어 이마를 덮은 정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줬다. 곤히 잠든 얼굴을 보니 그런 마음이 쏙 들어갔다. 긴장이 풀렸는 지 정신 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혹시나 싶어 귓가에 정인아, 하고 작게 불러 봐도 소용이 없었다. 정인은 미동도 없이 잠든 채였다.

 

 승민은 하염 없이 그 얼굴을 바라 봤다. 정인이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깰까 싶어 숨까지 다 참았다. 간만의 휴일에 들떠버린 애인은 아랑곳 않고 깊은 잠에 빠진 정인은 도무지 깰 기미가 없어 보였다.

 

 

 결국 황금 같은 휴일은 정인의 피로를 푸는 것으로 거의 하루를 다 보냈다. 저녁이 다 될 때 쯤에야 느지막히 일어난 정인이 시계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다섯시? 지금 아침 다섯시지? PM 5:00를 뻔히 보고도 그렇게 물었다.

 

 비록 남자 친구의 휴일에도 홀로 점심을 차려 먹은 승민은 조금 쓸쓸 했지만, 일어난 정인의 낯이 반짝거려 이내 아쉬움을 싹 지워버렸다. 정인이 오래 자서 분홍빛이 된 얼굴로 승민의 곁에 찰싹 붙어 앉았다. 승민이 TV 볼륨을 조금 낮췄다.

 

 “ 배 고프다 … ”

 

 끼니도 거르고 내리 잠만 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뭐 먹을까? 승민이 까치집이 된 정인의 뒷통수를 슥슥 쓰다듬었다.

 

 “ 먹고 싶은 거 있어? ”

 

 승민의 물음에도 답은 않고 빤히 바라 보기만 했다. 왜? 승민이 입모양으로 묻자 정인은 그제야 히 웃었다. 간만에 귀엽게 구는 탓에 승민은 속이 다 말랑거렸다.

 

 “ 2인분 배달 되는 걸로 시켜. 나 없으면 못 먹는다며. ”

 

 정인이 승민에게서 받은 카톡을 떠올리며 말 했다. 종종 저녁 먹을 때마다 상황 보고 하듯 연락을 하는데, 가게에서 1인분 배달을 안 해 주는 걸 엄청 서러워 했다. 너 있으면 두 개 시키는 건데 ㅠㅠ. 투정 하는 메세지는 그냥 보고 치우곤 했지만, 한편으로는 은근 신경이 쓰였다.

 

 “ 어 … 찌개는 별로? ”

 “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

 

 내가 다 사줄게. 덧 붙인 말에 승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하고 묻는 표정이었다. 식비가 포함 된 생활비는 항상 일정 했다. 승민은 집-서울에 본가가 있는데도 굳이 정인과 자취 하겠다며 떼를 써 뛰쳐 나온 그 곳-에서 꼬박꼬박 받아다 쓰는 용돈의 일부를, 정인은 월급의 일부를 떼다가 공동 생활비로 썼다. 당연히 외식도 거기서 지출이었다. 직접 돈을 벌어 쓰고 난 뒤로 정인은 근검절약을 위해 애 쓰고 있었다. 영수증도 열심히 모으고 포인트도 꼬박꼬박 챙겼다. 의외라는 듯 한 승민의 반응에 정인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 돈 버는 사람이 사주려고. ”

 

 방금 좀 멋있었지. 정인이 한껏 고개를 치켜 들고 승민을 바라 봤다. 아쉽게도 마주치는 눈에는 존경심보다는 당장에라도 깨물어 주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해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정인이 처음으로 머리를 잘라 줬던 날을 기억 한다. 간절히 부탁 했다. 시험이 코 앞인데 사람 머리에 한 번만 해보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승민은 과감히 학원을 제끼고 정인을 따라 나섰다.

 

 이제 머리 할 일 있으면 나한테 말 해.

 

 정인이 열심히 치운 실기실 구석에다 승민을 앉혀 놓고 말 했다. 목에는 엉성하게나마 천까지 묶어 줬다. 승민은 꼼짝 않고 앉은 채 왜? 하고 물었다. 허공에 가위질을 해보이던 정인이 씩 웃으며 대답 했다.

 

 내가 잘라 줄게.

 … 계속?

 

 승민이 조심스러운 빗질에 눈을 감고 물었다. 마침 앞머리가 조금 길어 눈을 찌르려던 참이긴 했다. 정인이 분무기를 쥔 채 제가 시킨 대로 얌전히 있는 승민을 바라 봤다. 졸업 사진 찍는 날 한 시간이나 머리를 만지던 사람이 어쩌자고 뭣도 없는 제게 모든 걸 맡긴 지는 몰라도, 이러고 있는 승민이 귀여워 보이긴 했다. 말 잘 듣고 착한 남자 친구. 이 정도면 오래 오래 공짜로 머리 해 줄 마음이 생겼다.

 

 당연하지.

 

 정인이 느리게 답 하며 다시 가위를 들었다. 승민의 머리칼이 조금씩 잘려 나가기 시작 했다.

 

 감은 눈 위로 살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 바짝 다가온 정인에게서 풍기는 알싸한 약품 냄새. 머리칼을 조심스레 매만지는 손가락. 모든 것이 신기할 정도로 생생히 느껴졌다. 승민은 이 고요한 공기가 좋았다. 허접하기 짝이 없는 실습실에서, 잔뜩 긴장 한 채 컷트 연습을 하는 남자 친구. 하염 없이 좋기만 했다.

 

 

 그 때 정인의 컷트에 점수를 매기자면, 후하게 60점 정도. 다음 날 등교 한 승민이 몇 번이나 머리 어디서 했냐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물론 물어 본 이유는 “거기는 거르려고” 였다. 생각보다 짧게 잘렸다. 눈썹이 거의 다 보일 정도였다. 컷트 직후에 정인은 울기 직전의 얼굴로 안절부절 했다. 마네킹 대가리만 자르다 직접 잘랐더니 너무 긴장 했다는 게 이유였다.

 

 … 괜찮은데.

 

 승민이 거울에 앞 뒤 옆을 비춰보며 겨우 말 했다. 좀 많이 … 짧긴 해도 전체적인 모양새는 괜찮았다. 물론 돈 내고 전문가에게 맡긴 머리였으면 환불 요청을 고민 해 볼만 하나, 이건 어디까지나 정인의 솜씨였다. 행여나 맘에 안 드는 티를 냈다가 코앞이라는 실기 시험을 망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쯤이야 다시 기르면 되지만, 망친 시험은 다시 칠 수 없었다. 승민이 최대한 활짝 웃으며 말 했다. 너 진짜 계속 내 머리 잘라 주는 거다.

 

 

 그래도 진짜 머리를 잘라 본 보람이 있는지, 정인은 그 시험을 높은 점수로 통과 했다. 기장 조절에 문제가 있던 거지 스킬 자체는 능숙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승민은 그새 집 앞에 나갈 때 모자를 쓰는 버릇이 생겼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 때의 약속은 계속해서 착실히 지켜 지는 중이었다. 승민은 그 후로도 몇 번이고 기꺼이 정인에게 머리칼을 몽땅 내줬다. 염색 연습도 하고, 펌 연습도 했다. 하필 시기가 딱 겹치는 탓에 새내기 배움터에 불 타는 새빨간 머리로 참석 하기도 했다. 그 덕에 몇 번이고 “빨간 머리”앞으로 밀려 드는 술잔을 받아야만 했지만 정인은 까맣게 모르는 일이었다.

 

 

 승민이 부쩍 길어버린 앞머리를 넘겼다. 눈을 찌를락 말락 해서 불편 했다. 시험 기간이라 그런지 별 게 다 신경 쓰였다. 정인이 잘라 준 지도 한 달쯤 된 것 같았다. 바쁜 탓에 머리 얘기는 꺼낼 틈도 없었다. 하루 종일 샵에서 남의 머리를 붙들고 있는데 집에서까지 해 달라는 건 좀 염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정인은 부쩍 바빠 보였으니까. 유명 샵에 첫 취업을 했다는 기쁨도 잠시, 일이 많이 고된 듯 했다. 평생 아르바이트라곤 수능 직후 사촌 동생 수학 과외가 전부인 승민은 가늠 하기도 힘든 노동이었다. 엄마가 사다 준 소꼬리 곰탕을 솥 째로 퍼다 먹여도 기를 못 썼다. 힘드냐고 물으면 언제나 그렇듯 고개를 젓고 말았지만 까칠한 낯은 숨겨지질 않았다. 단연코 신경 쓰일 수 밖에 없었다.

 

 “ 야. ”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에 승민이 고개를 들었다. 현진이 무거워 보이는 백팩을 끌어 안고 옆에 앉았다. 벼락치기를 한다며 이제껏 미뤄 뒀던 걸 전부 가져 온 거였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 열람실에 빈 자리가 없었다. 현진이 아메리카노를 소리 나지 않게 마시느라 노력 중이었다. 승민이 노트 끝에 글을 써 내밀었다.

 

 한지성은?

 

 분명 같이 온다고 했는데 어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셋이 함께 열람실에서 밤을 새기로 했는데 하나라도 빠지면 김이 샜다. 현진이 빨대를 문 채로 그 밑에 답을 썼다.

 

 이번 학기 버린대.

 

 승민은 대꾸 않고 다시 노트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숙이니 넘겼던 머리칼이 또 내려왔다. 대충 넘기고 펜을 쥐는데 다시 슬슬 이마를 간지럽혔다. 집중 하려 들면 그러고, 또 괜찮나 싶으면 눈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승민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나처럼 해. ”

 

 그러고 있는 걸 가만 보던 현진이 제 머리를 가리켰다. 아주 길러버린 머리칼을 귀에 꽂은 모양새였다. 현진의 헤어 스타일은 거의 단발과 비슷해 지고 있었다.

 

 “ … ”

 

 펜을 입가에 대고 고민 하던 승민이 문득 뭔가 생각 해 냈다. 핸드폰을 열었더니 6시가 막 넘어 가고 있었다. 정인은 8시에 퇴근 했다. 당장 샵으로 향하면 충분 한 시간이었다. 승민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대충 가방에 쑤셔 넣었다.

 

 “ 어디 가? ”

 

 책을 펼쳐만 놓고 핸드폰만 만지던 현진이 일어 서는 승민을 올려다 보며 입모양으로 물었다. 승민이 가방을 고쳐 메며 대답 했다. 정인이 보러.

 

 

 *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꿈 같은 휴일이 끝나고 나니 더 정신이 없었다. 같이 입사 했던 동기들이 둘이나 그만 뒀다. 사람을 뽑으려면 시간이 걸리는 탓에 빵꾸를 메우는 건 죄다 정인의 몫이었다. 한 끼도 못 먹고 뛰어 다니다시피 했다. 뭔 놈의 중요한 일들이 그리 많은지, 예약이 끝도 없었다. 정인은 제 월급의 반을 염색과 펌에다 쏟아 붓는 손님들에게 쉼 없이 다과를 갖다 받치고 잡지를 대령 했다.

 

 “ 이엔 쌤. ”

 

 쌤. 뭐해요? 멍하니 서있던 정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승민이 지어 준 닉네임이었다. 본명을 쓰려니 다들 하나씩 귀여운 이름을 갖고 있는 게 좀 신경 쓰였다. 곧장 승민에게 전했더니 그는 긴 고민 끝에 아이엔이라는 이름을 내놨다. 네이밍에 다 이유가 있었다. 너 양정, 인이니까. 완벽하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열성을 다 해 지어 준 거니까. 정인은 줄곧 가슴팍에 아이엔 석자가 새겨진 명찰을 달고 다녔다.

 

 “ 연우 쌤이 부르세요. 빨리 가 봐요. ”

 

 탕비실에서 얼음을 꺼내던 정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연우는 정인이 입사와 동시에 어시로 배정 받은 디자이너였다. 무뚝뚝한 사람이라 여즉 말 섞기가 힘들었다. 여태 따로 지시를 받은 적이 없기에 괜히 긴장이 됐다. 정인이 펌 중화 중인 손님에게 리필 한 다과를 낸 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아, 제가요? ”

 

 연우가 라텍스 장갑을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인은 선뜻 대답 하지 못 하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쌤이 한 번 해 봐요. 그러면서 샴푸실을 턱짓 했다.

 

 “ 1등으로 졸업 했다며. 그래서 뽑은 건데. ”

 “ 아, 그거는 컷트 … ”

 “ 지금 쌤한테 컷트 맡겼다가 샷다 내릴 일 있어요? ”

 

 정인은 뭐라 덧붙이려던 말을 삼켰다. 연우가 샴푸를 맡겼다. 정인은 좀 더 허드렛일을 한 뒤에야 맡을 수 있는 일이었다. 마감을 한 시간쯤 남긴 지금, 연우가 손을 다쳤다. 심한 건 아니라 응급 처치를 했지만 속도가 느려졌다. 안 그래도 사람이 빈 상황이라 큰일이었다. 남의 스태프를 맘대로 찍어다 붙을 수도 없으니, 급한 대로 정인에게 시키는 거였다. 머리 감기고 말리는 일이 뭐 그리 어렵겠냐 싶어도 이게 다 요령이 있었다. 물론 정인은 고등학교 내내 학교와 학원에서 샴푸를 배웠으나 실전은 또 처음이었다. 생각지도 못 한 일이라 손 끝이 싸늘해졌다. 긴장 돼서 식은땀이 다 날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김승민 머리 좀 감겨 볼 걸. 정인이 속으로 울며 손님의 손을 붙잡았다.

 

 “ 샴푸 … 하실게요. ”

 

 하필이면 또 어린 손님이었다. 유치원생이나 됐을까 말까. 엄마를 따라 왔다가 강제로 펌을 당한 건지 표정이 영 부루퉁했다. 아이들은 모발이 약해 컬이 나오기 까지 유달리 오랜 시간이 걸려 보통 컨디션이 좋질 못 했다. 정인이 앞치마에 넣어 놨던 카라멜까지 꺼내며 겨우 샴푸실로 유인 했다.

 

 “ 샴푸 해 드리겠습니다. ”

 

 작은 손님을 겨우 앉히고 물이 튀지 않도록 얼굴에다 타올을 덮었다. 심호흡을 열심히 했다. 옆에서 샴푸 중인 한 기수 위의 스탭이 힐끔 쳐다 보는 게 느껴졌다. 쟤가 왜 샴푸실에. 딱 그 표정이었다. 정인은 샴푸와 트리트먼트 앞에서 혼자 몰래 아자아자 화이팅을 외쳤다. 할 수 있다. 긴장 하지 말자. 그냥 … 애기 머리 감겨 주는 건데, 뭐. 이 쯤이야. 그렇게 생각 하며 떨리는 손으로 샤워기를 붙잡고 물을 틀었다. 쨍한 울음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동시였다. 수도 꼭지가 온수 쪽으로 있는 힘껏 틀어져 있었다.

 

 

 정인의 직장까지는 지하철로 20분 쯤 걸렸다. 종종 다니던 동네지만 이렇게 헤어샵이 즐비 한 줄은 모르고 있었다. 승민이 고개를 처들고 비슷비슷한 느낌의 건물들을 지나쳤다. 하나 같이 세련된 외관의 헤어샵들이 줄줄이 깔려 있었다.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차량도 몇 대 지나갔다. 새삼 정인이 얼마나 화려한 곳에서 일 하는 지가 실감 났다.

 

 양 손에 들린 것들이 제법 묵직 했다. 한참을 고민 끝에 간식을 좀 샀다.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잘 몰라서, 되는 대로 샀더니 양이 많았다. 스태프들이 전부 나눠 먹으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았다. 쿠키랑 조각 케이크 같은 것들. 부러 예쁘게 포장 해 주는 베이커리를 찾아 갔다. 손 바닥 만한 것들이 어찌나 비싼지, 덕분에 이번 주 용돈의 팔 할을 다 탕진 했다. 일종의 뇌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정인이 좀 예쁘게 봐 달라는 표시.

 

 일 하는 정인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몇 번이고 퇴근 하는 정인을 데리러 가려고 했지만 극구 말리는 탓에 가 본 적도 없었다. 그게 못내 아쉬웠는데 오늘에서야 한을 풀 예정이었다. 깔끔한 셔츠를 차려 입고 양 손에 빗과 가위를 든 정인. 그는 집중 할 때 큰 눈을 더 부릅 떴다. 승민이 좋아 하는 표정 중에 하나였다.

 

 정인의 샵은 단연 눈에 띄었다. 커다란 간판에 멋들어진 필기체가 반짝였다. 몇 번이고 카카오 지도를 다시 확인 한 승민이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마감이 다 된 시간이라 그런지 생각만큼 복작거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닥에 널린 머리카락을 분주히 치우는 스태프들을 보니 얼마나 바빴는지 얼추 짐작이 됐다. 정인을 불러 달라 하려는데 마침 카운터도 비어 있었다. 그 앞에 얌전히 서서 기다리려던 승민이 안 쪽에서 나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샴푸실에서 웬 꼬맹이가 머리에 물을 뚝뚝 흘리며 뛰어 나왔다. 쪼끄만게 얼마나 크게 우는 지 샵이 다 울릴 정도였다. 꼬맹이가 옆 쪽에서 롤을 말고 있던 아빠-로 추청 되는 사람-에게 덥썩 안겼다. 거기까지 보고 다시 시선을 돌리려던 승민이 그대로 정지 했다.

 

 정인이었다. 집까지 가져 와 자랑 하던, 샵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앞치마를 한 양정인. 꼬맹이를 곧장 뒤쫓아 샴푸실에서 나온 그가 고개를 꾸벅 꾸벅 숙였다.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손이 새빨갰다.

 

 스태프 몇 명이 모여 들었다. 정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입 밖으로 하는 말은 들리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분명 그렇게 말 하고 있었다. 뒷쪽에 서 있던 여자가 나왔다. 정인이 몇 번 말 했던 사수인 듯 했다. 그가 손님에게 사과 하는 동시에 정인을 바라 봤다. 두 눈이 싸늘했다. 다른 스태프가 서둘러 꼬마 손님을 데리고 먼 자리로 이동 했다.

 

 “ 예약 하고 오셨어요? ”

 

 승민이 제 뒤에서 들리는 말에 돌아 봤다. 어느새 카운터로 나온 직원이 묻고 있었다. 승민은 대답 하지 못 한 채 눈만 깜빡였다. 등 뒤에서 제법 큰 소리가 났다. 정인이 혼 나고 있었다.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다니냐는 힐난이었다. 대꾸는 없었다.

 

 “ 손님? ”

 

 아무런 답이 없는 그에게 카운터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승민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예요.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엉망으로 튀었다. 승민은 서둘러 샵을 빠져 나왔다. 손바닥을 파고 드는 쇼핑백이 너무 무거웠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시간이었다. 9시가 조금 덜 된 저녁. 정인이 도어락을 열고 들어 오는 소리가 났다. 소파에 파묻혀 책을 뒤적이던 승민이 일어 났다.

 

 “ 공부 하고 있었어? ”

 

 바람 냄새를 잔뜩 묻히고 온 정인이 현관에 서 있었다. 꼬질한 스니커즈를 대충 벗어 내며 물었다. 승민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고 뭐고,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속이 상했다. 된통 깨지는 남자 친구를 직접 목격 하는 건 생각보다도 훨씬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심장이 바닥까지 다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주말 마다 피곤해서 꾸벅 꾸벅 조는 정인이 생각 나서 더 그랬다. 왜 그렇게 샵에 찾아 오지 말라고 했는지, 오늘은 뭘 했냐 물으면 대꾸 없이 씩 웃기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게다가 정인은 그런 걸 티내는 타입도 아니었다. 하염 없이 속으로만 눌러 삼킬 게 분명 했다. 그 누구에게도, 하물며 승민에게도 말 하지 않고 늘 그렇듯 꾹꾹. 명치께가 얹힌 듯 답답했다. 어떻게 해 줄 수도 없는 일이라 그저 한숨만 나왔다.

 

 “ 자. ”

 

 정인이 멍하니 서 있는 승민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 뭐야? 받아 들어 열어 보니 아이스크림이었다.

 

 “ 아이스크림? ”

 

 외투를 벗은 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고개를 들며 히 웃는데, 누가 봐도 실컷 울어 제낀 얼굴이었다. 눈은 시뻘건데다 퉁퉁 붓고, 얼굴이 다 허옇게 질려서는. 승민은 차마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눈치도 없이 입꼬리가 자꾸만 굳어졌다.

 

 “ 민트 초코로 다 채웠다. ”

 

 짱 맛있음. 정인이 승민의 손에 들린 걸 뺏어다 상 앞에 앉았다. 이제 붕어빵 팔겠더라, 짱 추워. 너 안 추워 반팔 티? 정인이 열심히 조잘대며 숟가락을 들었다. 승민은 말 없이 옆에 앉아 그걸 쳐다만 봤다.

 

 “ 오늘 지하철 사람 역대급. 나 한 번도 못 앉았어. ”

 “ … 웬 아이스크림? ”

 

 승민이 제 손에 숟가락을 들려 주는 정인을 보며 물었다. 정인이 말 없이 아이스크림을 한 숟가락 펐다. 곧장 제 입으로 넣는가 싶더니 냅다 그걸 불쑥 들이밀며 말 했다. 승민이 빨간 눈을 한 정인을 가만히 쳐다만 봤다.

 

 “ 아 해. ”

 “ … ”

 “ 아. ”

 

 영문 모를 귀여운 짓에 승민은 일단 아이스크림을 받아 먹었다. 싸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정인이 그걸 보다 작게 웃었다.

 

 “ 기념이야. ”

“ 기념? ”

 

 승민이 머릿 속으로 온갖 기념일들을 다 떠올려 봤다. 그런 승민을 눈치 챈 정인이 그런 거 아니고, 하며 다시 입을 뗐다.

 

 “ 나 이제 샴푸 하는 거 기념. ”

 “ … 샴푸? ”

 “ 어. 나 오늘 샴푸 했거든. ”

 

 약간 진급 같은 거지. 정인은 그제야 제 몫의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손가락 끝이 여즉 빨갰다. 밴드도 덕지덕지, 자잘한 상처가 끊일 날이 없는 손. 승민이 가만히 아이스크림을 먹는 정인을 바라 봤다. 줄곧 나지막하게 들끓던 속상함은 끊어질 기미가 없었다.

 

 “ … 정인아. ”

 

 웅? 입에 숟가락을 물고 고개를 들던 정인이 그대로 바짝 굳었다. 승민이 갑작스레 크게 팔을 벌려 끌어 안은 탓이었다. 왜 이래? 당황해 물어도 답이 없었다. 하염 없이 끌어 안고만 있었다. 숨 막힌다며 밀어 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야아 … ”

 

 뭔 일이라도 있나 싶어 조심스레 불렀더니 그제야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뺨에 입술을 찍었다. 턱 끝과 목덜미에도 몇 번이고 짧게 붙었다 떨어졌다. 정인이 살짝 몸을 비틀었다. 얼핏 드러난 승민의 낯이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뽀뽀를 퍼붓던 승민이 다시 정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정인아.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정인은 여전히 반쯤 굳은 채로 대답 했다. 승민에게 안긴 부분이 유달리 따끈따끈 했다.

 

 “ 나는 … ”

 “ … ”

 

 승민이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 나는 뭐? 기다리다 못 한 정인이 되물어도 답이 없었다. 끌어 안은 팔에 더 힘을 주기만 했다. 정인은 아주 갇혀 버린 양 가만히 안겨 있었다. 오래도록 가만히 있던 승민이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했다. 느릿하게 입을 떼는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 뺨 위로 가득 쏟아져 내렸다.

 

 “ 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

 

 …. 정인은 아무 말 없이 승민을 바라 봤다. 몰래 큰 숨을 들이 쉬느라 가슴이 막 부풀었다. 유달리 피곤 했던 하루 끝에 마주 하는 다정함에는 면역이 없었다. 승민의 말이 어딘가를 쿡 찔렀다. 굳은 살이 박히지 못 해 연한 곳이었다. 속이 막 요동쳤다. 단단히 쌓아 왔던 틈을 비집고 뭔가가 터져 나오려 했다. 입술을 꾹 깨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급히 얼굴을 가려 봐도 이미 늦은 뒤였다.

 

 정인이 다시금 저를 꼭 끌어 안는 승민의 온기를 느꼈다. 보여 주지 않으려 푹 숙인 낯으로 부드러운 손이 파고 들었다. 정인은 고개를 들고 승민이 제 뺨을 훔치도록 놔뒀다. 울지 말라는 목소리가 하염 없이 다정했다.

 

 쪽팔렸다. 귀가 뜨겁게 달아 올랐다. 승민에게는 아무 일 없는 것 마냥 열심히 일 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엉엉 울어 버리면 투정이나 하는 것 같았다. 새벽같이 일어나 밤에 들어 오면서도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 무던 애를 쓰던 게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 갔다. 완벽한 남자 친구가 되는 건 실패였다. 그것도 대 실패. 승민은 항상 이렇게 정인을 무장 해제로 만들었다.

 

 눈물로 어룽진 시야로 다정한 낯이 보였다. 정인이 가까이 다가 온 승민의 뺨을 단단히 붙잡았다. 왜 나를 울려. 쏘아 붙이고 싶은 걸 꾹 참고 무작정 입술을 갖다댔다.

 

 키스에서 짠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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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콘

2019. 11. 30. 23:30

 

 

 

 

 

 

 

합작 참여진 후기

2019. 11. 30. 23:30

 

 

텐더

 

안녕하세요, 텐더입니다.

첫 번째 승양 합작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중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 때 힘껏 안아 주세요.

승민이와 정인이가 늘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김실장

 

안녕하세요. 김실장이라고 합니다ㅎㅎ.

치일 줄 몰랐던 승양에 8톤 트럭 급으로 치어 부랴부랴 승양 합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이런 보배로운 승양 합작을 주최해주신 주최진 분들께 매우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11월 30일을 승양으로 풍요로이 보낼 수 있게 되어 매우 행복합니다.

읽고 볼 컨텐츠들이 엄청나다 엄청나!! T_T!!!

유별난 글을 쓰는 체질이 되질 못 해 호기심에 앱으로 만나 서로 쌍방삽질을 하다, 결국 통하는 승양을 쓰게 되었는데요.

쓰는 내내 너무 즐거웠습니다.

매우 단조로운 일상 글과 다름없는 별다른 특징 없는 글이지만 가볍게,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모두 승양 아래 행복하시고 감기 조심하세요!ㅎㅎ

 

 


 

 

머슴

 

안녕하세요, 머슴입니다~!

승양 첫 번째 합작에 참여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림은 한참 고민하다가 사귀기 전에 썸 타는 승양 정도로 생각하고 그렸어요.

정인이가 듣는 노래 취향이 궁금하고 + 장난기가 돌아서 한 쪽 이어폰 빼는 김승민 같은 느낌으로 생각하고 시작했습니다.

구체적인 배경은... 저는 도서관 창가를 생각하면서 그렸는데 끝까지 마음에 들게 잘 나오지를 않아서 (...) 자유롭게 생각해주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빠듯하게 마감해 아쉬운 점도 남았지만~ 작업하는 내내 정말 즐거웠습니다 ㅎ.ㅎ

BGM은 가사에 승양 같은 부분이 나와서 골랐어요.

작업할 때 제일 많이 들은 곡은 '러블리즈 -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우리 (Beautiful Days)'였습니다.

한 마디 두 마디 하다 보니 길어졌네요.

마지막으로 고생해주신 주최자분과 다른 참여자분들, 봐 주신 분들에게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들 승양처럼 행복하고~ 즐거운 하루 보내셨으면 합니다 ^ ^ (ㅋㅋㅋㅋㅋ)

 

 


 

 

낱알

 

먼저, 승양합작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제가 승민이와 정인이만의 이야기를 쓰는 건 처음이라서 즐겁게 읽으셨을지 모르겠네요.

후기에는 보통 어떤 얘기를 쓰나 생각해봤는데, Love lies의 뒷얘기를 쓸 일은 없을 것 같아서 글 얘기를 조금만 해볼게요.

정인이는 승민이를 우연히 자주 마주쳤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건 승민이가 원래 등교하던 시간을 앞당겨 엘리베이터를 몇 번이나 보내서 가능했다는 설정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승민이가 데이트 신청을 해왔다는 건 느끼셨을지 모르겠어요.

같이 공부하는 것도, 승민이 집에서 저녁을 먹는 것도, 공연을 보러 가는 것도 전부 승민이가 제의한 거였거든요.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서 승민이 시점으로 이야기를 더 풀어낼까 고민하다가 끝부분은 일부러 거칠게 뚝 끊어버렸는데요, 제가 의도한 건 맞지만 생각한 느낌이 났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먼저 좋아한 건 김승민이지만 마음고생은 양정인이 혼자 다 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여기까지 후기를 읽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합작을 열고 참여하신 분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귀한 곳에... 누추한 글로... 참여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

승양 사랑해라 라고 하지 않아도 둘은 이미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요!!

승양 짱 승양합작 짱

 

 


 

 

익명(무명연애)

 

언제나 미리미리 써야지 라고 생각해 두고 마감 앞에서 갈겨버리는 버릇은 못 고치는 건가봐요...

 

 


 

 

페노

 

 

좋은 기회로 승양 합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승양이 황혼 같은 기억을 끝나지 않을 이야기로 남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작업했고, 둘의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ing 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ㅎㅎ

솔직히 마감에 허덕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합작이었고 무엇보다도 마감하면서 너무너무 즐거웠습니다.

모든 합작 참여진 분들 정말 수고하셨고, 주최자님께 합작 주최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불계란

 

안녕하세요 불계란입니다 ^.^

일단 승양합작이 열려서 너무 너무 기쁘고 감격스럽고 설렙니다... ㅠㅠ

역시 2019년 최고의 떡상효자씨피S2

찬바람 부니까 핫초코 미떼...가 아니라(ㅎㅎ) 슬프고 마음 아픈(ㅠㅠ) 승양이 보고싶다는 마음 하나로 이번 합작에 <김승민찾기>라는 글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워낙 '기억'이라는 키워드를 좋아하기도 하고,

아무리 소중한 사람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슬프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에게 평생 기억하고 싶은 누군가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ㅎ.ㅎ

언제나처럼 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글로 배운 사투리가 많이 어색할까봐 걱정...)

무엇보다 고생 많으셨을 합작 주최진분들과 합작 참여해주신 모든 천재분들... 꼭 적게 일하고 많이 버시길...

승양 화이팅 제발 결혼해라 제발

 

 


 

 

바란

 

안녕하세요, 이번 승양 합작에 '우리는 습관을 나누고'로 참여한 바란입니다.

사실 제가 슼페스 입문하면서 가장 처음으로 관심 가졌던 씨피가 승양이거든요...

승양 좋아해요 사랑하고... 다들 그러시겠지만 붙어있는 둘 보면 그저 흐뭇할 뿐이네요ㅠㅠ

잔잔하고 소소한 분위기의 승양을 쓰고 싶었는데 잘 전해졌으면 좋겠구요.

합작주님, 참여진 분들, 합작 즐겨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승양과 함께 따뜻한 겨울 보내세요.

 

 


 

 

익명(어게인)

 

합작 마감을 마치고 짧은 tmi 후기 남겨봅니다,,

승양 합작 열린 걸 보고 승양이 이렇게 메이저구나() 싶어서 제가 한 것도 없는데 괜히 뿌듯하고, 저의 오십 년 알페스 인생에 첫 합작 참여라 떨리기도 하고 그랬네요.

급하게 쓰느라 글이 두서없는 것 같고 또 생각나는 더 많은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지만 시간 부족+능력 부족으로 못 담은 부분도 있어서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데요.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혹시나 끝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승민이도 정인이도, 그리고 세상 모든 승양러 분들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바라요.

감사합니다!

 

 


 

 

푸딩

 

승양이 언제나 행복했으면 좋겠고, 이번에도 그런 마음으로 썼습니다.

날씨는 많이 춥지만 승양과 함께하는 겨울이라 따뜻할 거 같아요.

겨울은 승민이의 계절(딸기)이기도 하고, 정인이의 계절(생일)이기도 하니까요.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따스한 겨울 보내시고, 얼마 남지 않은 20x19 승양을 마음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익명(영상)

 

많이 부족한 퀄리티인 점.. 죄송합니다 ㅠㅠ

근데 영상 제작하면서.. 그냥 예쁜 커플 브이로그 편집하는 기분이었어요 ㅎㅎ

 

 


 

 

uno

 

주제를 처음 보고 카메라에 정인이를 담아내는 승민이를 그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인이를 찍고 있는 승민이는 어떤 마음일까 싶기도 했고, 자신을 기억해 주는 승민이를 찍는 정인이의 모습도 궁금했어요.

카메라로 담아낸 것들은 그게 언제 찍은 것이든 기억이자 기록으로 남잖아요.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카메라로 보는 시선이 곧 그 사람의 시선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승민이와 정인이의 시선을 그려내려고 노력해봤는데 잘 표현됐을지 모르겠네요. ;-;

부족하지만 좋은 기회로 승양 합작에 참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합작 주최진과 다른 참여진 분들 모두 수고 많으셨구요, 부족한 영상 봐주신 분들은 정말 감사드려요.

승양 짱! 영.사하세요. ♥

 

 


 

 

 

안녕하세요 룬입니다

우선 단일씨피가 합작이 열린다? 그것은 뭐다? 바로 메이저다~

승양합작이 열릴 수 있게 도와주시고 참여해주신 분들에게 모두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러번 엎고 혼자 징징거리는 거 다 받아주신 모든 분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여러분이 있어 승양이 있습니다

그냥 무작정 승민이가 가톨릭 신자인 정인이에게 지옥은 니 몫까지 내가 갈게” 하는 게 보고 싶다 해서 쓰게 된 글인데 잘 전해졌는진 모르겠어요

제 글은 부디 잊어주시고 다른 분들의 참여작을 많이 많이 아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들 행복하세요 승양 안에서

 

 


 

 

 

머슴

2019. 11. 3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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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습관을 나누고

2019. 11. 30. 23:30

 

 

 

 

 

그냥 애매했다. 잘 하는 건 아닌데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집안에 예술가 하나 있음 얼마나 보기 좋냐. 아버지는 평생 악기 한 번 못 만졌어도 기개만은 좋았다. 그리고 나는 잘 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더 많았다. 그래서 그냥 했다. 죽도록 한 건 아니었고 그게 미치도록 좋지도 않았지만. 그게 날 서울로 데려간 것만은 즐거웠다. 바이올린 얘기다.

 

 

 

 

 

 

 

 

 

 

 

 

해운대구에서 열린 작은 대회에 나갔다. 내 예고 진학과 함께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를 왔지만 그 대회 다음날이 부산에 계신 할머니 생신이었으니까 겸사 겸사 내려왔다. 대회장은 복지센터의 무대였다. 작은 대기실에 제각각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바이올린을 하나씩 안고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그 중 내 눈에 띈 건 내 옆 사람이었다. 나는 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사람은 우리 학교 교복 차림이었다. 서울에서 알아주는 명문 예고에서 굳이 멀고 작은 부산 대회까지 내려온 건 우리 둘뿐일 것이다. 때가 탄 벽에 올곧게 허리를 펴 기대 앉은 그 선배는 눈을 감고 누차 깊은 심호흡을 했다. 김승민이란 이름이 박힌 하얀 명찰을 보면 2학년인데. 많이 떠는 타입인가. 어디 아픈가. 초면에 별 생각 다 불러일으키도록, 좁혀진 미간과 이따금씩 씹히는 입술이 담긴 얼굴은 멀끔했다. 저기요. 적막한 대기실 분위기에 나는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걸었다. 반짝 떠진 눈이 바로 옆의 나를 향했다.

 

“이거 저만 아는 건데요.”

 

운을 뗀 나는 바닥에 바이올린과 활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제대로 앉아 눈을 감으며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남들이 앳된 얼굴이랑 안 어울린다고 하기 일쑤인 큼직한 손으로 내 목덜미를 쥐었다. 잘 잡히지도 않는 살을 꼬집듯 움켰다 놓았다. 위아래로 여러 번을 반복했다.

 

“이러면 덜 떨려요.”

 

눈을 뜨며 옆을 보았을 땐 그 선배가 나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눈꺼풀을 닫고 있길래 몰랐는데 꼭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한 눈빛. 그 선배가 씩 웃는 것과 동시에 대기실 문이 열렸다. 스태프가 나를 호명해서 나는 내 바이올린을 들고 일어섰다.

 

“정인이?”

 

열린 문을 나가기 전 그 선배가 나를 불렀다.

 

“알려줘서 고마워.”

 

자기 목덜미를 주무르며 웃는 얼굴이 순했다. 바짝 맨 넥타이만큼 정갈한 서울말과 생긴 거만큼 나긋나긋한 목소리. 나는 그 선배가 노래를 해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 따윌 했다.

 

 

 

 

 

 

 

연주를 마친 나는 얼이 빠졌다. 딱히 실전을 망친 것도, 너무 떤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바이올린으로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건 애저녁에 알았는데. 그냥 포기하고 싶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그런 순간이었다. 순서가 끝난 참가자들의 대기실엔 촬영 중인 대회장이 풀샷으로 TV에 방영되었다. 그 화면 안에 비춰지는 김승민 선배는 절대로 떠는 타입도 어디가 아픈 사람도 아니었다. 나뭇가지에 하얗게 만개한 꽃처럼 혹은 빨갛고 탐스럽게 열린 열매처럼. 그저 바이올린에 맺혀서 태어난 사람인 게 분명했다. 왼뺨을 바이올린에 뉘인 그 선배의 미간은 대기실에서처럼 좁혀져 있었다. 쇼팽의 야상곡 20번. 직접 빚어내는 풍성한 선율을 따라 몸을 너울거리고 깊이 숨을 쉬었다. 나는, 그리고 이 세상에 많은 누군가들은 저 선배를 절대 뛰어넘을 수 없겠구나. 무력감이 강렬해서 사람을 에워싸기까지 했다.

 

 

 

 

 

 

 

 

 

우리는 습관을 나누고

 

 

 

 

나는 그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탔다. 1, 2, 3위 다음의 최우수상. 애매했다. 그리고 그 선배는 당연하게 1등을 했다. 다시 마주친 건 학교에서였다.

 

“왜 떠는 척했어요?”

 

체육관을 나가던 나는 체육관에 들어가는 그 선배에게 대뜸 물었다. 남색 체육복 지퍼를 끝까지올려 입은 선배는 물끄러미 나를 보다 답했다.

 

“진짜 떨었는데.”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선배는 애초에 유명했다. 중학생 때부터 미국 유학을 하면서 거기서도 상을 많이 탔다고 했다. 우리 예고에는 캐스팅되다시피 일주일 전에 전학왔다고 했다. 우리 학교에서 그 선배를 모르는 건 나를 포함해 둔한 학생 몇뿐이었다. 아무튼 나는 전문가에게 내 소중한 목덜미 잡기 스킬을 알려준 게 좀 억울했다. 내 눈빛이 고분고분하지 않았는지 선배는 오른손목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상황이 이것저것 겹쳤는데. 손목 부상도 있었고 시차 적응도 덜 됐고… 근데 무엇보다 엄마가 보러 와서.”

 

“원래 안 보러 오세요?”

 

대회마다 엄마가 차로 데려다 주곤 하는 나에게 그건 좀 생소한 일이었다. 선배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혼한지 오래돼서 처음 보러 오신 거야.”

“……아.”

“괜찮아.”

 

아직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선배는 나를 위로했다. 활을 쥐면 널찍하게 공기를 가르던 선배의 오른손이 자신의 목 뒤편으로 향했다.

 

“너도 너만 아는 거 알려줬잖아.”

 

선배가 목덜미를 주무르며 쿨하게 웃었다. 말문이 막힌 나는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어디라도 숨고 싶었다. 타이밍 좋게 종이 쳤다. 나는 웃는 선배를 남겨두고 교실로 줄행랑 쳤다.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어어. 승민이 형의 눈에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 스쳐갔다.

 

-꾸준히 열심히 해서 다음에도 1등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1등 하자마자 다음 목표가 또 1등이라니. 그런 삶은 좀 힘들 것 같았다. 이럴 때면 나는 그 선배를 동경하는 게 아니라 동정하는 것 같다. 전국구 콩쿠르에서 1등을 한 선배가 똘망똘망 인터뷰하는 모습이 내 핸드폰 화면 가득히 재생되었다.

 

“그거 그만 좀 봐라.”

 

그리고 그 형은 내 양반다리에도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둘뿐인 옥상에 쏟아지는 햇살이 꽤 따스해져 있었다.

 

“왜. 신기하잖아.”

“한두 번도 아닌데 뭐가.”

“그래도. 형은 영상에 나올 때마다 신기해.”

 

사실 이 형이랑 어울릴 생각은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뜻밖의 가정사를 들은 날엔 다시는 마주치기 싫었다. 미안하고 어색해서. 그런데 승민이 형은 나를 자꾸 찾아왔다. 비슷한 집 방향과 교외 대회들에서 마주치는 건 우연이라 쳐도, 형은 때마다 동갑내기나 반 친구와 어울리길 자처하고 내 옆에 자리하고 말을 걸었다. 그러다 나름 친해졌다. 문득 몸을 일으켜 앉은 형이 내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처음엔 세상 단정하고 조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날 놀리거나 헛소리를 할 때면 얼굴 온 구석에 장난기가 가득 차오른다.

 

“나 실물이 더 낫지?”

“아니. 둘 다 못생겼어.”

 

짤 없이 등을 돌리면 형이 내 등짝에 업히듯 달라붙었다. 아아. 하지 마. 허리가 다 접히게 제 몸을 묻어오는 형에게 짜증을 부리자 형은 오늘따라 순순히 일어섰다.

 

“나 가야 돼.”

 

형은 바닥에 둔 제 바이올린 케이스를 어깨에 멨다. 오늘도 큰 문화재단에서 열리는 콩쿠르에 나간다고 했다. 학년별로 제일 잘하는 사람 몇만 뽑혀 나가는 거라 나는 들지 못했다. 왠지 발을 옮기지 않던 형이 내게 말했다.

 

“끝나고 만나자. 떡볶이 사줄게.”

 

올려다본 그 형은 목덜미를 문지르고 있었다. 곧 있을 대회가 갑자기 떨리기라도 했는지. 내 습관은 형의 습관이 된지 오래였다. 나는 대회장에서나 체육 수행평가 전에 목덜미를 문지르는 그 형을 우연히 발견하면 왠지 기분이 좋았다. 긴장이 될 때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이 세상에 우리 둘 뿐이니까. 비밀스러운 건 원래 재미있는 법이다. 그렇게 똑같은 습관을 가진 것치고 우리는 따로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형이 방금 떡볶이를 먹자고 해서 깨달았다. 왠지 순서가 바뀐 것 같아서 웃겼다.

 

“알았어.”

 

내가 흔쾌히 답하면 형은 목을 만지던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하늘이 가까워서인지 바람이 더 산뜻했다.

 

 

 

 

 

 

 

 

 

 

 

 

“넌 왜 나한테 바이올린 켜달라고 안 해?”

 

주번이어서 일찍 등교한 날. 굳이 나를 따라 일찍 등교한 그 형이 빈 책상에 걸터앉아 말했다.

 

“다들 한 번만 보여달라고 조르는데.”

 

그 형이 바이올린 켜는 거야 유투브에도 있고 대회에 같이 나가면 볼 수도 있었다. 지난주에 있었던 2학년 학예회에서도 봤다. 오케스트라 형식일 때 형은 좌측 앞쪽, 지휘자 선생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다. 2악장 시작 전에는 그 선생님이 악수를 건네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의 부러움과 질투 어린 시선이 가 닿았는지 그 형은 아마 모를 것이다. 제2바이올린 중간 즈음에나 자리하는 나 역시 그 형이 한없이 대단해 보였다. 아무튼 그 형의 연주는 영상에서보다 실제일 때, 오케스트라의 일원일 때보다 솔로일 때가 더 압도적이기는 하다. 여려졌다 몰아쳤다 하는 소리의 울림, 입 한 번 안 열고도 당차고 깊은 호흡이 스피커나 화면이 아닌 공기를 타고 전해져 오는 건 격이 다른 실재감이었다.

 

“그럼 함 켜봐.”

 

나는 바닥을 쓸던 대걸레를 벽면에 기대놓으며 말했다. 장난 섞인 명령조에 둘 다 웃음이 나왔다.

 

“기분 이상한데.”

 

그 형은 고개를 갸웃대면서도 옆에 둔 몸집만한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냈다. 대충 어깨에 얹고 활을 송진에 묻힌 뒤 튜닝을 시작했다. 이른 아침의 적막한 교실이 익숙하고 맑은 현 소리로 채워졌다. 나는 문득 형이 떡볶이를 먹자고 했던 날처럼 알아차렸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 이렇게 둘뿐인 공간에서 그 형의 연주를 마주하는 게 처음이라는 걸.

점 하나가 선명한 뺨이 검은 턱받침(Chinrest)에 살포시 묻혔다. 그 형은 활을 올리기 몇 초 전부터 눈꺼풀을 내려 닫는다. 이내 치켜 올라간 오른손. 팽팽하게 당겨진 현 위로 유려히 활을 긋는 그 형은 바이올린을 듣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귀 기울여. 갓난아기의 칭얼댐에 어떤 의미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귀담아 듣고 달래고자 하는 자상한 사람처럼. 제 활질에 못 이겨 이끌려가다 속력을 줄이다 하는 완급 조절이 완벽했다. 형은 마지막 음절을 느리고 길게 늘어뜨리며 연주를 끝마쳤다.

 

“좋다.”

 

그런 말은 그냥 터져 나왔다.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어서 절로 되새김질했다.

 

“좋아.”

“내가 작곡했어.”

 

그 말에 눈을 좀 크게 떴던 것 같다. 2, 300년 전에 돌아가신 거장들의 악장을 카피하고 소화해야 하는 아마추어 전공자에게는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세상에 없는 노래를 들어본 게 처음이었다.

 

“뻥 치지 마.”

 

그래서 거짓말로 치부했다. 짧고 굵은 일갈에 형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야.”

 

눈을 맞추지 않고 중얼거린 형은 바이올린을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꼼꼼히 닫아 잠그고 어깨에 멨다. 교실을 나가려는지 미닫이문 옆에 기대어 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제목은 9월 21일이야.”

 

시선을 맞춘 형은 왠지 목덜미를 만지작댔다. 갑자기 긴장이라도 됐는지. 그 손으로 곧 문을 열고 나갔다. 그 형의 생일은 9월 22일이었다. 생일 이브를 주제로 노래를 만든 건가. 나는 해운대구에서 열린 대회가 그 날짜였던 걸 한참 후에 깨달았다.

 

 

 

 

 

 

 

 

 

 

 

 

승민이 형은 내년 초에 일본에서 열리는 국제 콩쿠르에 나가게 됐다. 파가니니의 이름을 건 콩쿠르는 무려 예비 심사까지 거쳐 참가자들을 추려냈다. 나는 애초에 지원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떨어질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그런 주제에 욕심은 많았다.

 

“나도 일본 가고 싶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었다. 동복 위에 더플코트를 입고도 어깨를 조금 움츠리자 형은 길쭉한 단추를 여며주기 시작했다. 나는 주머니에 넣은 손들을 빼지 않고 형을 내버려두었다.

 

“바이올린 하면,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면 세계 곳곳 다닐 수 있는 줄 알았어. 부산에서 서울로 온 것도 바이올린 때문이었으니까. 일본 가보고 싶다. 한 번도 못 가봤는데.”

“같이 갈래?”

“어?”

“일본. 같이 갈래?”

 

그 형은 그걸 마치 떡볶이 먹자고 말하듯, 양 손으로 단추를 잠가주듯, 그리고 툭하면 대회에서 1등 해먹듯이 말했다. 나는 그게 재미없었다.

 

“나 약 올려?”

“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마지막 단추까지 여며준 형의 손과 눈이 정직하게 멈췄다. 나는 괜히 비껴 서며 형을 피했다. 형이 날 놀렸을 수 있다는 사실보다 내가 뱉은 말이 유치하기 짝이 없어서 창피했다. 그 형의 가정사를 들은 날처럼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며칠 연락 안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내일은 그 형의 독주회였다.

 

“정인아 나는 그냥, 일본 가봤는데 좋아서 그랬어.”

“아 알았어. 나 먼저 갈래.”

 

결국은 짜증이 솟구쳤다. 분위기 파악 못하나 싶어서. 털털 앞서 걸어가면 형은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 형은 내가 진짜로 예민해졌을 땐 잠시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인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차고 딱딱한 아스팔트가 형의 손바닥 위인 느낌이었다. 몇 걸음 안 지나서 나는 다시 창피해졌다. 실력 대신 열등감만 늘었나. 사춘기가 안 끝났나. 뭐가 맞든 기분은 안 좋았다.

 

 

 

 

 

 

 

다음날, 독주회 2부 시작 직전의 로비는 한산했다. 다들 착석해있는 탓이었다. 갈까 말까 오기와 늑장을 부리던 나는 결국 급히 꽃다발을 사 안고 공연장 안에 들어섰다. 조명 아래엔 뚜껑이 우아하게 반쪽만 들어 올려진 검은 피아노뿐이었다. 셋째 줄 사이드에 빈 좌석 하나를 발견했다. 구겨져라 티켓을 꼭 쥐고 꽃다발은 너무 세지 않게 안고 사람들의 다리를 꾸역꾸역 지나서 그 자리에 앉고 말았다. 큰 숨을 내쉬며 등을 좀 기대려 하자 박수소리가 홀을 꽉 채웠다. 오른쪽에서부터 바이올린을 든 승민이 형과 피아노 반주자가 들어섰다. 짙은 회색 정장, 안에 조끼와 넥타이까지 꼭 차려 입은 형의 당당한 발걸음이 박수 소리에 묻혔다. 형은 언제나처럼 옅은 미소에 단정한 얼굴이었으나 분명히 평소와는 달랐다. 옷차림이나 반 깐 머리 같은 걸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내 장난에 어울려주지 않고 고집에 져주지 않을 것만 같은, 손댈 수조차 없는 견고함이었다. 자리에 앉은 반주자와 바이올린을 어깨에 올린 형이 얌전히 숨을 가다듬었다. 머지않아 두 사람이 시선과 끄덕임을 주고받고 나면, 형의 활은 돌고래처럼 현 위를 튀어 올랐다. 나는 그 형이 수영하듯 시원시원 활을 쓰는 게 좋았지만 짧게 끊어 칠 때 역시 장관이라고 생각했다. 무수한 빗물이 튀고 총알이 세례로 쏟아지는 순간 같달까. 바흐의 파르티타 1번. 형은 이제껏 본 적 없이 격렬한 곡을 연주했다. 형은 마치 소리밖에 못 듣는, 혹은 소리밖에 못 만드는 사람처럼 악상에 젖어들었다.

나는 그 형이 바이올린을 켤 때마다 내 바이올린을 포기하고 싶었다. 악기를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 않아졌다. 어쩌면 굳이 연주해달라고 조른 적 없는 게 그 이유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형의 연주를 듣는 순간마다 실감한다. 허탈감과 무력감이 얼마나 몰려오든, 그 형이 켜는 바이올린이 너무 좋다고. 공간을 메우는 웅장한 멜로디, 바이브레이션을 할 때 딱 의도한 만큼만 흔들리는 손, 굳은 약속을 지키는 것마냥 절대로 뜨지 않는 그 형의 눈두덩이도.

사이드 자리여서 형의 표정보다도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잘 들어왔다. 몰아치는 구간이 지나자 형은 파도에 떠다니는 종이배처럼 하늘하늘 음악에 맞춰 상체를 움직였다. 나는 어느 찰나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처음엔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엔 뭐가 묻은 거라고 생각했다. 힐끗힐끗, 반주자 쪽으로 몸을 틀고 기울이느라 형이 완전히 뒷모습을 보였을 때였다. 세 번째에 나는 확실히 보았다. 형의 제비초리, 목덜미. 그 곳에 진하게 스며있는 검붉은 멍자국.

 

 

 

 

 

 

 

“인간아.”

 

대기실 코앞에서 손톱을 씹던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승민이 형을 그렇게 불렀다. 깔끔한 정장 위에 까만 목도리를 두르지 않고 어깨 아래로 늘어뜨린 형은 조금 놀랐다가도 이내 강아지처럼 웃었다. 어, 왔었네. 나는 웃을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형의 어깨 너머의 반주자가 힐끔거리든 말든 나는 형의 정장 자켓을 멱살처럼 잡아 끌었다. 형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로비가 아닌 비상계단으로 질질 데려갔다. 내 헤진 운동화와 달리 형의 구두에서는 따각따각 어른인 척해대는 소리가 났다.

 

“그게 긴장하지 말라는 거였지 쥐어뜯으라고 알려준 거였냐?”

 

나는 걸쳐져만 있는 목도리를 잡아당겼다. 화이트 셔츠의 카라를 젖히며 형의 어깨를 돌렸다. 드러난 목덜미에 옅게 퍼런 멍이 가득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 가관이었다. 차라리 망치에 맞았다는 게, 누가 때렸다는 게 말이 될 것 같았다. 설마 그런가. 내 험악한 표정을 본 형은 몸을 틀어 내 손을 찬찬히 잡아 내렸다.

 

“미안해.”

“뭐가?”

“일본도, 이거 멍도. 다 미안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 형이 꼭 미안해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 날 선 눈빛을 내리자 형은 조곤조곤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정인아. 너 기분 상하게 하려는 거 아니니까, 잘 들어줄 수 있어?”

“응…”

“너 일본 가고 싶다고 했잖아. 우리 잠깐만 알바 같이 하면 비행기 값 숙소 값 네 몫 정도 금세 벌거든. 콩쿠르까지 시간도 좀 남았고. 그렇게 우리… 같이 해볼래? ”

 

형은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부탁하듯 꼭 쥐고 있었다. 나는 곧게 나를 바라보는 승민이 형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영원히 그럴 것이다. 동갑처럼 장난스럽다가도 바이올린을 들면 한없이 멀고, 작은 교실에서 9월 21일을 속삭였다가 조명 아래에선 여러 사람들에게 기립박수를 받는 형. 나는 다시 맞춘 시선에다 바보처럼 물었다.

 

“왜…?”

“그냥. 너랑 가면 좋을 거 같아.”

“……”

“그리고, 그거 말하려는 게 왜 이렇게 떨리냐.”

 

형은 머쓱한 웃음 끝에 다른 손으로 퍼런 목덜미를 쓸어 내렸다. 나는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가슴께에 열이 차올랐다. 괜히 잡힌 손을 빼내면 형은 웃으며 내 손에 들린 목도리를 가져갔다. 잘 펼쳐서 내 목에 둘러주기 시작했다.

 

“이제 안 떨게.”

“뭐래.”

“멍 안 들게.

“….응.”

“그래서, 같이 갈래?”

 

이 정도면 묻는 게 아니라 강요 같았다. 이렇게 끈질긴 사람 처음 봤다. 거침없이 활을 휘두르는오른손과 오차 없이 음정을 짚는 왼손은 내게만 다정했다. 나는 목도리에 파묻혀가며 툴툴댔다.

 

“그러든가.”

 

형은 그래도 웃기만 했다. 목을 다 감싸오는 목도리에서 옮겨온 온기. 그런 건 그다지 애매하지 않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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